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밀침침신여상 1
전선 지음, 이경민 옮김 / 마시멜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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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얽매이면 한없이 나약해지지. 자유로울 수도 없느니라.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p12).”

 

이 세상의 모든 꽃을 관장하는 화신 재분(p1), 사랑에 처절히 배신당하고 사랑을 불신하게 된 그녀는 죽는 순간 자신의 딸 금멱에게 사랑을 느낄 수 없는 운단을 먹인다. 자신처럼 고통스럽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애틋한 모정은 금멱을 화계의 주인인 화신이 아닌 평범한 정령으로 살게 한다. 자신을 포도의 정령으로 알고 있는 금멱은 수경 안에 갇힌 삶에 신물을 느끼고 호시탐탐 수경을 탈출하려 하지만 요원치 않다.

 

열반을 위해 수행하던 천제의 아들 봉황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의 실종에 천계는 발칵 뒤집히지만 화계의 금멱에게는 남의 일이다. 신선이 되기 위한 영력 증진이 일생의 목표인 금멱은 후원에서 다 익은 길까마귀를 발견하고 까마귀의 내단을 취하려한다. 혼절한 사내와 칼을 든 여인, 범상치 않은 두 남녀의 만남으로 시작된 향밀침침신여상1권은 다소 오만하지만 사려 깊은 욱봉과 천진난만한 금멱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그린다. 금멱은 천제의 아들 욱봉에게 목숨을 살려 준 은혜를 갚으라며 천계에 데려갈 것을 요구해 마침내 수경에서 벗어난다. 선대의 악연으 이어진 두 남녀의 로맨스는 초반에는 다소 무미건조하다. 영력 증진을 이유로 화신 욱봉의 서동으로 100년을 지낸 금멱은 황당한 청혼을 받고는 지금껏 봉했던 본 모습을 보인다.

 

내게 그럴 용기나 있다면 내가 이리 아플까? 너를 태워 죽일 바에는 차라리 나를 태워 죽이는 편이 낫지 (p212)”

 

다소 지지부진하던 금멱과 욱봉의 관계는 금멱이 쇄령잠을 벗으며 급진전한다. 아니, 지금껏 인지하지 못했던 마음을 아름다운 여인이 된 금멱을 보며 욱봉이 깨닫는다.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금멱은 욱봉의 변화를 눈여겨보지 않고 여전히 영력 증진에만 관심이 있다.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하여 상식이 없는 건 아닐 텐데, 홀로 삽질하는 욱봉이 안타까우면서도 새롭게 등장한 욱봉의 형 윤옥의 고독함은 여심을 홀린다.

 

단순히 포도의 정령으로 알려진 금멱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고, 선대의 약속에 의해 금멱과 윤옥은 혼인을 약조하는데.....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지, 조금은 갑갑한채로 1권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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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 이재운 역사소설
이재운 지음 / 시그널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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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중에 꼭 하늘을 연구해볼 테야. 별이 어떻게 움직이며 해와 달은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내고 말 거야. 열심히 공부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다 알아내야지(p57).’

 

얼마 전, 영화 <천문>이 개봉해 조선의 과학기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과학자 장영실을 만났다. 이재운 작가의 역사소설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많은 사료가 전해지지 않은 장영실의 삶을 재조명하여 독자에게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다보면 여백으로 남겨둔 장영실의 삶을 화려하게 그려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을 가장 찬란하게 가정하여 그의 일생을 서술한다. 그러다보니 허구와 실재 간 간극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애당초 기록이 거의 없다보니 상상력을 가미하여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를 고려시대 요직에 앉아있는 관리로, 어머니는 어엿한 그의 후처로 서술한다. 고려가 멸망하고 새 나라 조선이 건국되면서, 정몽주의 측근이었던 장성휘와 그의 일가족의 봉변을 당해 두 모자가 동래의 관노로 왔다는 설정이다. 장영실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추락한 신분은 그의 인생을 가장 극적으로 대변해주기 좋은 수단이다. 사농공상의 질서가 엄격했던 시기, 역적의 자손으로 공부를 해도 과거에 나가지도 못하지만 어린 장영실은 공부를 좋아하는 영특한 아이었다. 그는 특히 손재주가 좋아 관아에 크고 작은 일들을 도맡아 했다. 이런 그를 눈여겨본 동래현령은 제 동문인 공조참판 이천에게 장영실을 천거해 한양에서 큰 꿈을 펼칠 수 있게 돕는다. 하늘을 연구하고 싶었던 어린 영실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하늘과 땅의 신비가 이곳에 다 모여 있구려. 그대는 과연 하늘이 내려준 천재요(p214).”

 

세종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정착한 장영실은 말 그대로 승승장구한다.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아 명나라로 원행을 떠나 새로운 과학 기술을 배워온다. 이후, 물시계와 해시계, 혼천의, 측우기와 같은 천측 도구들과 새로운 인쇄술 갑인자를 도입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가히 조선이 낳은 최고의 과학자라는 칭송이 아깝지 않을 만큼 날마다 새로운 발명을 해낸다. 혼인을 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항상 마음에 걸린 어머니를 면천시켜 모시는 등 대내외적으로 남 부러울 것 없는 일상의 연속이다. 장영실의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기재를 강조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인맥도, 연줄도 마땅치 않았을 그의 삶을 너무 단조롭게 그린 것 같아 아쉽다. 분명 누군가의 시기 질투가 있었을 텐데 그가 겪은 고난은 마지막에 이르러 세종의 가마로 인한 실책이 전부다. 소설의 허구성을 가미할 수 있는 부분에는 힘을 주지 않고 너무 그의 개인사에만 치중해, 자칫 이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것이 소설임을 잊게 할까 조금은 염려된다.

 

양반도 조선 사람, 평민도 조선 사람, 노비도 조선 사람이오. 지금 당장 명을 내려 장영실을 불러오도록 하시오(p97).”

 

책을 읽는 내내 아쉬웠던 건, 지금 우리가 장영실의 출신에 주목하는 것처럼 얼마나 많은 조선의 인재들이 신분의 벽에 부딪혀 제 꿈을 펼치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조금만 생각한다면 신분으로 사람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임을 잘 알 텐데,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잘못된 것에 목소리를 내지 않고 비겁하게 숨은 이들을 어찌 선비라 할 수 있겠는가. 3품 대호군까지 오른 장영실의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사실 기술자인 장영실의 기록이 실록에 남겨지지 않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나 꽤 흥미로웠을 그의 일생이 야사나 종친회에 많은 족적을 남기지 않은 건 두고두고 아쉽다.

 

책 말미에 장영실 연표가 수록되어 있는데 얼마 되지 않는 그의 기록을 총 망라해 한 눈에 볼 수 있다. 무한한 신비로움을 품은 우주처럼 그의 삶도 베일에 싸여있다. 살아있는 인물이되, 신비로운 인물로 후세에 남은 장영실, 하늘과 우주를 사랑했던 그의 일생과 참 닮지 않았나, 불현 듯 생각해본다. 영화 천문을 인상 깊게 봤다면 소설 장영실도 기꺼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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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이르는 병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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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홉 번째 살인.

스물세 살의 여성이 교살당하고, 깊은 산속에 유기된 사건.

그건 내가 저지른 범행이 아니야. 그 여자는 내 타깃과는 달라.

수법도 다르고. 그 한 건만큼은 난 누명을 쓰고 있어 (p36).”

 

한때는 학급 반장에 공부도, 운동도 잘했던 우등생 가케이 마사야.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결국 자퇴를 결심한다. 이후, 대학 수험 자격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 그는 삼류 사립대학생으로 전락한다. 무늬만 법대인 대학 생활은 그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 생활하던 그에게 어느 날 편지 한통이 온다.

 

일본에서 전후 최대 규모의 연쇄살인을 일으킨 자(p28), 하이무라 야마토.

엽기살인범, 연쇄살인귀, 질서형 살인범, 연기성 인격장애자, 귀축 시리얼킬러, 정신이상자, 괴물 등등(p28). 그를 칭하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끔찍하다. 무려 24건의 살인용의자로 체포된 그는 마사야가 살던 동네의 유명 제과점을 운영했었다.

 

그는 마사야에게 9건의 살인 사건은 자신의 짓임을 시인하지만 마지막 살인 사건만큼은 자신의 짓이 아니라며 하지 않은 죄까지 뒤집어쓰는 건 사양하고 싶다고(p37) 호소한다. 이미 사형판결이 내려진 그에게 고작 한 건의 살인이 무죄가 인정되더라도 형량은 변하지 않을 것. 하지만 아직까지 자신을 우등생 마사야 군으로 인식해주는 시선(p39)에 뭐에 홀린 듯 하이무라 야마토의 누명을 벗기 위해 발 벗고 나선다.

 

당신이 본 하이무라는 어떤 아이였습니까? (p112)”

 

하이무라의 과거를 파헤칠수록 기이한 증언들이 나온다. 그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청소년기에 이미 흉악범죄를 저질렀지만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생각만큼 그를 혐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불쌍하다고 동정하는 사람이 있을 지경. 하이무라를 조사하던 마사야도 그의 참혹했던 과거에 그 사람 정도의 가혹한 성장환경에 처하지 않았던 자들. 굶주림도 없고, 얻어맞지도 않고, 쑥쑥 편하게 자라온 우리가 그 사람을 단죄할 자격이 있을까(p171) 의문을 가진다. 누군가에게는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을 연쇄 살인마가 세인들의 동정을 받다니,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라는(p93)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하이무라에게 호의적이다.

 

아홉 번째 피해자 네즈 가오루와 하이무라의 연관성을 조사할수록 그가 누명을 썼다 확신 한다.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무서워했다(p192)는 동료의 증언에 그녀에게 스토커가 있었을 거라 짐작하고는 스토커를 찾기 위해 다시 조사에 나선다. 하이무라의 사건을 조사하면서 마사야는 의기소침하던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해간다. 사람들은 그의 변화를 반기지만 단 한 사람, 마사야의 동창인 아카리는 마사야에게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낀다.

 

인간은 모두 그런 법이야. 현재 상황에 완전히 만족하는 일은 없어. 언제나 여기 아닌 어딘가를 바라지. 우리에게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야(p351)”

 

하이무라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수록 마사야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이 사건을 조사하며 타고난 나 자신은 아니라고 해도, 노력해서 얻은 그 무렵의 이상적인 나(p134) 찾아가는 듯 한 느낌에 그는 점점 하이무라에 동요되고, 지금껏 알지 못했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다. 하이무라가 마사야를 선택한 건, 단순히 법대생이여서가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걸 깨닫고 혼란스러워한다.

 

구시키 리우의 사형에 이르는 병은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학대에 노출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어떻게 자랐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불우한 환경에 의한 물리적, 정서적 학대만이 폭력의 전부인가, 평범한 가정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결핍은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가. 삼류 사립대생으로 내내 열등감에 시달린 마사야를 보며 바람직한 사회에 대해 고민해본다. 분명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 지는데 왜 이 사람들은 점점 더 병들어 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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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펭귄클래식 156
제인 오스틴 지음, 류경희 옮김, 피오나 스태퍼드 해설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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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고 똑똑하고 부유한 데다 안락한 가정에 명랑한 기질까지 갖춘 에마 우드하우스는 삶에 필요한 최상의 축복을 한 몸에 타고난 사람 같았다(p9).

 

제인 오스틴의 에마첫 구절을 보자면 에마 우드하우스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이 나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리 좋아하지 않을 여주인공이라 말할 만큼 오만하고 독선적이다. 아버지를 보필하기 위해 비혼을 선언한 그녀는 결혼을 중매하는 일을 낙으로 삼는다. 자신은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타인의 결혼을 주선하는 걸 가장 즐거운 일이라 말하다니, 귀여운 아가씨의 모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에마 우드하우스에게는 마땅히 친구라 부를만한 사람이 거의 없는데 애당초 또래가 많은 지역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동갑인 제인 페어팩스의 과묵함은 에마에게 불편함을 준다. 16년간 에마의 가정교사로 함께한 테일러 선생님이 랜들스에 사는 지역 유지 웨스턴씨와 결혼하면서 집을 떠나 혼자가 된다. 그런 에마에게 예쁘고 귀여운 데다 자신을 숭배하는 해리엇 스미스가 마음에 드는 건 필연적일테다. 해리엇 스미스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사생아로 출생이 불분명하고 영특하진 않지만 사랑스러운 아가씨로 에마는 그녀에게 좋은 짝을 맺어주고자 한다. 이들의 관계는 그리 평등하지 않는데 에마는 해리엇이 자신으로 인해 우아해진다 믿고는 그녀를 더 괜찮은 숙녀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교구 목사 엘턴과 해리엇을 엮으려는 에마의 속마음은 참 이중적이다. 엘턴과 해리엇의 격차는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 믿으면서 자신을 넘보는 엘턴의 마음은 망상으로 일축하다니. 엘턴을 거절하며 재능으로나 온갖 고귀한 정신적 자질로 보나 그가 그녀보다 얼마나 열등한 존재인지 깨닫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일 자체가 합당하지 못한지도 몰랐다(p189)는 그녀의 속마음은 자신은 사람을 신분으로 나누며 그에 마땅한 대우를 해도 되지만 남은 안 된다는 지독히 계급중심적인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정말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친해지고 싶지 않은 아가씨다.

 

틀림없이 그 시기에는 나이틀리 씨 판단력이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나겠네요. 하지만 이제 스물 한 해가 지났으니 우리 두 사람의 분별력이 훨씬 더 비슷해지지 않았을까요?(p140)”

 

돈웰 애비 영지의 주인, 존 나이틀리씨는 에마의 언니 이자벨라의 남편의 형으로 우드하우스 가문과 오랜 교분을 맺고 있다. 에마의 보금자리 하트필드에 자주 드나드는 그는 에마 우드하우스의 흠을 잡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그 흠을 그녀에게 대놓고 지적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p17). 그는 엘턴 목사와 해리엇을 이어주려는 에마의 노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꿰뚫어보고는 그만두라 조언을 하지만 이 앙증맞은 아가씨는 그녀가 어렸을 때는 몰라도 지금은 이전보다 서로의 분별력이 훨씬 더 비슷해졌을 거라 항변한다. 에마의 가정교사였던 테일러 선생님의 의붓아들 프랭크 처칠이 아버지의 결혼식에 불참한 것도 모자라 편지만 보낼 뿐 랜들스를 방문하지 않는 것에도 강한 의견 차이를 보였지만 에마는 그에게 있어 자신이 언제나 첫 번째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존 나이틀리씨는 굉장히 사려 깊은 남자로 남자가 마땅히 갖춰야 할 누구에게나 인정 많게 대해 주되 누구에게나 친하게 대하지는 않는(p440) 신사 그 자체다. 그는 평소에는 소박하게 생활하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따스함 감성을 지녔으며 곤경에 처한 숙녀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선을 넘는 사람에게는 단호히 대처하는 냉철함을 지녔다. 가히 완벽 그 자체라 말할 수 있는 인성의 소유자가 왜 그 나이까지 미혼으로 지냈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동안 참을 수 없는 허영심으로 자신이 모든 사람의 은밀한 감정을 전부 알고 있다고 믿어왔다.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교만하게 모든 사람의 운명을 정해 주겠다고 감히 나서왔다. 그랬다가 모두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증명되지 않았는가(p571).

 

조용했던 시골 마을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며 평소와는 다른 활기가 생긴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에마 우드하우스는 그간 자신이 얼마나 어리 섞었는지를 깨닫는다. 자신의 오만함으로 해리엇 스미스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녀를 괴롭게 한다.

 

제인 오스틴이 말했듯 예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아가씨를 영 미워할 수만은 없는 건 세상물정 모르는 스물 한 살의 아가씨가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수 있는 실수투성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오롯이 바라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하는 열망을 통해 성장해가는 에마를 보는 내가 왜 이리 뿌듯한지. 단순히 로맨스라 치부하기에는 굉장히 섬세하고 심오한, 당대의 결혼상을 엿볼 수 있는 에마를 읽으며 마치 내가 19세기 영국의 시골마을에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간질간질한 영국식 사고가 궁금하다면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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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루션 맨 - 시대를 초월한 원시인들의 진화 투쟁기
로이 루이스 지음, 호조 그림, 이승준 옮김 / 코쿤아우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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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언제니 육체적으로 힘센 자들의 편만 드는 것은 아니야. 오히려 기술적으로 앞서있는 자들의 손을 들어줄 때도 있지. 지금은 그게 바로 우리야(p38).”

 

어니스트의 아버지 에드워드는 특별한 존재다.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보통의 인간들과 달리, 인류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발명하는 과학자를 자청한다. 덕분에 어니스트의 가족들은 인류 최초로 을 활용하는 가족이 된다. 로이 루이스의 에볼루션 맨1960년대에 쓰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기발하게 원시인들의 삶을 그린다. 우리 인류가 어떻게 진화해왔을까 궁금하다면 어니스트 가족들의 일상과 갈등이 좋은 표본일 것이다.

 

1만 년 전 석기시대 인류는 21세기의 인류를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재빠르고 강한 이빨을 가진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몸은 생존하기에 참 쓸모없이 설계됐다. 안락한 보금자리조차 가지지 못하던 어니스트의 가족들은 불을 활용하면서 놀라운 발전을 보인다. 횃불로 동물을 위협해 좋은 동굴에 터를 잡고, 사냥한 동물을 구워먹어 식사시간을 줄이고 만성적인 위장병에서 해방된다. 불을 구하러 가는 과정은 험난하지만 그것이 가져오는 안락함은 너무도 달콤해 에드워드는 매번 화산까지 가는 위험을 무릅쓴다.

 

내가 보기에 그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일 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냐? 지구상 그 어떤 동물도 산꼭대기에서 불을 훔치려고 한 적은 없었어. 너는 자연 법칙을 위반한 거야(p71).”

 

어니스트의 아버지 에드워드와 삼촌 버냐는 크고 작은 일에서 의견 차이를 보이는데 버냐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에드워드가 늘 못마땅하다. 이안 삼촌은 탐험가로 아프리카, 아라비아, 중국까지 그 시절에 어떻게 그 곳을 갔을지 알 수 없지만 늘 새로운 모험을 떠난다. 인종도, 문화도 다른 인류가 서로를 만났을 때 얼마나 경이로웠을지, 지구 반대편도 비행기로 떠날 수 있는 지금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석기시대의 인류도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꿈을 꾸고, 싸웠나보다. 인간의 기술력을 어디까지 허용해야할지 끊임없이 논쟁하고, 미지의 세계를 열망하며 닿지 못한 우주와 극지를 연구하는 21세기의 인류의 발전은 에드워드와 같은 이들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그는 사회적 통념을 거부했다. 근친혼을 당연히 여기던 아들들에게 새로운 부족에서 여자들을 데려오게 한다. 이렇게 작은 변화들이 차근차근 쌓여 가족 중심에서 점점 확대된 부족 중심의 사회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의 파격적인 결정에 솔직히 점점 성장하는 우리들 때문에 입지가 흔들릴까 봐 이러시는 건 아닌가요?(p136)”라고 항변하는 내부의 반대도 만만치 않다. 불을 전파하기 위해 육백열아홉 개의 나뭇가지를 릴레이로 태우면서 집까지 돌아왔던(p56) 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온전히 이해한 아들이 없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지만 기술의 독점기회를 날렸다며 앞장서서 아버지를 비난하는 어니스트를 보자면, 에드워드가 인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지언정 자식농사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든다. 예나 지금이나 한 인간이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나보다.

 

너희 후손들에게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하거라. ‘남들이 나 대신 해주겠지하고 기대하지 마라. 마치 전 인류의 미래가 너희들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거라(p239).”

 

아버지의 바람은 담백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후손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까, 전 인류의 행복을 위해 고민하며 기꺼이 기술을 공유한다. 화산까지 가지 않고도 불을 유지하려 실험하던 아버지의 실수로 모든 숲이 불타 버리고, 결국 어니스트 가족은 정들었던 보금자리를 떠난다. 떠돌이 생활 중 만난 부족과 기술을 거래하고 정착지를 얻은 어니스트 가족은, 아버지를 향한 불만이 점점 쌓인다.

 

당신은 누가 옳다고 보는가? 이 책의 배경은 석기시대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진 고민과 일맥상통한다. 과거에도, 로이 루이스가 이 책을 썼을 때도, 현재도, 미래도 우리는 보수진보의 갈등을 겪어왔고, 겪을 것이다. 수 만년이 흘러도 풀지 못한 인류의 수수깨끼를 현명하게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 고민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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