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 일본이 사는 법 - 10년 앞선 고령사회 리포트
김웅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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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문제가 자주 언급된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개인적인 의견은 '해결 할 수 없다'이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비단 한국과 일본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 추세다. 식단의 서구화로 청소년 신장이 커졌다거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피부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늘어났다는 이야기에 우리는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사회적 변화'가 '생물학적 변화'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생각보다 꽤 많다.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질병이 치료 가능해졌고 예방접종과 항생제, 만성 질환의 관리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대 수명' 역시 늘었다. 그것은 '사회적 변화'가 만들어낸 '생물학적 변화'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채택하는 국가는 필연적으로 '여성의 교육 수준과 노동 시장 참여'가 높다. 사회가 고도화 되기에 청년이 '사회 활동'을 하기 위해 기대되는 '교육 기간'도 연장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고도 기술 사회는 당연히 고학력 사회를 필요로 하고, 고학력 사회는 긴 교육시간을 필요로 한다. 출산율 감소는 단순히 '돈'이 부족해 생기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자원이 적은 '동아시아' 국가는 '인력'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밖에 없다. 서구 다른 국가들보다 더 빠른 인구 감소를 경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역사'와 '사회구조'를 원인으로 두고 있다.

당장 내일부터 우리는 '독일말을 사용합시다.'가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는 과거에 연결된 오늘을 살고 있다. 고로 갑자기 끊어내지 못하는 사회구조는 '당장의 변화'가 아니라 '점차적인 변화'와 적응이 필요한 문제다.

출산률이 감소하고 인구가 고령화 된다면 '노인부양'의 문제가 대두된다. 과연 그럴까. 1960년대 대한민국의 기대 수명은 54세였다. 지금 현대 대한민국의 기대수명이 100세에 가까워진다. 짧은 시간에 생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다만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그보다 느리다. 다시말해, 1960년대에 환갑잔치는 꽤 큰 행사였다. 기대수명을 웃도는 장수를 축하하는 행사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오늘의 환갑은 간단히 가족과 저녁식사를 한다거나 조금 더 의미있는 '생일잔치'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노인부양'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다. 과연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노인의 수'가 아니라, '노인'이라는 정의를 바꾸어야 한다. 기대수명이 54세였던 시기와 기대수명이 80세가 넘는 시대에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1960년대 평균 신장도 큰 변화가 있었다. 대략 10cm의 차이가 난다. 다시 말해서 그 시대에 남성의 키 170cm면 장신에 속했다. 지금의 170cm는 분명 같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신장에 속한다. '농업 국가'였던 과거에는 그들이 할 수 있던 '생산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정보 시대인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 그들은 역시 적잖은 생산능력을 갖고 있다. 분야에 따라 다르긴 해도 분명 젊은 층 보다는 더 큰 생산능력을 갖췄다. 워렌버핏의 대부분의 자산이 노후에 생겼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나이가 들면 반드시 생산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출산율 감소는 분명 국가적으로 큰 재앙에 가깝다. 다만 인구가 늘어나는데는 출산률이 전부는 아니다. 많이 태어나고 빨리 죽는 것이 그만큼 재앙이다. 이런 재앙은 이미 대한민국에 있어왔다. 정보화 사회에서 사람이 빨리 죽는다는 것은 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재앙에 가깝다. 그런 재앙도 지금의 재앙만큼이나 무서운 일이다. 그것을 이미 지나갔기에 그 공포심이 덜 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기대수명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태어난 이들은 일찍 죽지 않고 장수한다. 인구 피라미드를 보면 '르완다'나 '이집트'처럼 아래로 넓게 펼쳐진 구조가 있다. 또한 일본이나 한국처럼 아래로 좁아지는 구조도 있다. 그러나 30년 뒤에 '대한민국'과 '일본'을 '르완다'와 '이집트'가 추월해 가는 사회는 상상하기 힘들다. 고도 개발 사회는 피라미드 상위층이 넓어야 유리하다. 하위층이 넓은 피라미드는 최소 30년 간 '생산 능력' 없는 '소비 개층'이며 이들은 한창 생산할 '중위 개층'의 부담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사회가 꼭 암울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의미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그 언어가 만들어내는 착시에 가깝다. 고령화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저출산'은 '생산 계층'의 부담을 줄이는 역할도 한다. 적게 태어나서 오래 사는 시대를 받아 들이기 위해, 우리는 '공포'가 아니라 '대비'를 해야 한다.

그간 '청소년 사교육 시장'을 열었던 과거의 시장을 '성인 사교육' 시장으로 변화할 수 있고 '사라지는 초등학교'를 '노인 학교'로 개교할 수 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시장과 사라지는 시장을 잘 판단하여 그 중간 지점에서 지혜롭게 변해가는 것은 아예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가는 것과는 다르다. 이미 완성된 시설 기반을 바탕으로 기존 산업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이미 일본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적자원'을 통한 성장이 필수적인 사회가 된다. 우리가 먼저 맞이하게 될 사회 변화는 다른 의미로 '산업 지배력'으로 이용 될 수 있다. 뉴스와 다큐멘터리가 만들어내는 공포에 굳이 두려워하고 좌절해서는 안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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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전쟁 2 - 백악관 워룸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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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작가의 소설을 자주 보진 않았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던지, '킹메이커'를 보면 '실존인물'의 '실명'이 등장한다. 소설이 워낙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기에 소설을 '실제'와 헷갈리는 사람도 있기도 한다. 소설이야 그저 재밌으면 그만이긴 하지만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과 구분할 수 없는 사람에 따라 그것을 다르게 봐야할 것 같다. 어디서부터 실제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모호하고 그 경계에 작가 가치관이 섞여 있을때, 소설은 약간 위험할 수도 있다.

다만 아예 배경 지식이 전무할 때, 대략의 윤곽이 잡힌다는 점에서 그의 소설의 장점도 분명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딱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의 소설을 보기 위해서 그 전과 후로 적잖은 책을 읽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사람은 원래 입체적이고 다면적이다. 제3자가 아니라 자신을 보아도 그렇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사람은 '과거'에 의해 '현재'가 정의된다. 즉,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지금을 만든다는 것이다. 다만 '아들러'에 의하면 사람의 과거는 '현재'에 의해 정의된다. 즉,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원인론과 목적론 중 나는 '목적론'에 애정이 간다.

사람은 슬프고 싶기에 과거의 기억을 불행에 가깝게 편집한다. 즐겁고 쉽기에 과거의 기억을 행복에 가깝게 편집한다. 슬프고 즐겁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의 '나'이다. 그런 이유에서 과거는 '운'과 '불운'의 해석이 오락가락하는 '새옹지마'와 같다.

과거의 기억이 행운이 된 것은 '지금' 때문이고, 과거의 기억이 불운이 된 것 또한 '지금' 때문이다. 도망간 말이 다른 말을 가져오고, 말을 타고 놀던 아들이 다리가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진 아들이 군징집을 피할 수 있다던 '새옹지마'의 이야기를 보자면 모든 것은 해석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좋고 나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인생도 입체적이고 다면적인데 어떤 사람을 '어떠하다'라고 정의할 순 없다. 물론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 만들기'다. 캐릭터는 복잡하기보다 단순할 때 이해하기 쉽다.

'트럼프'는 이럴 것이다.

'푸틴'은 이럴 것이다.

'문재인'은 이럴 것이다.

실존 인물의 과거를 일반화하여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를 쉽게 꿰어 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모든 것이 그렇지 않겠는가. 과거에 그러 했던 사람도 그렇지 않을 수 있고, 그 사람이 그렇다고 봤던 이유는 내가 그렇게 봤기에 그럴 수도 있다. 단순한 논리다.

'링컨'은 말년에 대통령직을 한 번 수행 했을 뿐이지만 우리에게 그는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으로 여겨진다. 다만 그의 삶, 대부분은 '사업' 혹은 '변호사' 였다. 그 또한 크게 존경 받거나 성공에 이르렀다고 할 수만도 없다. 우리가 그를 정의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느 시점에 어떤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정치'와는 별개로 '주식'에서 이런 말이 있다.

'주식은 신도 모른다.'

비슷하게도 뉴턴이 자신이 평생 벌었던 자산을 투자에 실패하며 말했던 바도 떠오른다.

"우주의 이치를 계산 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예측할 수가 없다."

방향과 속력을 알면 다음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거시물리학과 다르게 사람의 미래는 양자역학처럼 '알 수 없다'로 정의된다.

속력과 방향을 알았다고 다음을 알 수 없다는 의미다. 10년 간, 꾸준히 담배를 피웠던 사람의 내일 역시 담배를 피운다로 정의 한다면, '담배를 끊는 사람'이라는 정의는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예측불가하기에 우리의 삶이 이처럼 다채롭고 '주식시장'과 '인간 심리', '정치'와 '국제정세'가 어려운 것이다.

한창의 나이에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이름을 들었던 적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를 보니, 그가 했던 예언이 웬만하면 적중했단다. 그 신과 같은 능력은 믿음직스럽다기보다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미래를 예측한 이들의 이야기에 흠뻑 젖어있던 시기를 지나, 지금은 그러한 이야기를 '허무맹랑'이라 본다.

우리는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아바바바'를 보고도 '아빠'를 떠올린다. 달 표면에 있는 얼룩을 보고 토끼와 절구를 떠올리고 하늘에 의미없이 떠있는 구름의 모양으로 '토끼'라던지, '강아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아무렴 아무말이나 하더라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아'가 되고 '어'가 된다. 지금의 '밈'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 중 하나가 '무한도전'이다. 거의 모든 '미래'를 미리 예측하는 듯 한, 여러 짧은 영상과 화면은 실제로 예측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산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것'이라는 사실보다 우리가 '그것'을 '그것'이라고 본다는 사실이다.

소설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어떻게 썼는지보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아는 것을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지 고민해 보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글에서 '나'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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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전쟁 1 - 풍계리 수소폭탄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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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미국 텍사스에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은 에너지 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국가였다. 21세기 초반에 일어난 이 사건은 '셰일혁명'의 시발점이다. 여기에는 '조지 미쉘'이라는 인물이 있다. '셰일'이 어떻게 오늘의 국제 정세까지 영향을 끼치게 됐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갸야 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경제적으로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미국 달러는 세계 주요 기축 통화로 자리를 잡았고 1971년에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를 폐지하며 본격적으로 세계는 '환율 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다 1973년 중동에서 전쟁이 벌어진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아랍국가들이 잃어버린 영토를 찾기 위해 시작한다. 전쟁 초기 아랍 군대들은 성공적인 전세를 가졌으나 시간이 지나고 이스라엘이 반격하면서 전세는 금방 역전된다. 아랍 산유국들은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지원한다고 봤다. 실제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원조를 지원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이 올라갔다. 서방 국가들은 이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중동 전쟁'에 개입한 이유는 이렇다. '중동'은 세계 석유 매장량의 60%가 몰려 있는 지역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과 유럽'은 '석유'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석유의 소비량은 점차 높아졌고 석유가 국가 안보와 경제에 핵심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동에서의 불안정한 석유 공급은 석유 가격을 급등시키고 수입국들의 경제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준다. 안정적인 석유를 공급 받기 위해, 유럽과 미국은 중동에 필수적으로 '친서방 국가'가 필요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다. 동아시아에서 '안보 균형'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지역 안보 균형을 위해 중동에 꼭 필요한 국가가 됐다. 이 지역은 '적진의 한 가운데'에서 전략적 정보를 취합하고 군사적 완충지가 되는 역할을 했다. 이 지역은 필연적으로 높은 수준의 '군사 안보 비용'이 지출된다. 이 지역은 꽤 중요한 '무기 수출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미국과 유럽이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하자, 중동 또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경제 타격을 주기로 한다. 바로 '석유 수출 금지'다. 석유 가격이 오르면 물가가 오른다. '민주주의 국가'를 흔드는 유효한 전략은 '경제'를 제재하는 일이다. 이로써 선거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적 압박을 하는 것이다. OPEC국가들은 석유를 무기화 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석유 생산량을 줄이고 가격을 인상하여 경제적 타격을 주었다. 이것이 '오일쇼크'다.

미국은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 변동에 취약한 국가였다. 에너지는 곧 국가 안보였다. 이 상황에 미국은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고 달러의 국제적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중동'에서 힘의 균형을 갖게 해 줄 국가를 찾았다. 바로 '사우디 왕정'이다. 사우디 왕정은 내부적으로 여러 문제가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했고 반정부 세력은 점차 강해져 갔다. 이란과 이라크 등 주변 국가들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에는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 확장하는 이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사우디 왕정'의 이해 관계는 당시 '미국'과 맞아 떨어졌다. 이렇게 미국은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고 사우디는 안보적 위기를 해결하는 21세기 아주 중요한 국제 관계가 형성됐다.

1974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거래'에 관한 비밀 협정이 체결된다. 그것이 '페트로달러 시스템'이다. 사우디는 석유를 오직 미국 달러로만 거래하도록 했다. 이 결정은 다른 OPEC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결국 미국 달러의 국제적 위상은 더 높아졌다. 이를 조건으로 사우디는 중동 지역의 안정을 보장 받았다. 사우디와 다른 산유국들은 석유 판매로 얻은 달러를 다시 미국 금융 시장에 재투자 했다. 이는 미국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했다. 다시 달러는 국제적 수요를 지속 시킬 수 있는 구조를 갖게 됐다.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2000년대 초반 미국 텍사스에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에너지 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미국에 '셰일혁명'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조지 미쉘'이라는 인물이 있다. 조지 미셸은 1919년 그리스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텍사스 A&M 대학에서 석유 공학을 전공한다.

중동에 전쟁이 일어나고 석유가격이 뛰자, 조지 미셸은 텍스사 바넷 셰일층을 주목한다. 셰일층에 단단한 암석에 천연가스로 갇혀 있는 자원을 끄집어 올리는 기술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미셸은 수평 시추와 수압 파쇄법을 결합한 기술을 개발했다. 다시 말해서 빨대를 꼽아 석유를 끌어 올리는 기존 시추 방법이 아닌 물과 모래, 화학물질을 섞은 높은 수압의 물을 셰일층에 수평으로 집어 넣고 '가스'를 밀어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몇 차례 실패를 했으나 1997년에 셰일 가스에서 유의미한 양의 셰일을 추출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이 에너지 독립을 할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한 '시작점'이다. 이처럼 미국 내에서 석유가 생산된다면 불필요한 중동 전쟁에 개입할 이유도 사라졌다. 실제로 현재 미국은 세계 제1의 석유 산유국이 됐으며 에너지 자급자족을 넘어 수출까지 할 수 있는 국가가 됐다. 국제 에너지 시장의 판도가 바뀌었다. 미국에게는 더이상 '러시아'나 '중동'의 평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됐다. 중동과 러시아에서 전쟁이 나더라도 미국 내에서 '석유 가격'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실제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중동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여도 미국이 과거와 같이 크게 대입할 명분도 사라졌다. 그것은 다시 말해 중동과 러시아는 '미국'이 더이상 자신들의 전략적 행위를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미국이 내려 놓은 힘의 균형에서 전쟁이 발생하고 있다. 트럼프가 '파리협약'을 탈퇴하고 본격적으로 '석유' 산업을 키우고자 할 때, 이미 전쟁은 예고되어 있었다.

이 국제 정세에서 '대한민국'의 입지는 어떤가. 일단 주요 수입국인 '미국'을 잃은 사우디는 주요 수입국인 '동북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는 꽤 우리에게 유리한 입장이다.

실제로 사우디는 다양한 자국의 대규모 인프라 사업(라인 프로젝트와 같은)을 '한국'과 '일본'의 주요 석유 수입국에게 제안한다. 거대 시장을 잃은 사우디와 석유에 대한 안정적인 수급이 필요한 대한민국의 이해관계가 만나며 꽤 적잖은 시너지를 만들어 냈다. 과거 '미국'에 의존하던 다양한 이해관계를 다변화하고자 하는 사우디와 동아시아의 이해관계가 만나게 된 것이다. 과거 사우디는 '미국'에 판매했던 석유 판매금의 상당수를 '미국 금융시장'에 재투자하며 선순환을 가졌다. 이제 미국이 에너지 독립을 실현한 상황에서 그들은 또다른 의미의 '안보적 독립'과 '경제적 독립'을 이뤄야 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그들은 투자금이 향하던 방향을 '사우디 내부'의 인프라 형성에 흘러가도록 힘을 쓴다. 이때 충분한 기술력을 갖고 있으며 '석유 생산량'이 제로에 가까운 '동북아'와 새로운 협업 관계를 형성해 가고 있다.

미국이 에너지 독립을 실현한 상황에서 '동북아', '미국', '유럽', '중국' 등은 하나의 커다란 시장에서 벗어나 파편화 되고 다각화 형태의 관계로 형성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굳이 하나의 국가를 선택한 이유도 없다. 실제로 한국 가스공사는 2017년부터 미국으로 부터 LNG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수입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의 입장에서는 에너지 공급원이 다변화하여 안정된 수급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여기서 '중국'의 성장은 안보적 위협이 된다. 중국은 '한국'과 '일본'의 주요 수출산업과 '미국'의 기술산업에 대해 점차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또한 자국 시장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하고 반대로 외부 시장으로 막대한 수출을 한다. 이런 불균형에 대해 미국은 '중국 견제'를 시작했다.

유튜브, 구글, 페이스북 등 거대 기업들이 중국 산업으로 진출하지 못한다. 중국은 자국 내에 디지털 장벽을 세워 철저하게 차단한다. 대신 바이두, 텐센트, 알리바바와 같은 자국 기업을 보호하고 성장시키고 있다. 중국 내의 독자적 디지털 생태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자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게 하는 전략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미국과 다른 선진국의 기술을 탈취하고 산업 스파이를 통해 불법적인 방식으로 기술을 얻는다. 이는 미국 기술 산업의 직접적인 위협으로 작동했다. 중국의 막대한 무역 흑자 또한 글로벌 경제 질서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다. 막대한 양의 달러가 '중국'으로 흡수됐다. 중국은 이렇게 흡수된 미국 달러로 '미국 국채'를 대량 매입했다. 그리고 중국은 미국의 주요 채권자가 됐다. 2021년 기준으로 중국은 약 3조 달러 이상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달러는 글로벌 기축 통화로써, 국제 무역과 금융 거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미국 경제와 안정성, 신뢰성에 크게 의존한다. 다만 중국이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을 만큼의 미국 채권을 갖고 있기에 환율 변동과 무역 불균형 해소는 '미국'에게 아주 핵심되는 대중 안보 전략이다.

다양한 측면을 볼 때, '김진명 작가'의 '미중전쟁'처럼 미국과 중국이 전면전을 벌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그간 세계를 지탱해오던 힘의 균형이 나누지면서 우리가 그간 알고 있던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을 우리는 보고 겪을지도 모른다. 이 과정은 어떤 측면에서 '대한민국'에 큰 '호재'가 되기도, 큰 '악재'가 되기도 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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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문해력이 평생 성적을 결정한다 - 문해력을 기르기 위한 최고의 교과서 활용법
오선균 지음 / 부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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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보니 '학업성취'를 결정하는 것은 '책'이 아니다. 그럴싸하다. 책과 성적은 상관관계는 있으나,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문해력이 부족한 시대다 보니, '책읽기'가 마케팅으로 꽤 유용한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부자가 되고 싶으면 책을 읽어라', 혹은 '우등생이 되고 싶으면 책을 읽어라'와 같은 메세지가 유행한다.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리면 사람들이 상어의 공격을 받는다. 실제로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릴 때마다 사람들은 상어의 공격을 받는다. 그렇다고 아이스크림의 판매가 상어의 습격과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여름이 되면 사람들이 바닷가를 방문할 확률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릴 뿐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은 이유는 책이 성공을 보장하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아이스크림과 상어의 습격만큼이나 몇 번의 상관관계를 거쳐야 도달하는 거리일지 모른다. 곰곰히 생각해보건데, 책은 어떤 이유로 '부'와 연결되어 있고, 어떤 이유로 '학업'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연결짓기에 따라 '행복'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책'은 정말 '만능'일까. 그렇진 않다. 곰곰히 생각해 보건데, 책과 관계로 연결된 그것들에는 중간을 잇는 '다리'가 하나 있다. 바로 '목적의식'이다. 어쩌면 '주체성'과 관련 깊다.

'책'을 많이 읽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많이 읽어서 '학업 성적'이 우수해지는 것도 아니다. '책'을 많이 읽어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려서 상어에게 습격 당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주체성'과 연관된다. '주체성'은 매우 중요하다. 주체성은 '독해력'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한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아무개도 ATM기기에 적힌 '아랍어', '독일어', '영어' 중에서 '영어'를 선택한다. 부모가 등떠밀고 선생이 강압적으로 시켜도 하지 않던 '영어 읽기'를 본인이 필요하면 하게 된다. 목적이 생기면 그때는 주체성이 생긴다. 반복이 가능하고 지속이 해진다. 그것은 '문해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독해력은 '주체성'이다. 글을 '읽어 내느냐'와 '읽게 되느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어린시절 공부에 있어서 '게을렀던 성인'도 사회인이 되면 제 몫을 해낸다. 세상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못한 대부분의 성인도 각자 자신의 위치를 꾸리고 살아간다. 우리를 구성하는 사회는 대부분 '야간 자율학습'을 도망간 경험이 있거나, 공부보다 친구가 더 좋았던 이들로 이뤄져 있다. 학창 시절 '선생님'의 숙제도 제대로 하지 않던 이들이 갑작스럽게 '사회 구성원'으로 충실을 다하는 이유는 '이제' 목적의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목적의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족일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다. 한 번도 책을 펴보지 않던 성인도 갑작스럽게 관련 서적을 독파해 나갈 지 모른다. 목적의식은 '주체성'을 만들어낸다.

대한민국 성인 중 서울대 졸업 비율은 0.87%도 되지 않는다. 인서울대학 졸업비율도 10% 안팍이다. 성인의 80% 이상은 현재를 기준으로 3등급 이하 성적이라 유추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사회가 바라는 눈높이가 상위 10%를 평균으로 두고 있기에 나머지 90%는 이상한 열등감과 마케팅에 속아 넘어가게 된다.

책 한 권 읽지 않아도 학업 성적이 좋은 경우가 있다. 책을 무지하게 좋아하지만 성적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유전자일 수도 있고 환경일 수도 있겠다. 다만, 분명 책이 절대적인 영향은 아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건, 주인의식과 목적의식 등의 상위에 존재하는 '주체의식'이다.

자신이 분명한 인식과 판단에 근거하여 행동에 방향을 싣는 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톰 크루즈, 알버트 아인슈타인, 애거서 크리스티, 리처드 브랜슨은 모두 어린 시절 낭독증 진단을 받았다. 다만 그들은 세계적인 기업가 혹은 연구가, 사업가, 예술가 등으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책'이 만능이라면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책은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꽤 훌륭한 '도구'이지만 그것이 '성패'를 가르는 키워드가 되진 않는다.

이는 화약을 닮았다. 화약은 중국에서 발명됐으나 이들은 화약을 주로 폭죽이나 불꽃놀이를 하는데 사용했다. 오락용으로만 사용되던 화약이 유럽 국가로 넘어가면서 역사를 바꾸었다. 유럽은 군사적 목적으로 화약을 사용했다. 이들은 화포와 총기를 개발했고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확장했다. 역사를 바꾼 것은 '화약' 그 자체가 아니라, '화약'을 사용하는 '주체자'에 달려 있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그것은 몹시 중요하다. 헬렌 켈러는 생후 19개월에 병으로 청각과 시각을 모두 잃었다. 그는 한 장의 책도 눈으로 보지 않고도 1904년 우등으로 라드클리프 대학에 입학 후 우등으로 졸업한다. '오디오북은 효과가 있는가'. '전자책은 효과가 있는가', '어느 학원을 다녀야 하는가', '어떤 책을 읽혀야 하는가'

부모가 고민하는 그러한 고민들은 결국 '주체성'을 앗아가는 고민이지 않는가. 주체성은 외부에서 심어주는 것이 아니다. 주체성은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해내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면 '그깟 책' 한 권 읽지 않고도 충분히 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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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20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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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드릴 평온을 허락하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요."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라는 '미국 신학자의 기도문'이다.

신앙이 있던, 없던 마음에 담고 살면 좋은 문구다. 사회는 열정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독려한다. 이 분위기에 '불가능도 있다'라고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냉정하게 보자면 받아 드려야 하는 일도 분명히 있다. 어리석음은 때로 할 수 없는 것에 에너지를 쏟고, 할 수 있는 것에 무기력 하게 한다. 이 둘을 분별 할 수 있는 힘은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처럼 중요하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최선의 '지'이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이 최악의 '무지'인 것 처럼 말이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꿔가는 능동적인 삶을 만든다.

'메타인지'라고 부르는 이것은 과거나 현재나 중요하다. 이처럼 자신이 어쩔 수 없는 하나를 꼽자면 '인간관계'가 아닐까 싶다. 인간관계는 얼핏 자신의 뜻대로 될 것 처럼 느껴진다. 가령 그 관계가 나에게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이런 이유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의 행동에 우리는 간섭하기 시작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행동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불편해 한다. 자신이 아닌 이유로 자신의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에 자신의 행복을 맡겨 놓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정복욕이며 극단적인 이기심이다.

우리는 상대를 바꿀 자격이 없다. 방법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러한 사실을 꾸준히 확인하면서도 역시 꾸준하게 시도한다.

모든 관계는 상호연결되어 있다. 존중을 받기 위해서는 존중을 해야하고 사랑 받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한다. 물론 존중한다고 무조건 존중을 받는 것은 아니며, 사랑한다고 무조건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쨌건 그 반대의 행동을 취할 때 보다 그 확률은 높아진다. 즉, 사랑 받고 싶은 사람에게 '무관심'하거나 '증오'를 표출하는 것보다는 '사랑'을 표출하는 것이 사랑 받을 확률을 높이고, 존중 받고 싶은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무시'하고 업신 여기는 것 보다 '존중'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즉 우리가 그 관계에서 수동적으로 받아지는 것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내기 위해 능동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다만 내가 그런 행동을 취했다고해서 상대가 반드시 나에게 같은 피드백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대'의 몫이다. 앞서 말한대로 그것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관계에서는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다. 우리의 행동은 바꿀 수 있는 것에 속하며, 상대의 행동은 바꿀 수 없는 것에 속한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행동 보다 상대의 행동을 바꾸려 노력하지만 다시 말해 모든 관계는 상호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철저히 상대의 과제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상대의 몫은 상대에게 던지고 자신은 자신의 몫을 다해야 한다. 즉, 결과를 바라지 말고 행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는 사실 비슷해 보이지만 상당히 다르다. '원인'은 대체로 '현재'에 있고 '결과'는 '미래'에 있다. 미래는 바꿀 수 없고, 현재는 바꿀 수 있다. 그것을 불교적으로 보기에 '인과응보'라 한다. 이를 줄이면 '과보'라 부르는데, 인연에 따라 길흉화복의 갚음을 반드시 받게 된다는 의미다. 말이 어려워도 업인에 의해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자연적 이치와 질서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지 않는가. 우리가 콩을 심고 팥이 나길 기대하지 않고, 팥을 심고 콩이 나길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그에 합당한 결과가 나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진인사대천명'이 있다. '사람은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의미다.

우리는 '상태'가 아니라 '행동'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 '건강해지기'라는 결과보다는 '운동하기'라는 행동에 집중해야 하고, '1등'이라는 등수보다는 '노력'이라는 행동에 집중해야 한다.

다만 사람은 이를 잊고 간혹 결과에 집중하는 경우가 있다. 운동을 덜 했지만 건강해지기를 바라고, 노력은 하지 않았지만 1등을 하기를 바란다. 다만 우리가 바라야 하는 것은 '어떤 상태'가 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바라야 한다.

행복해 질 수 있도록 주변이 바뀌길 기대하는 것은 모든 신호가 파란불이 됐을 때, 출발하겠다는 마음가짐과 같다.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모든 신호가 파란불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나아가면서 잠시 멈추더라도 그것이 '가는 길'임을 아는 것에 있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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