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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 1 - 개정판 ㅣ 휴먼앤북스 뉴에이지 문학선 5
김민서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1년 3월
평점 :
9.8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스무살 당시엔 주인공의 초조함을 짐작만 할 뿐이었다. 스무살에게 스물네살의 고민거리는 먼 미래의 일이었다. 하물며 클럽과 명품에 환장한 연영과 졸업생인 여자의 고민은 내겐 먼 이야기였다. 그래도 주인공의 진지한 고민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작가의 묘사력과 통찰력 덕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서른살이고 주인공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지만 이젠 주인공의 고뇌가 뼈에 사무치게 공감이 간다. 일단 칙릿 소설의 정체성을 띄고 있는 소설답게 명품과 클럽이 즐비한 밤거리 묘사는 여전히 읽기 버거웠지만 장래에 대한 고민, 자꾸 수동적으로 살게 되는 것에 참담해 하는 주인공의 자책이 전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공이 작가처럼 80년대생이라서 군데군데 세대 차이가 느껴졌지만, 가령 '여자는 부모 기대대로 돈 많고 배경 탄탄한 남자 잘 만나 결혼하면 장땡이다' 라는 가치관이 더 만연했던 2000년대 중후반의 분위기는 이제 와선 노골적으로 읽혔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 세대에도 통할 만한 통찰이 있기에 공감하며 읽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도 이삼 년 전부터 진지하게 장래를 고민했지만 고민한 것에 비해 주체적으로 뭔갈 시도하지 않아서 주인공처럼 주변에 휩쓸리는 모습이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군대를 가고 복학을 해서 시간이 걸렸지만 주인공의 경우 그 흔한 휴학 한 번 안 하고 턱걸이로 학점만 채워 스물넷에 덜컥 졸업을 해버렸으니 불안감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남들이 보기에 스물넷은 정말 창창한 나이인데 당사자는 정작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적성에 전혀 맞지 않는 일을 한다. 그러면서 주변에 어떻게든 저마다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부럽게 바라본다. 설령 우여곡절이 많건 별 노력 없이 쟁취한 것처럼 보여도 적어도 이도 저도 아닌 자기자신보다는 낫지 않으냐면서.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는 여성들의 허영을 그리곤 하는 칙릿 소설로 분류되는 소설이라는 이유로, 또 분량도 적잖아서 은근히 진입장벽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소설이다. 실제로 나도 다시 읽을 때 주인공과 친구들의 한심한 모습들과 그와 무척이나 대비되는 주인공의 우울한 독백 때문에 남은 페이지를 다 소화할 수 있을까 읽으면서 걱정이 됐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몰입하게 됐다. 불필요한 이야기와 캐릭터라곤 단 한 가지도 없었고 개연성에도 문제가 없다는 반증일 텐데 후반부의 충격적인 전개와 얼핏 교훈적인 주제의식이 사람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내가 봤을 땐 완벽한 성장 소설이지 않았나 싶다. 주인공과 친구들, 그리고 여러 등장인물의 고민의 내용이 우리 시대에 시사하는 점이 각양각색이면서 '위태로운 청춘'이라는 공통된 테두리 안에서 논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우린 저마다 모두 다르면서 비슷하기에 고민한 바를 털어놓고 산다면 삶의 활로가 뚫리기도 하겠는데 하고 희망을 가지게 됐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축복임을 여실히 느꼈다. 혼자 힘으로 해결하거나 떨쳐낼 수 있는 고민은 좀처럼 없으니 말이다.
이만한 장편소설을 집필할 수 있는 필력의 소유자가 왜 신작을 내지 않는지 궁금하다. 김민서 작가의 작품 중에 이 작품말고 <쇼콜라 쇼콜라>와 <에어포트 피크닉>도 읽었는데 <에어포트~> 이후로 십 년이 넘게 신간 소식이라곤 없다. 십 몇 년 전 소설치고 지금도 공감이 가는 내용인 걸 생각하면 이 작가에겐 시대와 유행을 뛰어넘는 시선이 있는 것 같아서 무소식이 더욱 아쉽다. 김영하 작가가 말하길 모든 소설가는 은퇴하지 않으며 여전히 신작을 구상하며 쓴다는 말을 어디 강연에서 말한 적 있는데, 그 말대로 김민서 작가도 남모르게 열심히 신작을 집필하고 있는 중이라면 참 좋겠다. 그리고 그 소설이 꼭 출간되길 바란다. 오랜 시간이 농축된 신작은 어떨는지 꼭 읽어보고 싶다.
어쩌면 블랙 미니드레스는, 나처럼 남드로가 다르게 보이고 싶어 하지만 정작 커다란 모험은 두려워하는 여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옷일지도 모른다. - 1권 79p
체육 시간에 편을 가를 때마다 맨 마지막에 남는 애들은, 자신이 그런 위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자신이 인구조사에 포함되는 국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그 순간부터, 사회를 이루는 데 필요한 측은한 구성원 역할을 떠안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인생은 절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인생의 절반을 넘어섰을 때에야 차츰 자각하게 되는 그 슬픈 사실을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닫게 되는 순간, 남은 삶은 두려움과 고통의 반복이다. - 2권 16~17p
조금이라도 쉽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주변은 언제나 나 같은 사람이 둘러싸고 있어. 저 사람이 언제 추락하는지 기다리면서, 그 추락을 정당화시킬 온갖 이유로 무장한 사람들이. - 2권 32p
가장 힘든 사람은 위로받아 마땅하지만 가장 힘들지 않은 사람은 개인의고민이 어쨌든 간에 힘든 티조차 내지 말아야 한다. 고통에도 크기가 있고 무게가 있다. 가벼운 사람은 자신의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더 크고 더 무거운 고통으로 어깨가 짓눌릴 때까지. - 2권 71p
타인에게 하는 구걸보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구걸이 나를 몇 배는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 2권 202p
그런데 꼭 보면, 그 배고픈 사람들일수록 급한 대로 아무거나 먹었다가 체해서 괴로워해. 결국 자기가 비난했던 사람들이랑 똑같은 얼굴로 다시 먹었던 거 토해내고 입맛에 맞는 거 찾아다녀.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것 같더라고. 난 나쁜 일이라고 생각 안 해. 입맛에 맞는 음식이 결국 비싼 음식이라는 건 좀 탈이지만. - 2권 2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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