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후통의 중국사 - 조선의 독립운동가부터 중국의 혁명가까지
이창구 지음 / 생각의길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대한 고도 중심부에 실핏줄처럼 뻗은 3,000여 개의 후통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잠자고 있을까? (p6)

 

베이징의 전통 뒷골목인 후통멀게는 원나라 건국 시기인 800년 전부터, 가깝게는 청나라 건국 이후인 400년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거리다(p6). 베이징 흐통의 중국사를 집필한 이창구 기자는 약 2년여 동안 베이징 후통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한다. 이 책을 통해 무심코 지나쳤을 독립 운동가들의 고단했지만 불꽃같은 삶을 떠올리며 내일을 꿈꿨던 선조들의 열망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천년고도 베이징을 둘러싼 권력 암투극은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을 실감하게 한다.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없고, 영원불멸이란 달콤함에 빠진 패착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후통에 즐비한 고택의 기구한 역사가 말해준다. 이 책과 함께 베이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엿볼 수 있는 후통에 깃든 이야기에 심취해보길 바란다.

 

후통 한복판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서 있으면 베이징 독립운동가들을 넓은 가슴으로 품었던 우당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p51).

 

한국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던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가 터를 잡았던 난뤄구샹의 한 후통인 허우구러우위안은 독립투사들의 안식처였다. 600억 원으로 추산하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 여겼던 우당의 재산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닥을 보였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지만, 베이징에 거주하던 60개월 동안에는 여섯 번이나 거처를 옮겨야 했다(p52). 일평생 가난을 몰랐던 우당 일가의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고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마오얼 후통 29의 허름함은 독립을 위해 투신한 우당 선생의 굳은 투지를 엿볼 수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신접살림을 차렸던 진스팡제 21에서 독립운동가 부부는 어떤 꿈을 꿨을까? 비좁고 허름한 보금자리지만 조국 독립이란 사명을 안고 하루의 고단함을 이겨냈을 것이다. 차오더우 후통으로 이사한 부부는 그곳에서 큰 아들을 낳았지만 극심한 생활고로 부인 박자혜 여사는 귀국한다. 와이자오부제에는 약산 김원봉 선생의 의열단 본부가 자리했었다. 단재 선생은 역사에 길이 남을 독립투쟁서 의열단 선언을 직접 작성했는데 이 선언문은 의열단 거사 현장에 늘 살포됐다(p39). 이처럼 베이징 후통은 독립의 열망을 품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발자취가 남겨진 곳이다. 비록 베이징에서의 일상은 지독한 가난과의 싸움이었지만 그들의 곧은 심지까지 꺾지는 못했으리라.

 

중국 정부는 공산당 혁명에 기여한 인물의 옛집은 애지중지하며 보존하지만, 공산당에 반대했거나 공산당원이 아니었던 유명 인사들의 옛집은 방치하거나 헐어 버렸다(p168).

 

권력의 비정함일까,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권력자들의 최후는 결국 승자에게만 그 영광이 돌아간다. 허우위안어쓰 후통에 자리한 두 고택은 주인의 엇갈린 운명이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중화민국 총독 장제스의 저택은 국공대전의 패배 후 그 주인을 잃어 대사관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상업호텔로 전락했다. 장제스의 맞은편에 살았던 공산주의 혁명가 마우둔의 저택은 여전히 그 위세가 건재하다. 혁명 문학을 꾸준히 집필했던 그의 고저에는 사후에도 작품과 유품이 잘 보존되어 있다.

 

중국의 근대화 개혁 운동인 유신변법을 주창한 청대 말기 개화파 지식인 캉유웨이(p213)의 저택은 미스 후통에 위치해있다. 왕정을 포기하고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던 유신변법의 선구자 캉유웨이는 서태후와의 권력싸움에서 끝내 패배한 광서제의 운명과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미스 후통 43호의 모습이 끝끝내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주인의 운명과 닮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신변법 100일 천하를 끝으로 처형된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그 창시자인 캉유웨이는 천수를 누렸으니 카멜레온처럼 제 색을 바꾸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후한 평가를 받지 못하나보다.

 

수백 년의 세월이 수천 개의 골목으로 이어진 베이징 후통, 사람 사는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이곳에서 역사가 조명하지 않은 또 다른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베이징의 원대한 서사가 담긴 베이징 후통의 중국사를 길잡이삼아 골목 골목에 깃든 사람들의 꿈을 엿보길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천적 수포자를 위한 수학 선천적 수포자를 위한 수학
니시나리 카츠히로 지음, 이진경 옮김 / 일센치페이퍼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과형 사람들이 수학을 멀리하기 위한 핑계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수학을 배워서 어디다 써먹어?”입니다.

 

이과는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라 믿는 전형적인 문과형 사람인 내게 수학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학과 과목에 국어와 영어, 사화만 배우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과 달리 왜 배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라나는 꿈나무들은 수학을 배워야하고, 나는 그들을 가르치는 멘토링을 한다. 선생님이라면 당연히 중학교 수학 문제는 풀 수 있을 거라 믿는 아이들의 사악함에 매일같이 기가 죽은 내게 중학 수학을 6일 만에 정복할 수 있는 니시나리 가쓰히로의선천적 수포자를 위한 수학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중학 교과 과정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는 책 인줄 알았는데, 실상은 우리 삶 속에서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중학 수학 과정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듯하지만 아예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달 까. 1일차에는 왜 수학을 배우는가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는데 수포자에게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더 넓고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간편한 세상에, AI의 발달이 비약적인 기술을 보여주는 세상에, 더욱더 배움과 사고를 게을리하지 말고 뇌에 부하를 걸어야 한다니(p43), 이것이 꼭 수학을 통해서 이뤄져야 하는 건가 수학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때문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내 목표는 왜 우리가 수학을 배워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보다는 중학 수학의 개념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2일차로 넘어갔다.

 

이차방석이이야말로 중학교 수학의 정점이자 끝판왕(p54)

 

책 초반에는 대수에 관한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룬다. 중학수학의 끝판왕인 이차방정식을 설명하기 위해선 일차방정식, 제곱근, 음수와 같은 개념들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만 책을 읽다보면 수학이 논리적인 학문이라 말하는 것에 비해 소위 약속이라 정의하는 것이 너무 많아보였다.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전 세계에 수많은 수포자를 양성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건 바로 이유도 모른 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수학적 약속이 아닐까 싶었다. 어느 부분은 논리로 풀어야하고, 어느 부분은 약속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린 나이에 그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묶을 수 있는 덩어리로 식을 간편하게 만들고, 최종 값은 반칙인 계산기를 사용해도 좋다는, ? 무슨 수학자가 이래 싶은 발언은 수학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게 했다. 공통항을 뽑아내는 인수분해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로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실력이라 그간 왜에 대한 물음이 결여됐었는데, 인수분해의 존재 의의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6일의 절반을 온전히 대수를 이해하는데 할애했다. 대수가 튼튼한 토대가 되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4일차에는 소위 함포자라는 용어도 만들만큼 수험생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함수가 시작됐다. 지금까지 방정식과 함수의 개념이 명확히 들어있지 않았는데 방정식은 대수, 함수는 해석에 속하기에(p148)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는 선생님의 설명은 지금껏 둘을 혼동해왔던 나를 부끄럽게 했다. , 방정식은 특정 조건으로 x를 푸는 것이며, 함수는 관계성 자체를 나타내지만 조건이 정해지면 방정식이 된다는(p149) 개념의 차이를 명확히 숙지했다. 뒤이어 삼각형과 원을 이해하는데 가장 직관적인 피타고라스를 통해 도형편이 이어졌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하는 데만 해도 조합, 닮음, 원의 성질등 다양한 수학적 성질을 살펴볼 수 있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미적분까지 훑어보니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6일간의 중학 수학 정복 프로젝트는 실상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심화문제를 다루지 않고 수학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춘 책이지만 개념 없이 심화 문제를 암기로만 푼다면 결국 모래성을 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수학적 문제풀이보다는 이 개념이 왜 이렇게 되는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차근차근 알려주는 책이다. 그렇지만 나는 산에 올라 거리를 재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뼛속까지 문과형 인간임을 다시 한번 인증 받았다. 훌륭하신 수학자분들이 이미 훌륭한 문명을 많이 남기셨으니, 저는 온전히 누리겠습니다. 다만 수학이 두려운 미래의 꿈나무들은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 책에 있는 내용을 숙지해야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수학의 길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 하늘과 도망치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악하고 절망하는 가운데 자신과 지카라는 내일부터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p119).

 

10, 고작 초등학교 5학년인 지카라의 평온한 일상이 깨지는 건 단 한순간이었다. 아버지의 교통사고, 이건 누가 봐도 명명백백하게 지카라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동승했던 여배우와 불륜이란 꼬리표가 붙었고 그녀의 자살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매일같이 기자들이 찾아오고, 여배우의 극성팬과 소속사는 자카라와 그의 어머니 사나에를 쫓아다니며 협박해 두 모자는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지경이 된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소설 파란 하늘과 도망치다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두 모자의 가슴 아프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든 사건의 원흉인 지카라의 아버지가 잠적해 지카라와 사나에가 총알받이가 된 거지만 아직도 그 둘에게 가해진 싸늘한 시선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로 보는 게 맞지 않나, 의아했다. 아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잘못이 없음을. 그렇지만 누군가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고 가장 힘없는 이들이 표적이 됐을 뿐이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두 모자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기위해 노력한다. 그들의 삶을 옥죄는 도쿄를 떠나 기나긴 여름을 맞이한다. 내일을 살아야하니까.

 

젊었을 때 용서되던 일도 나이를 먹은 지금은 용서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실수하거나 세상 물정에 어둡다며 질책을 받을까 봐 두려웠다(p169).

 

젊었을 적 극단 배우로 활동했지만 이젠 평범한 가정주부로 특별할 것 없는 잔잔한 일상을 살았던 사나에는 급작스럽게 세상 밖으로 떠밀려 나온다. 혼자라면 두려움에 떨었겠지만 어린 아들을 지켜야하는 어머니로서, 매 순간 고뇌한다.

 

사건이 보도된 이후, 시만토에 잠시 머무르지 않겠냐며 권하는 친구의 호의를 염치없는걸 알면서도 받아들인다.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라는 순진한 마음이었지만 그들을 추적하는 시선은 끈질겼다. 결국 도망치듯 시만토로 떠나 인적이 드문 섬 이에시마로 향하지만 드나드는 사람이 적은 한적한 바닷가마을에 외지인은 너무 눈에 띄었다. 벳푸에서 모래덮기꾼으로 일자리까지 얻어 정착하길 바랐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았고, 무엇을 기대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심정으로 센다이로 향한다.

 

이들의 행선지는 특별히 생각하고 정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어쩌다보니 일본 전역을 순례했달까. 그렇지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호의를 받으며 적응해나간다. 아마 추적자가 없었더라면 이들의 삶은 훨씬 더 평탄했으리라.

 

의도하진 않았지만 지카라는 이번 여름, 훌쩍 성장했다. 어른과 달리 아이의 하루, 일주일, 한 달, 1년은 믿기지 않을 만큼 길다(p113)는 그녀의 생각처럼 수줍음 많던 아이는 점점 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듬직한 아이로 자랐다. 엄마에게 이혼하지 말라며 울던 어린 아이는 엄마의 행복을 바라는 속 깊은 아이가 되었다. 응석만 부려도 모자랄 아이가 엄마를 위해 말을 삼키는 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살아서 도망 다니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이야(p349)”.

 

하루아침에 삶이 풍비박산이 났다. 어디를 가더라도 마음 편하게 살지 못하는 두 모자의 신세가 가엾으면서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리라 꿈 꿀 수 있는 미래가 있기에 조금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재가 지옥처럼 느껴질지라도 과거를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언제, 어떻게라도 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온정 넘치는 곳이다. 두 사람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겨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마음 쓰는 사람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꼭 다시 돌아오라며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기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내일을 그리다보면 세 가족도 도쿄의 안락했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 않을까 기대해본다. 무엇보다 더 이상 지카라가 자라지 않길 바란다.

 

삭막한 일상 속에서 따스함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부디 앞으로의 여정에도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기를(p3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찰은 왜 고래고기를 돌려줬을까 검찰은 왜 고래고기를 돌려줬을까 1
황운하.조성식 지음 / 해요미디어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함께 읽는 도서로 선정된 책입니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나는 수사권독립군의 선봉이었다. 상사나 기득권자의 눈에는 이단아요, 꼴통이었다. 개혁보다 질서를, 분쟁보다 안정을 중시하는 사람들 눈에는 과격한 돈키호테였다(p248).

 

살아있는 사람의 자서전을 읽는 다는 것, 사람은 완벽할 수 없기에 그 진의를 두고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자신도 모르게 저질러온 실수와 앞으로 저지를 실수를 생각한다면 개혁의 아이콘이 낸 자서전은 훗날 그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점이 조금 염려가 되긴 하다. 경찰대 1기 출신으로 검찰 저격수로 잘 알려진 황운하 전 대전지청장의 자서전 검찰은 왜 고래고기를 돌려줬을까35년 공직생활로 헌신한 그의 일대기를 통해 무수한 불이익에도 바로설 수 있었던 가치관과 신념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인생 과제였던 수사권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거대 조직에서 개혁을 부르짖으려면 기득권 세력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원대한 꿈을 품었던 개혁가들은 넘을 수 없는 벽에 좌절하고 현실과 타협하기도 한다. 황운하 청장은 이와는 반대되는 인물이다. 자신이 가는 길이 옳음을 의심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것이 사회 공통의 정의인지는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판단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수사기관 개혁을 관철시키기 위해 보였던 행보만큼은 정의였다고 생각한다. 안정을 추구하는 조적에 가는 곳마다 파란을 일으켰지만 모두가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기득권 세력을 타파하는데 앞장섰다. 대전 유천동 성매매 집결지를 해체하는데 일조하는 것은 그간 경찰과 업주 간 유착관계가 있다 여긴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는데 작은 물결을 일으켰다.

 

고래고기 사건 수사는 거대 권력 검찰에 대한 강력한 견제구였다. 울산시장 측근 관련 수사는 지방 토호세력의 부패를 겨냥한 경종이었다(p245).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고래고기사건은 검찰 조직의 적폐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래고기 불법 유통조직을 적발한 경찰은 바다의 로또라 불릴 만큼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고래고기 27t을 압수했다. 그런데 검찰에서 21t의 고래고기를 돌려준 것이다. 이로 인해 유통업자는 막대한 이익을 보았고, 검찰의 비협조 속에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경찰이 아무리 수사를 열심히 하더라도, 수사권 기소권을 가진 검찰의 응답이 없다면 사건은 덮어진다. 이는 검찰이 권력을 독점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그렇기에 그는 수사구조 개혁을 통해 지금까지 수직적이었던 검경간의 관계를 수평적이고 협력적으로 바꾸자고 주창한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분리되지 않은 한국의 기형적 구조 때문에 검찰 권력은 날이 갈수록 방대해지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건 국민이라 말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검찰조사에서 털어서 먼지하나 나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껏 수사를 해서 넘겼는데 담당 검사가 기소를 하지 않는다면 경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울산 고래고기 사건은 검경간의 알력다툼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훗날 붉어질 울산시장 측근 비리 사건의 불씨로 해석한다.

 

일평생 경찰 조직에 헌신한 황운하 청장의 마지막은 불명예였다. 선거를 앞두고 대대적으로 수사한 김기현 전 울산시장의 측근비리 사건은 현직이었던 그를 낙선시켰고 야당에서는 황 청장을 정치경찰이라며 강력히 비난했다. 이 책에서 그는 청와대의 하명수사는 말이 되지 않는다며 일축한다. 오히려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은 울산시장 관련 사건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처럼 언젠가 검찰 처분이 적절했는지를 가릴 기회가 있길 바란다(p132)고 서술한다.

 

검경이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기능적으로 협력하고 견제하는 것이야말로 수사구조 개혁의 궁극적 목표라 할 것이다(p169).

 

앞서 말했듯 검찰 조직의 권력은 압도적이고 이미 기득권인 그들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권력을 분배해 서로가 견제하며 협력하는 이상적인 구조를 바라는 기득권은 없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경찰의 수사구조 개혁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정권은 없었다. 검찰개혁을 앞세운 현 정권도 조국 사태로 인해 개혁의 발동이 걸렸다. 검찰의 표적수사를 충분히 예상했으면서도 제 입에 혀처럼 구는 인사를 무리하게 단행한 정권의 실착이 과업을 앞둔 개혁을 백지로 만들었다. 아마 황 청장의 바람은 시일 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갈 황 청장의 인생 2막을 응원한다.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검찰의 개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청와대의 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대 나라의 헬리콥터 맘 마순영 씨
김옥숙 지음 / 새움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울대교라는 신앙의 정체는 바로 금력을 가진 자들이 누리는 특권, 힘이었다. 돈이라는 신이었다.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치열한 욕망이 서울대란 무소불위의 신을 만들어냈고 서울대교란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다 (p14).

 

어렸을 때부터 공부는 곧 잘했으나 교육에 무지한 부모님과 어려운 가계로 인해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마순영씨는 공장에 다니면서도 주경야독으로 지방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결국 등록금 때문에 학업을 중도포기하고 꿈을 접어야했다. 초등학교 때는 마순영 씨와 엎치락뒤치락 했던 서울대생 황수희와의 만남은 그녀의 학력 콤플렉스를 극대화한다. 이는 그녀가 서울대에 집착하는 계기가 된다. 마순영 씨는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을 통해 대신 이루고 싶었다. 학벌욕과 명예욕을 고영웅을 통해서 풀고 싶었다. 누가 속물이라고 비웃어도 좋았다. 내가 못 갔으니 내 아들을 나 대신 보내면 되는 거다(p34). 마순영 씨의 아들 고영웅은 그녀의 치맛바람의 희생자다. 수포자인 첫째 딸 빛나의 교육이 요원하자 세 살배기 고영웅을 수학 천재라 믿으며 서울대를 향해 목표를 정조준 했다. 다행히 고영웅은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좋아해 마순영 씨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나날이 영특하게 자라는 아들을 보며 마순영 씨는 고영웅을 서울대에 입학 시키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됐다. 서울대외 다른 길은 없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열렬한 서울대교의 신자다.

 

 

내 아이는 무조건 남들보다 뛰어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앞서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엄마들이 있었다. 마순영 씨와 같은 부류의 엄마들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p165).

 

남편의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오른 마순영 씨는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 낯선 부산에 자리 잡는다. 영웅이는 부산의 부촌 마린시티에 자리한 해성초등학교로 전학갔다. 사실 마순영 씨의 과잉보호 때문인지 영웅이는 학교생활에 썩 적응하지 못했다. 이전 학교에서 있던 트러블을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는 만회하고자 했으나 산만하고 입이 거친 영웅이는 금세 선생님들의 눈 밖에 났다. 그나마 성적이 우수해 잠깐씩 총애를 받았으나 예쁨 받지 못하는 특유의 오만한 성격과 돈이 곧 권력인 환경에서 흙수저 영웅이는 설 자리가 없었다. 생업을 위해 공부방을 운영하게 된 마순영 씨는 서울대를 위해 영웅이를 채찍질했지만 다른 아이와 영웅이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밥벌이를 위해 아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영웅이의 지독한 사춘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명문 해문중학교와 부강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영웅이의 사회성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선생님과의 관계는 항상 최악으로 치달았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영웅이는 수석 입학이라는 명예에도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다. 중학교때 사준 스마트폰은 영웅이가 학업보다는 게임에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영웅이를 서울대에 보내기 위해선 물불 안 가리는 순영 씨의 철저한 관리로 매일매일 살얼음판 같은 나날을 보낸다.

 

엄마가 무슨 죄인이냐고요? 애 공부 못하는 것도 엄마 탓, 입시 전쟁도 엄마 탓, 엄마가 동네북인가요? 정부의 입시정책이 뒤죽박죽인 바람에 엄마들이 안 나설 수가 없는 거잖아요? 수백 수천이나 하는 입시 컨설팅을 엄마들이 받고 싶어서 받겠어요? 교육의 입시정책이 문젠데, 언론이고 뭐고 전부 다 엄마들 욕심이 입시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뒤집어씌우는 것 있죠? 정말 엄마 노릇 사표내고 싶다니까요(p324)”

 

자식이 아픈 것보다 시험이 더 걱정스러운 마순영 씨를 보며 대체 서울대가 뭐기에 저렇게까지 해서 애를 잡나 싶을 때가 있다. 서울대는 마순영 씨의 꿈이지 영웅이의 꿈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식을 서울대에 보내려 애쓰는 엄마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에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었다. 공부를 잘 해야 사람대접 받는 세상에서 내 자식만큼은 무시 받지 않고 크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서울대로 표출된 것뿐이다. 조선시대에도 3대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양반 취급을 받지 못해 한 명의 과거 급제자를 내기 위해 온 집안이 매달렸었다. 못 먹고 못 살던 시절, 공장에서 일한 사람보다 달러 빚을 내서라도 공부를 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더 자리 잡았다. 서울대는 계층 이동의 마지막 사다리다. 이미 기득권은 그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흙수저는 어떻게든 막차에 탑승하기 위해 전 국민이 입시에 매달리는 형국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정녕 엄마들의 잘못만이라도 할 수 있을까? 김옥숙 작가의 서울대 나라의 헬리콥터 맘 마순영 씨를 읽으며 씁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동물을 사랑하고 따스한 마음씨를 가진 영웅이의 진가는, 서울대가 아니라면 가치가 없는 것인가. 공부하기 힘겨워하는 영웅이도, 그런 영웅이를 독촉해야하는 마순영 씨도, 왜 우리 모두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하는지 모두에게 물어보고 싶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냐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