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자리 친구
오츠이치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9.5 






 이 작품은 오츠이치의 작품집 <메리 수를 죽이고>에 수록된 동명의 중단편을 원작으로 둔 만화이자 내가 오랜만에 접한 작가의 작품이다. 작화를 맡은 미요카와 마사루의 아주 유려한 그림체가 깔끔하게 떨어지는 서사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사실상 미래를 예언하는 신문을 제외하면 현실적인 전개가 일품이었던 이 작품에 참 잘 어울리는 그림체가 아니었나 싶다. 이지메를 소재로 다룬 이야기가 불쾌한 독자라도 그림체에 딴지를 걸 순 없을 듯하다. 

 물론 소설을 원작으로 둔 작품답게 그림체 못지않게 문체도 훌륭하다. 그렇기에 원작 소설도 읽어보려고 한다. 유려한 그림체를 뚫고 어필되는 날카롭고 진정성 있는 주인공의 독백과 죄의식이 원작에서 어떻게 표현됐을지, 내지는 만화가 얼마나 잘 살렸는지 비교하고 싶어졌다. 이지메를 당하는 급우를 방관하던 주인공이 느닷없이 그 친구를 도와주게 되는 전개를 비롯해 어색하면서 의심스러우면서 긴장감 넘치는 두 소년의 로드무비가 깔끔하고 개연성 있게 전개됐기에 만화나 소설로나 여러 번 접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이야기에 내제된 환상성은 메타포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지만 엄연히 추리 서스펜스의 장르를 띄고 있는 작품인 만큼 논리적인 추리와 반전도 제법인 편이다. 단편이란 한계 때문에 반전이 다소 뻔하고 작위적인 편이지만 그 결론에 도달하는 주인공의 추리가 합리적이고 그 추리가 인도한 결말은 살짝 예상 밖이어서 '방심은 금물'이란 말은 이 작품을 두고 하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오츠이치는 단편에 일가견이 있다는 세간의 평에 걸맞게 매력적인 소재와 주인공들과 미련없이 결말을 내준 덕분에 다 읽고 나서 오히려 여운에 젖었던 것도 좋았다. 간혹 후속작을 암시한다든가 세계관 확장을 노리거나 아니면 에필로그를 지지부진하게 추가하는 식으로 기어코 조개처럼 꾹 닫힌 결말을 선보이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뒷일을 상상하게끔 유도하는 열린 결말을 선보이는 작가도 있다. 당연히 나는 후자에 더 마음이 가는데 후자의 작품이 적은 경우는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에 미련을 버리기 쉽지 않아서 라고 생각됐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미련없이 결말낼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작가가 다음에 쓰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라서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하고 짐작했다. 실제로 이 작가는 단편을 정말 많이 썼고 내가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았을 때도 많은 작품집이 국내에 출간됐다고 한다. 한때 히트친 작가가 아니라 지금도 왕성히 활동 중인 작가라는 사실도 무척 반가웠다. 일단 이 작품의 원작이 수록된 작품집 <메리 수를 죽이고>부터 찾아 읽어야겠다. 오랜만에 읽은 작가의 이야기라 그런지 더욱 매료됐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옥상 미사일
야마시타 타카미츠 지음, 김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8.2 





 10년 전에 내가 이 소설에 대해 10점 만점을 주며 극찬 일색의 포스팅을 썼던데, 내가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 지금 내 입장에선 믿기지 않는다. 지금은 아무리 재밌어도 10점은 거의 주지 않는데 그 당시에 나는... 뭐랄까, 좋게 말하면 관대하고 나쁘게 얘기하면 헤펐다. 

 물론 다시 읽어도 실망스럽다거나 수준 떨어지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당장 세계 대전이 터질 만한 상황임에도 어쩐지 이역만리에서 펼쳐지는 이슈인 터라 주인공 일행은 고등학생이나 그 주변 사람들이 남의 일처럼 여기며 일상을 살아간다는 묘사는 지금 시점에선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와 재밌게 읽었다. 인간은 엄청 큰 규모의 사건보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법이다. 그 골때리면서도 당연한 상황을 작가는 유쾌한 문체와 캐릭터로 하여금 매력적으로 전개시킨다. 


 적당히 오글거리고 적당히 통쾌하고 개성적인 캐릭터와 대사들의 향연, 묘하게 쉴 틈 없는 사건들의 연속 등 작품은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 내내 호흡을 끊지 않으면서 밀도 높게 이야길 진행시킨다. 세계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당장 미사일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맥이 탁 풀려버리는 결말과 그와중에도 아랑곳 않고 자기들 내키는 대로 옥상의 평화를 지켜낸 주인공 일행은 어쩐지 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더니, 이 소설이야말로 그 말을 길게 풀어낸 아주 구체적인 예시로 들 만하지 않은가 싶다. 

 옥상의 평화를 지키는 옥상부라는 것도 그 나이대 학생들이나 입에 담을 만한 참 오글거리는 설정이지만 작중에서 우연한 기회로 모인 옥상부원들은 사뭇 진지하게 옥상의 평화를 지킨다. 뭐, 말이 옥상의 평화지, 실상은 개인적인 문제로 시무룩한 옥상부원의 문제를 다 같이 다방면에서 접근해 하나씩 계속 해결해나간다는 게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10년 전에 나는 이들의 여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꽤나 몰입하며 읽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 10점 만점을 줬을 리는 없겠지. 


 현지에선 포스트 이사카 코타로로도 불린다는 작가의 대표작인 만큼 실제로 작중에선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처럼 귀엽고 엉뚱한 언동을 보이는 캐릭터가 꽤 많이 등장한다. 킬러나 백수들이 좋은 예시겠는데, 이러한 코믹한 요소가 덜했다면 오히려 세계의 위험 속에서도 일상을 영위하는, 혹은 영위하려고 노력하는 주인공 일행의 모습이 되려 우습게 보여서 작품의 매력이 퇴색됐을 것 같다. 그랬다면 정말 이도 저도 아닌 작품이 됐을 것이다.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 나사가 조금 풀린 것 같은 주제의식도 괜찮았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왜 10년 전에 10점 만점을 줬는지 잘 모르겠다. 그 당시엔 막 스무 살이 됐을 무렵이라 정해진 틀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옥상부의 모습에 선망을 느꼈던 걸까? 그러한 선망이라면 지금도 갖고 있는데... 그냥 10년 사이에 다양한 소설을 읽어서 눈이 높아진 것이라 생각하련다. 그게 아니라면 납득이 가지 않으니까. 

신이 아니라도 용서는 할 수 있어. - 11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으로 화해하기 - 관계가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그림이 건네는 말
김지연 지음 / 미술문화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0 





 명화를 소재로 한 에세이나 서적을 보면 알게 모르게 저자들의 주제의식이나 말하는 바가 대동소이한 경우가 많다. 레퍼토리도 비슷하고 명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거의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달하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다루는 명화들의 구성도 흡사하기까지 하다. 이는 독자 입장에서 알아서 걸러 읽었더라면 마주치지 않았을 아쉬움이긴 한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대개 책이라는 물건은 저자의 문장력이 아주 형편없지 않은 이상 적어도 50페이지까지는 신선하게 읽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독자들을 낚은 책들은 뒷심과 신선함이 부족한 중후반부에 도달하게 만들어 괜찮았던 첫인상을 뒤집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그림으로 화해하기>는 비록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으나 명화를 통해 저자가 개인적인 아픔을 위로받았거나 막막한 세상살이를 이겨낼 수 있을 만한 일종의 실마리를 얻었음을 약간 장황하긴 해도 진정성 있게 풀어낸다. 각 장마다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도 다양하고 무엇보다 다루고 있는 명화가 정말 유명한 작품이 아닌 것들도 많이 선정했고 심지어 이름을 처음 접해본 화가가 많아 그것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했다. 거기다 내가 제일 마음에 들고 저자를 신뢰할 수 있던 부분은 바로 저자가 현대 예술에 대해 갖는 시선이었다. 자기가 봐도 이게 왜 유명한지 바로 와 닿지 않는다거나 어쩌면 내가 범인이라 이해를 못하는 것이지 훗날 엄청난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등의 문장은 겸손하면서 솔직해 호감이 갔다. 그리고 다행이게도 그 호감은 끝까지 유지됐다. 


 로트레크나 젠틸레스키, 쿠르베, 피카소, 세잔, 밀레처럼 익히 알려진 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은 그리 새롭게 읽히지 않은 반면 제일 첫 장에서부터 소개된 에밀리 메리 오즈번처럼 생소한 화가에 대한 소개나 아니면 고흐와 벨라스케스처럼 유명 화가가 그린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품에 대한 저자의 감상은 인상적이었다. 케테 콜비츠와 무리요가 그토록 따뜻한 화풍의 화가임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것도 값진 경험이었고 무엇보다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세계에 대한 저자의 감상이 평소 내가 느꼈던 것과 비슷해 반갑기도 했다. 오늘날 봐도 굉장히 현대적인 감성이 충만한 호퍼의 그림에서 쓸쓸함보다 편안함이 느껴진다는 말은 정말 공감했다. 때론 독립되고 적막할 수도 있는 분위기여야 느껴지는 안도감도 있는 법이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란 점에서 이 책을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글인 것 같다가도 꽤 전문적인 미술 지식이나 역사가 튀어나와 지식을 습득하는 맛이 있었고 평소 잘 모르는 화가도 많이 소개받아 전반적으로 만족도 높은 책이었다. 책에 수록된 모든 글의 퀄리티가 고르지 않고 약간 기복이 있는 편이었지만 적어도 '그림을 통해 세상과 화해했다'는 추상적인 개념만큼은 제대로 전달해 약간 과할지언정 불필요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저자가 출간한 책이 딱 이 책 한 권밖에 없던데 나중에 새로운 책이 출간된다면 찾아 읽을 의향이 있다. 새로운 책의 출간이 머지않았길 바란다. 

고통으로 가득한 삶의 시간을 버텨 내는 것에 어떠한 가치가 있을까? 나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무의미한 바람을 떨치기 어렵다. 그때의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씩씩하게 그 시간을 극복해 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극복이라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 58~59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 1 - 개정판 휴먼앤북스 뉴에이지 문학선 5
김민서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8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스무살 당시엔 주인공의 초조함을 짐작만 할 뿐이었다. 스무살에게 스물네살의 고민거리는 먼 미래의 일이었다. 하물며 클럽과 명품에 환장한 연영과 졸업생인 여자의 고민은 내겐 먼 이야기였다. 그래도 주인공의 진지한 고민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작가의 묘사력과 통찰력 덕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서른살이고 주인공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지만 이젠 주인공의 고뇌가 뼈에 사무치게 공감이 간다. 일단 칙릿 소설의 정체성을 띄고 있는 소설답게 명품과 클럽이 즐비한 밤거리 묘사는 여전히 읽기 버거웠지만 장래에 대한 고민, 자꾸 수동적으로 살게 되는 것에 참담해 하는 주인공의 자책이 전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공이 작가처럼 80년대생이라서 군데군데 세대 차이가 느껴졌지만, 가령 '여자는 부모 기대대로 돈 많고 배경 탄탄한 남자 잘 만나 결혼하면 장땡이다' 라는 가치관이 더 만연했던 2000년대 중후반의 분위기는 이제 와선 노골적으로 읽혔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 세대에도 통할 만한 통찰이 있기에 공감하며 읽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도 이삼 년 전부터 진지하게 장래를 고민했지만 고민한 것에 비해 주체적으로 뭔갈 시도하지 않아서 주인공처럼 주변에 휩쓸리는 모습이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군대를 가고 복학을 해서 시간이 걸렸지만 주인공의 경우 그 흔한 휴학 한 번 안 하고 턱걸이로 학점만 채워 스물넷에 덜컥 졸업을 해버렸으니 불안감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남들이 보기에 스물넷은 정말 창창한 나이인데 당사자는 정작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적성에 전혀 맞지 않는 일을 한다. 그러면서 주변에 어떻게든 저마다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부럽게 바라본다. 설령 우여곡절이 많건 별 노력 없이 쟁취한 것처럼 보여도 적어도 이도 저도 아닌 자기자신보다는 낫지 않으냐면서.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는 여성들의 허영을 그리곤 하는 칙릿 소설로 분류되는 소설이라는 이유로, 또 분량도 적잖아서 은근히 진입장벽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소설이다. 실제로 나도 다시 읽을 때 주인공과 친구들의 한심한 모습들과 그와 무척이나 대비되는 주인공의 우울한 독백 때문에 남은 페이지를 다 소화할 수 있을까 읽으면서 걱정이 됐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몰입하게 됐다. 불필요한 이야기와 캐릭터라곤 단 한 가지도 없었고 개연성에도 문제가 없다는 반증일 텐데 후반부의 충격적인 전개와 얼핏 교훈적인 주제의식이 사람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내가 봤을 땐 완벽한 성장 소설이지 않았나 싶다. 주인공과 친구들, 그리고 여러 등장인물의 고민의 내용이 우리 시대에 시사하는 점이 각양각색이면서 '위태로운 청춘'이라는 공통된 테두리 안에서 논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우린 저마다 모두 다르면서 비슷하기에 고민한 바를 털어놓고 산다면 삶의 활로가 뚫리기도 하겠는데 하고 희망을 가지게 됐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축복임을 여실히 느꼈다. 혼자 힘으로 해결하거나 떨쳐낼 수 있는 고민은 좀처럼 없으니 말이다. 


 이만한 장편소설을 집필할 수 있는 필력의 소유자가 왜 신작을 내지 않는지 궁금하다. 김민서 작가의 작품 중에 이 작품말고 <쇼콜라 쇼콜라>와 <에어포트 피크닉>도 읽었는데 <에어포트~> 이후로 십 년이 넘게 신간 소식이라곤 없다. 십 몇 년 전 소설치고 지금도 공감이 가는 내용인 걸 생각하면 이 작가에겐 시대와 유행을 뛰어넘는 시선이 있는 것 같아서 무소식이 더욱 아쉽다. 김영하 작가가 말하길 모든 소설가는 은퇴하지 않으며 여전히 신작을 구상하며 쓴다는 말을 어디 강연에서 말한 적 있는데, 그 말대로 김민서 작가도 남모르게 열심히 신작을 집필하고 있는 중이라면 참 좋겠다. 그리고 그 소설이 꼭 출간되길 바란다. 오랜 시간이 농축된 신작은 어떨는지 꼭 읽어보고 싶다. 

어쩌면 블랙 미니드레스는, 나처럼 남드로가 다르게 보이고 싶어 하지만 정작 커다란 모험은 두려워하는 여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옷일지도 모른다. - 1권 79p



체육 시간에 편을 가를 때마다 맨 마지막에 남는 애들은, 자신이 그런 위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자신이 인구조사에 포함되는 국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그 순간부터, 사회를 이루는 데 필요한 측은한 구성원 역할을 떠안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인생은 절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인생의 절반을 넘어섰을 때에야 차츰 자각하게 되는 그 슬픈 사실을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닫게 되는 순간, 남은 삶은 두려움과 고통의 반복이다. - 2권 16~17p



조금이라도 쉽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주변은 언제나 나 같은 사람이 둘러싸고 있어. 저 사람이 언제 추락하는지 기다리면서, 그 추락을 정당화시킬 온갖 이유로 무장한 사람들이. - 2권 32p



가장 힘든 사람은 위로받아 마땅하지만 가장 힘들지 않은 사람은 개인의고민이 어쨌든 간에 힘든 티조차 내지 말아야 한다. 고통에도 크기가 있고 무게가 있다. 가벼운 사람은 자신의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더 크고 더 무거운 고통으로 어깨가 짓눌릴 때까지. - 2권 71p



타인에게 하는 구걸보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구걸이 나를 몇 배는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 2권 202p



그런데 꼭 보면, 그 배고픈 사람들일수록 급한 대로 아무거나 먹었다가 체해서 괴로워해. 결국 자기가 비난했던 사람들이랑 똑같은 얼굴로 다시 먹었던 거 토해내고 입맛에 맞는 거 찾아다녀.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것 같더라고. 난 나쁜 일이라고 생각 안 해. 입맛에 맞는 음식이 결국 비싼 음식이라는 건 좀 탈이지만. - 2권 25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네 : 이미지가 그리는 진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78
프랑수아즈 카생 지음, 김희균 옮김 / 시공사 / 199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9.6 



 유독 서양 화가 중엔 이렇게 살아있을 때 평가가 박한 비운의 천재들이 많은 것 같다. 흔히 고흐가 불운한 천재의 대명사로 꼽히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니 마네도 그 반열에 들 만하다. 어느 정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있었고 당시에 팔릴 만한 그림이 무엇이고 그려낼 수 있는 안목과 실력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의 대표작은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올랭피아>, 그리고 <폴리 베르제르 바>다. 당시 기준에선 아주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화풍과 주제의식을 담은 작품들로 후대 화가들, 특히 인상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정작 마네는 인상파가 아니었고 대신 인상파의 '아버지'로 불렸다. 사물과 현상을 보이는 대로가 아닌 내가 보고 이해한 대로 그려낸다는 철학은 후대의 피카소나 뭉크의 작품 세계관에서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마네도 벨라스케스 같은 스페인 거장들의 회화에 영향을 받았지만 이렇게 현대에 있는 그대로의 부조리를 조명하거나 권태로움을 화폭에 담아낸 화가는 사실상 마네가 최초라고 한다. 


 마네의 기대와는 달리 당시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고 <풀밭~>의 경우엔 그림이 찢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게끔 그림을 높이 걸고 따로 경비원들이 그림 앞을 지켜야 했을 정도라고 하니 정말 말 다했다. 아무튼 악명을 떨친 셈이라 볼 수 있는데 마네 입장에선 여간 억울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아니었던지 이를 매일 신문에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마치 총살을 당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에밀 졸라나 샤를 보들레르 같은 지식인은 화가가 아닌 사람들 중에 마네를 가장 지지한 인물들인데 그들이 없었다면 마네가 붓을 꺾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열렬히 지지해 당사자 입장에선 퍽 힘이 됐을 듯하다. 

 물론 대중들로부터 싸늘한 반응이 돌아오고 평론가나 동료에게만 인정 받는 기분도 마냥 좋을 것 같진 않다. 특히 마네처럼 성격이 약간 괴팍해도 반권위주의적인 그림을 그린 사람이라면 자신의 환장할 만한 명성이 탐탁찮아 했을 것도 같다. 마네로선 대중이나 기득권의 인정도 받고 싶었고 그래서인지 그 당시 미술계에서 주류로 여겨지는 역사화나 종교화도 그렸다. 그러나... 내 눈엔 마네의 대표작들과 비교하면 평이하게 여겨진다. 실제로 그리 유명하지도 않고. 그 나름대로 감각적이고 개성적인 작품들이지만 딱 거기까지다. 


 자신의 재능을 가장 잘 표출할 수 있는 분야가 시대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걸 직시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모르긴 몰라도 그래도 잘하는 게 하나는 있어 다행이다 하고 쿨하게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자기애가 강하고 표현 욕구가 강한 예술가 중에선 말이다. 따로 옮겨 적은 '인상 깊은 구절'에서 결점이 곧 재능이자 잔인한 운명이었다는 말은 화가를 비롯해 모든 예술가 지망생에겐 희망적이면서 참담하게도 들리는 말이다. 그야말로 희망고문이 따로 없는데, 저 말에 혹해 부족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결국 타협점을 찾아 다른 길을 도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두 가지 길 모두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자의 경우 쪽에서 역사에 남는 사람이 배출될 확률이 높지만 확률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불특정 다수의 지망생들에게 현실의 벽의 높이를 경시할 수도 있을 말을 주입하는 것도 재고해봐야겠지만...... 하여간 천재 이야기는 이래서 문제다. 천재 이야기를 읽고 자극을 받는 건 좋은데 무턱대고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하면 나중에 비참한 기분을 가득 안겨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참으로 명심해야 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마네는 국내에서 인지도가 미묘하지만 뭉크나 고흐 못지않게 흥미로운 화가다. 좋은 작품도 많이 그렸고 특유의 작품세계가 무난한 이름에 비해 강렬히 대비돼 더 반전매력으로 다가온다. 예술가라면 특히 귀감이 될 만한 화가이고 예술가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풀밭~>은 처음엔 혹평을 면치 못했더라~ 고 당시 시대상을 짐작해볼 만한 역사적 자료로도 의미가 커서 <마네>는 비전공자가 읽기에도 재밌을 책이다. 시공 디스커버리의 책들은 다른 스터디 때문에 격주로 꼭 한 권씩 읽고 있는데 이 책이 제일 괜찮았다. 분량이며 번역이며... 다른 디스커버리 도서도 진득하게 몇 권 더 골라서 읽어보려고 한다. 앞으로 읽게 될 책들이 <마네>만큼 흥미롭다면 좋을 텐데, 과연? 

좀더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대중들이 못마땅해한 그 ‘결점‘이 바로 그가 지닌 재능의 핵심이며, 그의 잔인한 ‘운명‘이었음을. - 12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