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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
정승구 지음 / 아카넷 / 2015년 6월
평점 :
디렉토르 정이 빠라이소 쿠바를 찾았다. 그는 미국 유학파 출신 감독으로 경제학과 정책학은 연구한 사람인데, 영화감독이 되었단다. 그리고 작년 세월호 사건을 보고 나서 먹먹한 가슴을 안고 쿠바에 갔다. 쿠바는 그에게 힐링의 장소였을까? 미국과 반세기 넘는 대결을 벌이면서도 혁명의 가치를 고수해온 고집스러운 나라. 하지만, 미국과의 혹독한 엠바고 결과 국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질 대로 피혜해졌다. 얼마 전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쿠바와의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드디어 국교정상화를 발표했다. 사회주의 쿠바는 이제 자본주의를 허용하고 세계질서로 편입되는 걸까. 쿠바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디렉토르 정의 이야기를 통해 들을 수가 있었다.
어떤 특정한 인물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적어도 혁명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21세기 오늘의 쿠바를 있게 만든 두 인물에 대해 작가는 상세하게 이 책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한 명은 아직도 살아 있는 피델 카스트로이고, 자신이 솔직하게 체빠라고 밝히고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 체 게바라다. 소싯적 남미 전역을 도는 여행(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참조하시라)을 통해 소위 바바나 공화국이라 불리는 신제국주의의 제물이 된 남미 여러 나라의 처참한 현실을 깨닫게 된 체 게바라는 평생의 동지라고 할 수 있는 카스트로를 만나게 되면서 운명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동지가 된 두 사람은 불가능해 보이는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일약 전설이 되었다. 미완의 혁명을 여전히 지도하고 있는 카스트로와 달리 체 게바라는 콩고와 볼리비아를 전전하며 혁명전파를 위해 애쓰다가 젊은 나이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 둘의 합작품인 쿠바의 오늘이 작가의 글쓰기 타깃이 되었다.
소위 말하는 ‘특별시기’를 거치면서 쿠바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 작가의 진단이다. 콜럼버스가 상륙한 이래, 제국주의 스페인의 특별한 식민지이자 구대륙과 신대륙을 이어주는 전초기지로서 쿠바의 전략적 중요성은 익히 입증된 바 있다. 한 때 미국의 51번째 주가 될 정도의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던 쿠바는 사탕수수 재배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제조업의 부재와 이웃 베네수엘라처럼 풍부한 석유자원을 가지지 못해 공산품 수입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해야했다. 미사일 위기 이래, 강력한 우방이었던 소련이 붕괴하고, 경제지원이 끊기면서 쿠바 경제 역시 막심한 타격을 입어야 했다. 오랜 골칫거리였던 쿠바를 고사시키기 위한 미국의 경제제재에 대항해서 쿠바 사람들은 “레솔베르”라 불리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국가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생존에는 성공했지만,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약속한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그들의 혁명공약이 지켜졌는가라는 본질적인 국민들의 질문에 답해야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디렉토르(왜 자꾸만 ‘디텍이터(dictator)’가 연상되는 걸까) 정은 자신이 숙소로 정한 마그다 아줌마네 아들인 페페와 그의 유사 여자친구인 다리아나를 등장시켜 오늘날 쿠바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중계해준다. 나도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과거 같은 역사는 그동안 축적된 정보로 파악이 가능하지만, 진행 중인 현재와 미래를 알고 싶다면 당대의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페페가 답답할 정도로 순진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스마트함이 있다면, 다리아나는 세상에 닳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본주의 시스템의 폐해를 잘 알고 있으면서 현재 쿠바에서 벌어지는 젊은이들의 생기 없고, 무얼 해도 할 수 없음을 대변하는 캐릭터라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고급 호텔에서 재떨이와 식기를 챙기는 영악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시설의 물건들을 공공재라고 생각하는 쿠바사람들 특유의 변명이라고 한다면 너무 구차하려나.
어쨌든 혁명의 대의를 지키기 경제적 궁핍 혹은 다른 표현을 쓰자면 결핍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거인에 맞선 쿠바 사람들의 결기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래도 최소한 굶어 죽지 않고(물론 상대적인 판단일 것이다), 국가가 교육과 의료를 책임진다는 작가의 전언은 깊이 새겨볼 만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각자도생해서 살아남아 한다는 천박한 신자유주의 사고가 만연한 곳과 비교한다면,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고 살아가는 그네들의 모습이 정말 천국보다 낯설게 다가왔다.
경제학과 정책학 전공자답게, 디렉토르 정은 오늘날의 쿠바를 다방면의 앵글을 통해 잡아낸다. 어떤 한 면만으로 그 나라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작가는 잘 알고 있다. 오늘날 쿠바를 이루게 만든 혁명, 더 앞서서는 바티스타 정권의 파렴치한 독재, 스페인 제국주의의 침탈 등의 역사를 양념으로 해서 이제 곧 우리에게도 개방될 사회주의 쿠바의 곳곳을 종횡무진 누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디렉토르 정은 자신의 기념비적인 쿠바원정기를 국내 유수의 보수일간지를 통해 연재했다고 한다. 아마 그 신문의 특성상, 작가의 뼈있는 혼잣말 같은 이야기들은 모조리 걸러지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마지막으로 쿠바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 미국 출신 대문호 헤밍웨이가 간간히 등장하는 판타지 시퀀스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나도 말레콘 방파제에서 카리브 바닷내음을 음미하며 즐기는 모히또 한 잔의 여유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