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가을 산을 

어떻게 혼자 넘나

우리 둘이서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중국, 7세기


떠남은 다른 곳에 다다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 문을 닫고서 그 문을 뒤로하고 떠나는 것은, 새로운 전망과 모험, 새로운 가능성과 동기를 일으키는 세계로 들어나는 것을 뜻한다. 53년 동안 함께 살았던 스코트가 만 100세가 된 지 3주일 뒤에 메인에 있는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날 하나의 장이 막을 내렸지만, 내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이와 더불어 계속되고 있다. ... 스코트가 떠났으므로 나 홀로 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외롭지 않았다. 고요한 생활과 고독을 즐겼으며, 걱정해주는 친구들의 잦은 전화와 방문이 번거롭기까지 했다. 나는 그들이 필요없었다. 스코트와 같이 살 수 없게 된 마당에 차라리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다.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 동안 물건을 정리하고 집안일, 책, 원고, 농장에 관한 일들을 적절하게 결정하여 정리한 뒤 나 또한 홀로 떠날 것이다. 나는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내 사람은 50년 넘게 스코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으므로 이 책은 스코트에 초점을 맞춘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내 삶에서 태양은 오직 하나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또 그렇게 떠났으며, 곧 시야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사람은 10대에 내 눈을 부시게 하였으나, 잠깐 동안의 에피소드로 그쳤다. ... 그 뒤 완벽한 동반자를 만나 훨씬 강렬하고 더 오랫동안 지속된 사랑으로 바뀌었는데,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가버린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까닭이나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첫사랑은 열정적이고, 억제할 수 없으며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그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겠다는 헌신의 언약들로 가득차 6년 동안 이어지다가, 냉랭한 관계로 가라앉더니 마침내 무관심이 되었다. 비할 데 없이 훌륭하게 시작된 우리 관계는 지속될 때에는 사랑이 있었으나, 냉담함으로 끝났다.


우리가 멈춰서야 할 교차로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오르막길을 택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 사람에게 키스했다. 나는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진정한 갈림길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길이 높게 되어 있던 낮게 되어 있든 거기서부터 우리는 함께 여행했다. 이것은 내게는 정말 놀라운 방향 전환이었다. 우리는 드문드물 만났지만, 나는 그이에게 확신과 신뢰와 존경을 전해주었다. ... 그 사람은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바람직한 평생의 반려자가 되려는 참이었다.


(스코트의 좌우명)"간소하고 질서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을 멀리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 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있는 만남을 이루어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계급투쟁 운동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


"사랑은 자신에게서 흘러나와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그것은 실패하든 성공하든 탐험을 계속한다."- H. G. 웰즈, <처음과 마지막 일>


그 사람의 사랑과 편지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고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같은 때, 같은 장소 다른 소녀 또는 다른 젊은 여성이 나타났더라도 같은 대접을 받고, 같은 촉매제 노릇을 했을지 모른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그때 필요한 대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을 잃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어떤 면을 죽였다. 크리슈나는 이제 남은 일생동안 가까운 피붙이 없이 지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를 강철 같은 사람으로 돌아서게 했다.


"크고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오히려 점진적이고 느린 축적이 있어야 한다." 에드워드 카펜터는 <삶과 죽음의 드라마>에서 이렇게 썼다.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얻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라는 것이다." - 올더스 헉슬리 


"진정한 예술가는 그림을 그리거나 색칠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온 삶에서 모든 생각과 행동을 아름다움에 맞추는 사람이다."-해블록 엘리스


"건강, 책, 일 그리고 여기에 사랑이 더해진다면 운명이 주는 모든 괴로운 고통과 아픔도 견딜 만해진다."-엘버트 허바드


우리가 같이 한 삶, 그 뒤 결혼으로 이어진 생활은 성질이 서로 비슷한 두 영혼의 결합이었다. 폭넓은 공동 관심사, 비슷한 호기심, 간소하고 건강하며 몸을 쓰는 생활 환경을 좋아하는 것같은 모든 것이 진실한 결혼 생활을 이루는 사랑을 낳았다. 


우리는 단순하고 건강에 좋은 환경 속에서 자연을 따르며 사는 생활을 추구했다.


검소하고 스스로 만족하며 자립하는 그 삶은 우리 이마에 땀을 흘려 생계를 꾸리고, 고용주나 어떤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먹을 양식을 기르고 살 집을 지으며, 필요한 나무를 베고, 자신의 생활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돈이 거의 필요없었고, 쓸 일도 없었다. 물건을 살 돈이 없으면, 우리가 손수 만들거나 그냥 없이 지냈다.


스코트와 내게 텔레비전도 마찬가지로 혐오스러운 것이었는데, 사람들 특히 아이들의 시가을 빼앗는 나쁜 미끼로 여겨졌다. ... 텔레비전은 개인을 현실과 갈라서게 한다. 갈수록 더 수동적인 태도를 갖게 하고 무의식 속에 해로운 상을 불어넣으며, 의식을 둔하게 만들고 환각상태를 일으킨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사랑을 쏟을 곳은 반드시 있다. 또한 어떤 곳이든 시작과 끝이 있다. 


1980년에 우리 집에 처음 들른 로날드 라콘테 교수가 '니어링네를 찾아서'라는 글을 썼다. "정보가 지식으로 간주되고 지식이 흔히 지혜를 가장하는 시대에 진정한 현자를 만나는 것은 정말로 가치있고도 이채로운 일인데, 스코트 니어링은 의심할 바 없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스코트는 말했다. "일은 사람이 늙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준다. 일이 곧 내 삶이다. 나는 일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일하는 사람은 결코 권태롭지 않고 늙지 않는다. 희망과 계획의 자리에 후회가 들어설 때 사람은 늙는다. 일과 가치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늙음을 막는 가장 훌륭한 처방이다."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레오나르도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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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 -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


십 대 때부터 나는 금을 찾아다녔지.

모든 산골짜기 개울마다

내가 파헤친 모래는

사막이 되고도 남았어.


하지만 아무 금속도 발견하지 못했어.

기껏 구리 동전 몇 개와

돌멩이, 반짝이는 뼛조각, 잡동사니뿐.


왔던 것처럼 나는 떠날 거야.

그러나 시간을 낭비한 건 아니었어.


비록 내 두 손 사이로 모래는 빠져나갔지만

모래가 내게 준 끝없는 기쁨이 있었으니

한번 시도해 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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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슬랭은 어떤 이상한 병에 걸려 있었다. 얼굴이 빨개지는 병이었다. ... 조금씩 마르슬랭은 외톨이가 되어 갔다. ... 왜냐하면, 아이들이 자기의 얼굴 색깔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것이 마르슬랭에게는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 하지만 마르슬랭은 <그렇게까지> 불행하지는 않았고, 단지 자신이 어떻게, 언제 그리고 왜 얼굴이 빨개지는지를 궁금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꼬마 르네 라토는 아주 매력적인 아이였고, 우아한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훌륭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르네는 갓난아이 때부터 아주 희한한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전혀 감기 기운이 없는데도 자꾸만 재채기를 하는 병이었다.


그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어 갔다. ... 그들은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그들은 짓궂은 장난을 하며 놀기도 했지만, 또 전혀 놀지 않고도, 전혀 말하지 않고도 같이 있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있으면서 전혀 지루한 줄 몰랐기 때문이다. 




르네 가족은 이사를 가고 없었던 것이다. ... 마르슬랭은 르네 라토를 잊지 않았고, 자주 그를 생각했으며, 매번 그의 소식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보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어린 아이 시절엔 하루하루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흘러가 버린다. 한 달 한 달도 마찬가지이고...한 해 한 해도 마찬가지이다. 마르슬랭은 나이를 먹어 갔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붉혔다.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는 항상 조금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다녔다. 어느덧 어엿한 어른이 되었지만 변함이 없었다. 


그는 감기에 걸린 불쌍한 남자가 끊임없이 기침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 그는 바로 라토였다. 무척 노력해 보았지만, 두 친구가 느꼈던 기쁨을 여러분에게 설명하기란 내겐 도저히 역부족이다. 


그들은 아주 자주 만났다. ... 그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있으면서 결코 지루해 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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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중에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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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이처럼 급작스런 사고를 '뇌일혈'이라 불렀으며, 한번 걸렸다 하면 백발백중 죽는 병이었다. 그러다가 요즘에 와서는 소생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죽지는 않지만, 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비된 상태에서 의식은 정상적으로 유지됨으로써 마치 환자가 내부로부터 감금당한 상태, 즉 영미 계통의 의사들이 '로크드 인 신드롬(locked-in syndrome)'이라고 표현한 상태가 지속된다. 왼쪽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만이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바야흐로 의식은 시작되었다. 두 명의 건장한 사나이가 내 어깨와 발을 잡더니, 침대에서 들어올려 되는 대로 바퀴의자에 내려놓았다. 수습 투우사가 그 서임식을 마치면 정식 투우사가 되듯이, 이제 나는 단순한 환자에서 완벽한 장애인이 된 셈이다. 


이 지옥같이 끔찍한 병에 걸릴 확률은 복권에 일등으로 당첨될 확률만큼이나 희박하다. 


지금 현재로서는 끊임없이 입 속에 과다하게 고이다 못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정상적으로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기분일 것 같다.


주위의 친지들이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하나씩 둘씩 가져다 준 우정어린 처방이 기념비라도 세울만큼 쌓였다. 이들은 어느곳엘 가든지, 나를 위해 온갖 정령들에게 가호를 빌었을 것이다. ... 다양한 신들의 철통 같은 보호막도, 내 딸 셀레스트가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 비한다면 한낱 종이벽에 불과하다. 그 아이와 내가 잠드는 시간이 거의 일치하므로, 나는 밤마다 나를 악몽으로부터 지켜 주는 신비스런 기도 소리와 더불어 꿈의 나라로 향한다.


E S A R I N T U L O M D P C F B V H G J Q Z Y X K W

얼핏 보기에는 무질서해 보이는 이 글자 행렬은, 하지만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치밀하고 복잡한 계산의 결과이다. 따라서 단순한 알파벳이라고 하기보다는 프랑스어에서 사용되는 빈도에 따라 철자를 배치한, 이를테면 글자들의 빌보드 차트라고 할 수 있다. ...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ESA...  로 된 알파벳표를 내게 펼쳐 보이면, 나는 내가 원하는 글자에서 눈을 깜박인다. 상대방은 그 글자를 받아 적으면 된다. 


지난 8개월 동안 내가 먹은 것이라고는 레몬을 탄 물 몇 방울과 요구르트 반 숟가락이 고작이었으나, 그것마저도 기관지로 잘못 넘어가 애를 먹었다. ... 위와 연결된 존데를 통해 투여되는 두세 병 분량의 갈색 물질이 나의 하루분 필요 열량을 충당해 준다. 다만 감각적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맛과 냄새에 대한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상드린느의 하얀 가운에 달려 있는 명찰에는 언어장애치료사라고 적혀 있지만, 수호천사라고 읽는 편이 더 잘 어울린다. 내게 의사소통 체계를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상드린느이니,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오래전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을 것이다. ... 하루에 두 번 상드린느가 병실 문 안으로 들어와서는,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표정의로 모든 불편함을 대번에 해소시켜 줄 때 느끼는 위안감은 말로 이루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내 몸을 항상 옥죄고 있는 보이지 않는 잠수종이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어지는 느낌이다.


나는 나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 없이 베르크의 휴양지를 떠나지 못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흔두 살이라는 고령때문에 아버지의 아파트 계단도 못 내려오실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둘 다 '로크드 인 신드롬' 환자인 셈이다. 나는 마비된 내 몸 속에 갇혔고, 아버지는 4층 계단 때문에 발목이 묶이셨다.


아무도 없는데, 음식물 섭취를 조정하는 기구의 경보장치가 30분 전부터 계속해서 울려댄다. 머리를 갉아먹는 듯한 이 끈질긴 삑삑 소리만큼 바보스럽고 절망적인 것이 또 있을까. 게다가 내 오른쪽 눈꺼풀을 봉해 놓았던 반창고가 땀 때문에 떨어져, 반창고에 붙은 속눈썹이 고통스럽게 내 동공을 찔러댄다. 설상가상으로 소변 배설 존데의 접속관이 빠지는 바람에, 나는 완전히 오줌벼락을 맞고 말았다.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나는 앙리 살바도르가 부른 옛 노래의 후렴을 계속해서 흥얼거렸다. "어서와요, 베이비. 이런 일쯤은 별거 아니죠."


탁구공처럼 재빨리 되받아치는 재치 있는 말을 구사할 수 없는 것이, 내가 처한 상태가 가져다 주는 불편한 점 중의 하나이다.


내 아들 테오필 녀석은 5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를 두고 얌전히 앉아 있는데, 나는 그 아이의 아빠이면서도 손으로 녀석의 숱한 머리털 한번 쓸어 줄 수도, 고운 솜털로 뒤덮인 아이의 목덜미를 만져 볼 수도, 또 부드럽고 따뜻한 아이의 작은 몸을 으스러지도록 안아 줄 수도 없다. 


햇빛이 창으로 하나 가득 들어온다. 눈부신 석양의 빛줄기가 정확하게 내 침대 머리맡에 와닿는 시간이다. 가족들의 출발에만 마음 졸이다가 커튼을 쳐달라고 부탁하는 걸 그만 잊었다. 세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간호사라도 와 주겠지.


나는 점점 멀어진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멀어지고 있다. 항해중인 선원이 자신이 방금 떠나온 해안선이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광경을 바라보듯이, 나는 나의 과거가 점점 희미해져 감을 느낀다. 예전의 삶은 아직도 나의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점차 추억의 재가 되어 버린다.


소동이 가라앉고 다시 침묵이 찾아오면, 나는 비로소 내 머릿속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들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나비의 날갯짓은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이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명상에 가까운 주의력이 필요하다. 숨소리가 조금만 커져도 그 소리에 파묻혀 버릴 정도이다. 어찌 보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내 청각은 향상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비 소리를 점점 더 잘 듣게 된다. 어쩌면 내가 나비의 귀를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창가에 쌓인 책들을 바라본다. 오늘은 아무도 나에게 책을 읽어 줄 사람이 없으니, 그저 쓸모없는 도서관처럼 여겨진다. 세네카, 졸라, 샤토브리아, 발레리 라르보가 겨우 1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지만 가혹하게도 나는 가까이 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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