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서 운동을 나가지 못한 건 이제 엘러지라도 핑계삼기로 했다. 눈이 떠지는데 몸이 무거운 증상이 이어지는데, 어젯밤에는 아무리봐도 아주 약간이지만 우울증을 느낀 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새로운 하루라도 힘차게 일어나서 사무실로 나갔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에 메일문의에 대한 답변만 끼적이다가 문득 아주 basic으로 돌아가 시작하는 마음으로 아주 조금의 일이라도 하자고 맘을 먹고 미뤄둔 까다로운 케이스의 자료를 정리했다.  일부러 부담을 덜기 위해 하다 말 생각으로 시작했더니 오히려 기초적인 분류를 끝내고 대략 다음에 진행할 작업의 얼개를 그릴 수 있었다. 워낙 어려운 케이스이고 고객의 자격도 부족하고 자료수집도 어렵게 진행하는 사람의 케이스는 늘 일이 버거운데 그냥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로 했다. 가능하면 정확한 판단으로 informed decision을 돕고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좋은 결과를 위한 노력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변호사의 모습인데, 특히 과정에서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덕목이다.  일을 잘 하고도, 결과를 제대로 내고도 욕을 먹는 변호사들이 꽤 많은데, '과정'이 불성실했고 불편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회사도 케이스도 무엇도 dies and lives with me 같은 상황이라서 아플 틈도 없는 것이 내 삶이다만, 죽지 않으려면 살아가야 하니 몸과 마음이라도 편하게 가져갈 일이다.  


어쨌든 일은 그리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었고 급한 일도 없었고, 무엇보다 내 자신의 spirit을 추스리는 것이 필요했기에 점심에 맞춰 무조건 gym으로 달려왔다.  그간 팔꿈치와 무릎의 가벼운 부상으로 운동이 늘 불편했는데, 이 역시 욕심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하나씩, 크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chest와 triceps를 하면서 abs/core/back까지 마쳤다. 여기에 소요된 시간은 약 한 시간 사십 분.  이후 다시 사십 분동안 spin을 달리고, '미우새'에서 김종국이 계단오르기운동을 하는 걸 기억하고 계단기계에 올라 5분을 해봤는데, 대충 30층 정도를 올라갔다고 나왔다, 물론 수치상으로.  이후 다시 7분 정도 등받이가 붙은 ergo cycle에서 숨을 가다듬는 것으로 운동을 마쳤다.  샤워를 하고 단백질을 보충하고 시간이 좀 애매해서 서점에 나와서 오후에 온 메일들에 답을 하고 업무를 마치기로 했다.  지난 주에 도착한 책들 중 '북유럽 신화, 재밌고도 멋진 이야기 (원제: Norse Mythology)'를 들고 나왔다.  어제 오후에 퇴근하기 전에 잠깐 펼쳤는데, 아무래도 너무 유명해서 다소 식상할 때가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보다는 훨씬 더 신선하다.  얼마 전에 보았던 'Last Kingdom'시리즈에서 훌륭하게 묘사된 북유럽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그대로 신계에 반영된 듯한 모습에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혀진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아는 북유럽 신화의 대개는 '에다'를 원전으로 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비슷하다. 해서, 언젠가는 차라리 '에다'의 영역본을 구해서 읽을 생각을 하고 있다. 대학 때 교재였던 'Njal's Saga'를 비롯해 이쪽에도 재미있는 모험담이 꽤 많이 살아있다. 엄밀히 말해서 제목만 알고 사 읽었던 '니벨룽겐의 노래'도 기실 이쪽 계통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니 내가 게르만 신화에 관심을 가진지는 꽤 오래된 것 같다.  중2때 읽은 토마스 불핀치의 책과 '니벨룽겐의 노래'가 그 시작이었으니 말이다.


팟캐스트 '이용의 필스교양'에서 물뚱심송 박성호님을 추모방송으로 '물뚝it클래식'이 올라왔길래 들었다.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녹음한 것이 어쩌다 보니 유고방송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살아생전 그 deep하고 푸근한 목소리와 해석이 참 좋았는데, 이젠 분명히 꺾어진 나이에 들어선 탓인지 만감이 교차한다.  죽음이 그리 멀지는 않은 곳에, 아니 어쩌면 조금씩 더 가까운 곳에 머물면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우울하다.  통계상 내 가까운 이들 중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윗 세대의 어른들, 형들, 이런 식으로, 친구들, 나까지.  내가 아는 사람이 간 것도 아닌데 상당히 그 죽음이라는 것이 박성호님의 때이른 passing으로 인해 갑자기 실체화되는 것 같다.  


남은 하루는 책을 보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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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8-05-17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종국 계단 오르는 것 보고 자극 많이 받았어요. 러닝 격렬하게 뛰다 갑자기 허벅지가 아파 놀라 내려오긴 했지만요. ㅡㅡ 박성호님은 잘 모르지만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얘기 듣고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벌써 사십대는 꺾어지는 나이인 건가요... 죽음과 그리 멀지 않다는 대목에 수긍이 가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transient-guest 2018-05-17 13:14   좋아요 0 | URL
ㅎㅎ 조심하셔야죠 ㅎ 저도 지지난주에 머신에서 언덕으로 하고 막 달리고서 무릎 인대 늘어나서 잠깐 고생했어요 박성호님은 너무 일찍 가셨어요 그냥 갑자기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