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을 보내고 난 금요일 오전.  거의 2주만에 BN에 왔다.  다른 곳들과는 달리 사람들로 북적이지는 않지만 명색이 블프라서 그랬는지 새벽부터 열고 있었다고 한다. 마침 쿠폰이 있어 큼직한 펌킨스파이스라테를 하나 뽑아들고 앉았더니 노트북 배터리가 간당간당하다.  플러그인할 자리가 지금 막 하나가 나왔는데 (카페에 있는 두 자리 중 하나) 자리를 옮기려니 갑자기 급작스럽게 게으른 맘이 들어 그냥 약 30분간의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나이가 들수록 게을러지고 의욕도 떨어진다더니 혹시 내가 그런 꼴은 아닌지...


플롯은 간단했다. 겨우 전미변협인증을 받은 로스쿨 졸업을 앞두고, 취직도 시험패스도 가능성이 없는, 하지만 입학 당시의 화려한 선전에 속아서 엄청난 빚을 감수하고 학교에 들어온, 거의 아무나 입학시켜주는 로스쿨 (for-profit-law school이라고 부른다는 걸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된) 3년차인 주인공과 각자의 사정으로 비슷한 처지에서 졸업과 함께 갚을 가능성이 거의 제로라고 봐야하는 학자금융자, 역시 가능성이 제로인 취업과 시험패스 때문에 합심한 3인의 사기극.  변호사인척하면서 법원에서 그때그때 고객을 찾는데 일단 시작부분만을 보면 그리샴소설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업계의 말단에 위치한 이른바 ambulance chaser들 중에서도 최하층의 그것도 가짜 변호사들이 전면에 내세워진 최악의 주인공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무덤에 각자의 사연들이 있듯이 이들이 그런 deep hole에 빠진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만의 탓이라고 볼 수 없는 배경이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한 잡지가 파헤친 for-profit-law school이란 이름의 사기극(?)이었다고 한다.  즉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그저그런 로스쿨을 펀드재단이 인수를 하고, 적극적인 광고로 학생을 유치하고, 그 과정에서 자격미달인, 즉 변호사시험을 패스할 가능성도 낮고 변호사로 취직할 가능성이 낮은 수준의 학업성취를 보인 지원자들을 마구잡이로 뽑고, 사기에 가까운 장미빛미래를 제시하는 타깃광고로 마치 로스쿨을 졸업하면 금방 고연봉직장을 잡고 쉽게 학비융자를 갚을 수 있을것이란 환상을 주어 연 6만불이 넘는 빚을 기꺼이 지게 만든 것.  교수연봉과 운영자금을 빼면 대충의 산수로도 한국돈으로 연간 2-3백억원이 넘는 이익이 고스란히 펀드로 돌아살 수 있는 공식이 나오는 것이다.  문제는 이 학생들은 학업성취도도 낮고, 원래 변호사 내지는 로스쿨 교육이 적성이 맞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  이렇게 마구잡이로 양산된 채무자들은 결국 정부가, 그러니까 국민의 세금으로 떠안게 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로비로 쉽게 빚을 주는 법을 만들고, 벌어들인 이익은 다시 세금도피처로 나갔을 가능성도 있다는 가설이 소설의 큰 줄기가 된 것.  


책을 읽는 내내 로스쿨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다음엔 살아남고 졸업만 하면, 그리고 시험만 패스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나온 학교는 지역구 수준의 학교였고 그럭저럭 순위권을 유지하던 학교였지만, 저 멀리 150-200대 혹은 그 바깥의 학교들의 사정은 저런 for-profit law school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럴듯한 화보와 성공을 보장할 것만 같은 사진과 문구로 많은 이들에게 상위커리어의 환상을 심어준 댓가로 3-4년 간의 뼈를 깎는 공부와 엄청난 빚을 남기고 상상도 못할 거대한 이익을 남긴 이들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벌써 서브프라임사태에 버금가는 금융대란의 다음 발생구간이 학자금융자라는 이야기도 종종 나오고, 힐러리가 대선공약으로 학자금융자탕감을 내세웠을 만큼 현존하는 미국의 뜨거운 감자.  


결론적으로 해피엔딩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가 되는 어느 정도의 재미를 준 소설이지만 플롯의 원천이 된 기사를 읽으면서, 책을 보면서 참 많은 일들이 다시 떠오르더라.  어찌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그리고 위로 가면 끝도 없는 것이 업계의 현실이지만, 내가 헤쳐온 길에도 아마 시산혈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난 희생자의 무덤이 있을 듯.  한편으로는 돈을 버는 인간들은 참 별짓을 다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


미국의 영원한 떠돌이 잭 리처의 신작. 중부 어딘가를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전당포의 창문을 통해 본 웨스트포인트의 졸업반지. 그 반지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왜 그 어렵게 받은 반지를 포기할 만큼 영락해버렸는지 꼬리를 잇는 의문에 달리 바쁜 일도 없는 잭 리처는 버스를 보내고 전당포로 들어간다.  계속 단서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때로는 적당한 폭력을, 때로는 아직 남아있는 육군성의 끈을 통해 clue와 사람을 찾는다. 요즘 Lee Child도 거의 John Grisham만큼이나 소설을 찍어내는데, 신기한게 나오면 또 한번 사서 보게된다는 것.  이런 삶이 궁금하지는 않지만, 매일의 일에 저당잡히지 않고 딱 필요한 만큼만 갖고 사방을 돌면서 보고 싶은 걸 보고, 가고 싶은 곳을 가보는 나날도 은근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은 잭 리처를 볼 때 늘 하게 된다.  늘 버스만 타고 여행하는 정도, 자신을 보호할 수준의 실력, 머리, 근데 그런 사람은 이렇게 돌아다니지 않을 것 같지만.


책속의 책, 이야기속의 이야기 같은 모티브. 꽤 익숙한 모티브인데, 일본의 기담으로 채색한 보통의 그림이랄까. 그림도 특이하고 다루는 이야기도 특이하지만, 전국 방방곡곡 모든 것들에 신이 깃들었다는 믿음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산업화가 된 국가라는, 일본 특유의 관념이 이런 책을 특이하게 만든다.  희한하게 서구종교가 모든 것을 정복한 한국과는 많이 대조가 되는데, 또 웃긴 건 일본의 탈아입구적 망상이 한국보다 훨씬 높다는 점.  이래저래 특이한 이야기.  나중에 이런 책이 많이 모이면 하루 종일 비가 오는 음습하고 우울한 날, 어두컴컴한 집에 틀어박혀 시간을 죽이기엔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토 준지도 꺼내놓고, TV엔 Supernatural 같은 걸 계속 돌리면서 말이다.


어쩌다 보니 계속해서 일본의 기담스럽고 괴기스러운 이야기 모음집을 집어들게 됐다.  미미여사가 추리극도 잘 쓰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표제작인 '혈안'은 사람이 만든 괴물이다. 물질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여, 아마도 만들어진 당시에는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이들의 quick fix로 재물을 불러들이는 괴물을 만들었고, 이것이 주인을 바꿔가면서 기생하다가 그 주인이 죽으면 다른 이에게 옮겨간다고 한다. 그 힘의 근원은 결국 끝없는 기아와 고통, 즉 한이라고 하겠는데, 한국의 전통에도 이런 끔찍한 주술품에 대한 얘기가 있다. 갓난아기를 굶기다가 젖을 주면서 이를 향해 내미는 손가락을 잘라 만든 물건이라고 하는데, 아기의 한으로 그 주술효과를 발휘한다고 한다.  끔찍한지고.  자세히 보면 무서운 건 표지그림.  다른 이야기들도 꽤 쓸만.


'낭만픽션'의 신간. '박람강기'프로젝트의 작품만큼 빨리 나오지 않는 것은 큰 불만이지만, 이야기는 흔히 접하기 어려운 것들을 잘 찾아오기 때문에 참고 기다릴 수 밖에 없다.  평화롭던 막부시절을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쇼군-영주, 영주와 영주들, 그리고 층층히 가신들, 각 영주의 가신들간의 협력과 암투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소설이다.  평화라는 테제를 두고 칼을 뺸 모든 것이 동원되어 쇼군의 통치를, 영주간의 관계 등등을 각자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싸웠던 것이다.  단적인 예로 이 소설의 문제가 되는 각종 치수공사나 프로젝트가 있는데, 쇼군은 이를 영주에게 부여함으로써 영주의 힘과 재물을 빼앗고, 영주들간의 반목과 경계/경쟁을 통해 쇼군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 했고, 영주들은 이를 피하고, 또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기회로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에 무사계층은 아니지만 후대로 갈수록 그 힘이 세진 상인계층의 세력확대와 안전도모도 또 하나의 변수가 되었고, 하급무사계층은 그 안에서 자기 고향을 위해서, 주군을 위해서, 때로는 자신을 위해서 뛰었을 것인데, 그런 있음직한 모습을 약간의 낭만을 담아서 보여준다.  아주 흥미진진하게, 누가 누구를 돕고, 누가 누구의 등을 칠지 알 수 없는 시절의 이야기.  


이것도 엄청 밀린 끝의 마구정리인데, 연휴를 지내고 나니 네 권의 정리가 더 밀려버렸다. 방침을 바꾸거나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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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11-29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 그리샴과 잭 리처의 신간(?)을 보니 반갑네요. 저 책들은 언제 번역되어 나올지...

항상 치열하고 열심히 사시는 와중에 이런 책 페이퍼를 올려주시는 트랜스 님이 아주 대단해 보입니다요.

지금도 부지런하신데, 더 부지런해야 한다니....저는 뭐 망할 수준이군요..ㅜㅜ

transient-guest 2017-11-30 02:55   좋아요 0 | URL
곧 나오지 않을까요? 두 작가은 한국에서도 꽤 인기가 있는 걸로 압니다. 2017년은 정말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네요.. 2018년부터는 더 좋은 환경이었으면 합니다. 사람마다 사는 모습도 다르고 환경이 다르니까 그런 건 별로.ㅎ 오랫만에 반갑습니다. 종종 글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