걱정 지우개 바우솔 작은 어린이 23
서석영 지음, 김소영 그림 / 바우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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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장에는 '겨자씨'에 대한 기록이 있다. 예수가 천국을 빗대어 한 말이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발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겨자씨는 처음에는 아주 작지만 나중에는 새들이 집을 짓고 쉴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굳이 '불교' 용어로 따지고 들면 '카르마'가 되려나...

비록 작은 '무엇'이지만 그것은 '시작'의 형태일 뿐이다. 그것이 심어진 뒤에 그것은 반드시 최초의 미약함을 가볍게 넘어서는 창대함이 될 수 있다. 걱정도 그렇다. 작은 씨앗처럼 심어질 때 그 미약함이 우습지만 점차 나를 집어 삼키는 우주가 된다.

아이에게 '걱정지우개'라는 소설을 읽어 주었다. 소설은 '걱정을 지우는 지우개'를 선물 받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마법 같은 '아이템'으로 머릿속 걱정을 말끔하게 지워주면 너무 좋겠지만 역시 쉽지는 않다. 세상 걱정없는 사람 없다.

무려 6년이나 된 예능 중에 '거기가 어딘데'라는 예능이 있다. '지진희, 차태현, 조세호, 배정남'. 이 출연자들이 '오만 사막'을 횡단하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이 예능을 몹시 좋아한다. 이 예능을 몇 번이나 돌려 봤는지 모른다. 특히 '오만'에 있는 '사막'을 횡단하는 편만 돌려 본다. 여섯 편으로 나눠진 이 예능만 보기 위해 한 OTT를 매월 결제하기도 한다. 이 예능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예능이 가진 균형 때문이다. 나의 기억을 한없이 돌이켜보면 어느새 무념무상의 상태로 걸어가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나의 옷은 찢어진 청바지에 땀냄새가 잔뜩 묻은 작업복일 때도 있었고 서류 가방을 한 손에 쥔 양복일 때도 있었다. 어떤 순간에는 머리만큼 무거운 군화발과 군복일 때도 있었다. 끝없이 걷던 그 추억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스티브 잡스나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찰스 다윈이나 빌게이츠, 아인슈타인은 모두 걷기를 좋아했다. 이들은 중요한 회의나 창의력이 필요한 순간에 걷기를 했다. 걷다보면 어느새 생각은 정리되고 '걷고 있다는 사실'만 남는 경지가 온다. 그 경지가 오면 비로소 내가 했던 '걱정'이라는 것도 게으른 몸이 만드는 '환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초등학교 1학년 추천도서다. 아이를 위한 '봉사'가 아니라, 나또한 깨닫는 바가 있다. 예수는 '겨자씨'를 보고 '천국'을 말했다. 원효대사는 해골물을 보고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다. 그러나 어찌 겨자씨와 해골물이 예수와 원효대사를 가르쳐 깨우치게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깨닫는 것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이태백이 바라본 달과 닐 암스트롱이 바라본 달은 같은 달이 아니다. 그들은 분명 같은 달을 바라봤으나, 분명 다른 달을 바라보았다. 그 둘이 그것을 보고 얻은 '감상'은 '달'이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달'에게서 얻은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

누군가는 낙엽을 보고도 눈물을 흘린다. 문자 하나, 그림 하나 없이도 사람을 울릴 수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많다. 반대로 누군가는 문자 하나 그림 하나 없이도 사람을 웃길 수 있다. '아동용 도서'를 보고도 충분히 성인이 배울 수 있다.

부모는 간혹 '희생'이라는 말과 함께 연상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하다. '희생'이란 자신을 '없애'는 일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없애고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함께 하는 것이다. 아이의 동화를 보며 독후감을 쓰기로 했다. 아이와 함께 읽고 나또한 느끼는 바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결국 아이를 위해 시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나에게도 유익한 시간이어야 한다.

'걱정지우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자신의 사라진 걱정이 다시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걱정을 지우는 지우개를 반드시 누군가에게 선물해야 한다. 아이의 교육에 좋은 말은 틀림없이 어른에게도 좋다. 우리는 어린 시절 매우 좋은 교육을 받고 점차 잊고 살아간다. 고로 성인이 되며 더 많은 사람들이 동화를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걱정을 없애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의 걱정을 없애는 일.

그 이기적인 이타심이야말로 내가 그간 글을 통해 꾸준히 말했던 '이타심'의 본질이다. 소설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의 걱정을 없애고 타인의 걱정을 없애주는 일. 그것은 나에게도 좋고 타인에게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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