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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 : 이미지가 그리는 진실 ㅣ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78
프랑수아즈 카생 지음, 김희균 옮김 / 시공사 / 199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9.6
유독 서양 화가 중엔 이렇게 살아있을 때 평가가 박한 비운의 천재들이 많은 것 같다. 흔히 고흐가 불운한 천재의 대명사로 꼽히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니 마네도 그 반열에 들 만하다. 어느 정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있었고 당시에 팔릴 만한 그림이 무엇이고 그려낼 수 있는 안목과 실력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의 대표작은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올랭피아>, 그리고 <폴리 베르제르 바>다. 당시 기준에선 아주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화풍과 주제의식을 담은 작품들로 후대 화가들, 특히 인상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정작 마네는 인상파가 아니었고 대신 인상파의 '아버지'로 불렸다. 사물과 현상을 보이는 대로가 아닌 내가 보고 이해한 대로 그려낸다는 철학은 후대의 피카소나 뭉크의 작품 세계관에서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마네도 벨라스케스 같은 스페인 거장들의 회화에 영향을 받았지만 이렇게 현대에 있는 그대로의 부조리를 조명하거나 권태로움을 화폭에 담아낸 화가는 사실상 마네가 최초라고 한다.
마네의 기대와는 달리 당시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고 <풀밭~>의 경우엔 그림이 찢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게끔 그림을 높이 걸고 따로 경비원들이 그림 앞을 지켜야 했을 정도라고 하니 정말 말 다했다. 아무튼 악명을 떨친 셈이라 볼 수 있는데 마네 입장에선 여간 억울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아니었던지 이를 매일 신문에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마치 총살을 당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에밀 졸라나 샤를 보들레르 같은 지식인은 화가가 아닌 사람들 중에 마네를 가장 지지한 인물들인데 그들이 없었다면 마네가 붓을 꺾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열렬히 지지해 당사자 입장에선 퍽 힘이 됐을 듯하다.
물론 대중들로부터 싸늘한 반응이 돌아오고 평론가나 동료에게만 인정 받는 기분도 마냥 좋을 것 같진 않다. 특히 마네처럼 성격이 약간 괴팍해도 반권위주의적인 그림을 그린 사람이라면 자신의 환장할 만한 명성이 탐탁찮아 했을 것도 같다. 마네로선 대중이나 기득권의 인정도 받고 싶었고 그래서인지 그 당시 미술계에서 주류로 여겨지는 역사화나 종교화도 그렸다. 그러나... 내 눈엔 마네의 대표작들과 비교하면 평이하게 여겨진다. 실제로 그리 유명하지도 않고. 그 나름대로 감각적이고 개성적인 작품들이지만 딱 거기까지다.
자신의 재능을 가장 잘 표출할 수 있는 분야가 시대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걸 직시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모르긴 몰라도 그래도 잘하는 게 하나는 있어 다행이다 하고 쿨하게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자기애가 강하고 표현 욕구가 강한 예술가 중에선 말이다. 따로 옮겨 적은 '인상 깊은 구절'에서 결점이 곧 재능이자 잔인한 운명이었다는 말은 화가를 비롯해 모든 예술가 지망생에겐 희망적이면서 참담하게도 들리는 말이다. 그야말로 희망고문이 따로 없는데, 저 말에 혹해 부족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결국 타협점을 찾아 다른 길을 도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두 가지 길 모두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자의 경우 쪽에서 역사에 남는 사람이 배출될 확률이 높지만 확률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불특정 다수의 지망생들에게 현실의 벽의 높이를 경시할 수도 있을 말을 주입하는 것도 재고해봐야겠지만...... 하여간 천재 이야기는 이래서 문제다. 천재 이야기를 읽고 자극을 받는 건 좋은데 무턱대고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하면 나중에 비참한 기분을 가득 안겨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참으로 명심해야 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마네는 국내에서 인지도가 미묘하지만 뭉크나 고흐 못지않게 흥미로운 화가다. 좋은 작품도 많이 그렸고 특유의 작품세계가 무난한 이름에 비해 강렬히 대비돼 더 반전매력으로 다가온다. 예술가라면 특히 귀감이 될 만한 화가이고 예술가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풀밭~>은 처음엔 혹평을 면치 못했더라~ 고 당시 시대상을 짐작해볼 만한 역사적 자료로도 의미가 커서 <마네>는 비전공자가 읽기에도 재밌을 책이다. 시공 디스커버리의 책들은 다른 스터디 때문에 격주로 꼭 한 권씩 읽고 있는데 이 책이 제일 괜찮았다. 분량이며 번역이며... 다른 디스커버리 도서도 진득하게 몇 권 더 골라서 읽어보려고 한다. 앞으로 읽게 될 책들이 <마네>만큼 흥미롭다면 좋을 텐데, 과연?
좀더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대중들이 못마땅해한 그 ‘결점‘이 바로 그가 지닌 재능의 핵심이며, 그의 잔인한 ‘운명‘이었음을. - 1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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