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대리인, 메슈바
권무언 지음 / 나무옆의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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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명성교회 세습 건으로 사회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예장합동 교단측 장자라고 할 수 있는 메가처치에서 세습불가 교단 헌법을 만든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행히 총회에서 재심을 진행하기로 했다고 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웠다. 500년 전 루터가 타락한 중세교회에 대한 작심하고 비판을 시작한 이래, 작금의 한국 교회처럼 영적으로 타락한 교계가 존재했을까 싶을 정도다. 권무언 작가는 소설 <신의 대리인 메슈바>로 이건 자신들만 모르는 인지부조화의 단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대신 성장일변도와 물신주의로 무장한 한국 교계에 대한 ‘비판 종합선물세트’를 제시한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 주목할 만하다.

 

여느 목회자처럼 메가처치 대성교회의 명수창 목사 역시 개척교회 당시에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보듬은 그런 선한 목자였다. 미국인 목사 스미스의 설교에서 어느날 영감을 얻은 명수창은 기괴한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의 확산에 나선다. 메가처치의 첫 단계인 대성전 건축이 그 시발이었다. 그의 옆에서 수석 재무장로 김일국이 충실하게 조력을 다했다. 문제는 SO(Special Offering)라는 방식의 어림짐작으로 천억대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말씀의 전파 대신 재물에 눈이 먼 목사와 일단의 장로들은 교인들로부터 갖은 항목의 헌금으로 은퇴 후를 위한 막대한 비자금 조성에 나선 것이다. 문제는 김일국 장로가 섣부른 투자에 나섰다가 원금까지 까먹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교회의 최고권력자 명수창이 이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결국 김일국 장로를 ‘횡령’이라는 죄목으로 옭아매고 압박한 결과, 그는 “새벽의 아들 메슈바”라는 알쏭달쏭한 메모를 남기고 투신하기에 이른다.

 

사건을 파헤치는 민완기자 역에 우종건을 배치한 작가는 미래의 목사 양성을 담당하는 신학대 교수이자 루터신학의 권위자 이건호를 배치한다. 사회부 기자 우종건이 제보를 바탕으로 김일국 장로사건을 파고 들어오자, 대성교회는 정말 세속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우선 사실을 부인하고, 세속법에 따라 우 기자를 고소 고발한다. 이 때만 해도 늦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투명한 재정시스템 대신 담임목사의 명예실추만은 막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교회 재판계 불패를 기록 중인 전담 법무법인 로직스를 동원해서 어처구니없는 ‘영적 전쟁’에 나선다.

 

숨 가쁘게 진행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회장에서 집중되는 교회 내의 권력의 비정상적인 행사와 감시의 부재가 결국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파국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건호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건강한 교회로 거듭나는 대신, 성장 지상주의에 매몰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검약 대신 물신 맘몬을 추구하는 영악하고 교묘하게 설계된 설교를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후과가 작금의 사태의 단초가 되었던 게 아닐까. 물론 자신의 열정과 노고를 바친 교회가 성장한 뒤에 미련 없이 새로운 사역을 위해 떠나는 정직한 목사들도 있지만, 극히 일부일 따름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몸피를 키워 건강한 영혼의 추수보다 재물의 추수에만 급급한 다수 목사와 그들의 공동 정범들이 한국 기독계를 대표하는 선수들이라는 사실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새벽의 아들이자 메슈바로 등장하는 명수창이 처음부터 그런 악당이었던 것은 아니다. 시골마을 출신의 변변치 않은 학력과 배경을 가진 그에게도 한 때는 모세와 요셉의 시간이 있지 않았던가. 개척교회를 하던 초기 시절만 해도, 그야말로 영성 넘치던 훌륭한 사역자로 칭송받던 그는 교회가 성장해 가면서 점점 더 루시퍼의 유혹에 빠져 들었고, 어느 순간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게 되자 폭주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바로 그 지점을 한국 기독교의 원죄에 대입한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라는 씻을 수 없는 원죄를 청산하지 못한 후과가 지금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주장이다. 당시 교계 지도자였던 김현호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공허한 주장을 거듭한다. 물론, 신사참배는 기독교의 제1계명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절대 굴하지 않고 옥살이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이건호 교수의 부친 이원준 목사 같은 이도 있었다. 물론 소수였기 때문에, 다수의 목소리에 묻혀 버렸지만 말이다.

 

교인들이 갹출한 헌금에서 명분 없는 비자금을 조성하고,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부자세습을 시도하는 메가처치 지도자들에게서 기독교 정신이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대성전 건축을 통한 몸피 불리기가 신의 축복이라는 주장 앞에서는 정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나마 명수창의 세습에 끝까지 반대하는 박세운 목사와 파면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이건호 교수 같은 이들의 모습에서 중세 엄혹한 시절에 교황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비텐베르크의 수도사 루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룡이 왜 멸종되었느냐고 묻는 손자 득세의 질문에 대답하는 새벽의 아들 메슈바의 대답에 어쩌면 역설의 진리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잘 알고 있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려 돌아갈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라 무조건 직진만 할 수밖에 없게 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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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10-02 08:13   좋아요 0 | URL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모습
으로 사람들에게 따르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교인감소에 대한 원인을 모르니 앞으
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될 거라고 생
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