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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사키 아타루(와 그가 논거로 삼는 학자들)에 따르면, 역사 이래로 서구에는 여섯 번의 혁명이 있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교황 혁명), 대혁명(루터의 종교개혁),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 (모 당의 대선후보가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은 애석하게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 중에 사사키 아타루가 주목하여 보는 것은 초반의 두 혁명, 즉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인데, 이 두 혁명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다른 혁명들과 달리 이 두 가지의 혁명은 읽기와 쓰기로서 이루어진 혁명이라는 점이다. 대혁명, 즉 흔히 말하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작업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일례로 이 책에서는 루터가 등장하기 전인 16세기 초까지 독일어 서적 간행 총수는 단 40종이었으나, 루터가 등장하자마자 1523년에는 498종에 이르렀고, 그 중 418종은 루터와 그의 적대자에 의해 간행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은 설교도 설교지만 또 한편으로는 읽기와 쓰기의 방법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은 어떤가. 이 혁명은 역사상으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그리스도교 개혁 작업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는 새로운 법문을 번역하고, 편찬하고, 제본하고, 주석을 달고, 수정하고, 색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거의 100년 가까이 이어진 정보 혁명이자 읽기와 쓰기의 혁명이었다. 그래서 르장드르는 이를 "문법학자의 혁명"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의 공통점은 이 두 가지의 혁명 모두 새로운 법을 만드는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대혁명은 종래의 교회법을 부정하고, 모든 법을 '십계명'에 명시적으로 준거하게 하고, '양심'을 강조하는 등의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중세 해석자 혁명은 그 자체가 교회법을 고쳐쓰는 혁명으로, 이 혁명으로 인해 근대국가의 원형이 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성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할 필요는 있다. 그러한 읽기와 쓰기의 혁명,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새로운 법은 무엇 때문에 필요했던 것인가.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이 새로운 법은 단지 교회 안의 내규만이 아니며, 형벌을 내리기 위한 법이 아니다. 이는 살기 위한 법이며, 조금 더 직접적으로는 번식을 위한 법이다. 국가의 본질은 그 국민들에게 '번식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 말이 조금 불편하다면 이렇게 바꿔도 좋다. 국가의 본질은 그 국민들에게 편안하고 자유롭게 아이를 낳아서 기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혁명 이전의 법들은 그것을 보증하지 못했다. 그 교회법들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얽어매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즉 이것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 즉 번식을 한다는 것은 인류사에 있어서는 인류라는 존재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책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반(反)종말론의 개념이 출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류라는 존재가 절멸을 피하게 해준 것, 종말에서 벗어나도록 한 것은 번식을 가능하게 해 준, 두 사건 즉,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이었다. 그러니 그 두 사건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종말론이라는 것은 언젠가 종말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사사키 아타루도 아마도 언젠가 있을 끝, 절멸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생물학자들이 말하는대로 한 생물 종의 평균수명은 400만 년이고, 인류가 출현한지는 고작 20만 년정도이므로 380만년 정도 이후에 인류가 어떤 사건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종말론은 그 종말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말이 곧, 그러니까 내가 있을 때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이고,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사키 아타루의 말대로 엄청나게 유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유치한 사고는 지난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같이 죽자는 식의 나치나 옴진리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인류는 역사가 기록된 지난 이천 년 동안만 해도, 곧 종말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그야말로 밥먹듯이 해왔고, 그 예상은 매번 어김없이 빗나갔다. 그러므로 사사키 아타루는 이제 그만두자는 것이고, 종말이 오도록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버리자는 것이다. 왜? 유치하니까. 20만 년 대 400만 년. 그것은 다르게 보면, 4살 짜리 아이가, 80살 먹은 노인에게 이제 곧 같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사사키 아타루의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사사키 아타루 식의 <아라비안 나이트>이다. 자신의 죽음을 지연하기 위해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세헤라자드처럼 사사키 아타루는 나쁜 종말론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즉 모두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세계의 종말을 지연시키기 위해 매일 밤 우리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그 다섯 밤 동안, 첫째 날 밤에는 문학이라는 것의 가치에 대해, 둘째 날 밤에는 루터의 대혁명에 대해, 셋째 날 밤에는 그 역시 읽기와 쓰기의 혁명이었던,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이슬람 혁명)에 대해, 넷째 날 밤에는 중세 해석자 혁명에 대해, 다섯 째 날 밤에는 고작 20만 년 살고도 종말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간의 우스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럼 이 다섯 째 밤이 지났으므로 우리에게 종말이 올 것인가. 물론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라비안 나이트>의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그 결말은 그 이후로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니까. 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해보면 그것은 '380만 년의 영원'이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읽고 쓰는 것 뿐이다. 매번 반복되는 문학의 종말이니, 문학의 위기니 하는 소리를 할 게 아니라(아닌게 아니라 어떤 문예지들은 매 1년마다 같은 특집을 반복하는 것 같다. "매번 반복되는 것이지만, 문학이 위기에 빠져.."로 시작되는 그 특집들 말이다), '미래의 문헌학'을 하는 것. 인간의 삶을 지속시켜 줄 힘을 내재하고 있는 문학에, 그것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0.1%도 안되어도 '읽는다'라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아무 것이나 '무조건 읽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 혹은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를 읽는 것이다.)
400만 명밖에 자신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 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바야흐로 문학은 위기를 맞고 있고, 근대문학은 죽었으며, 애초에 문학 같은 건 끝이라는 치사한 말을 한 번이라도 공언한 적이 있는 사람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쾌합니다. (p. 250)
상당히 딱딱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나름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저자의 독특한 문체나 이야기 방식에 어느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투는 단호하고,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선언적이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보자면 뭔가 어려운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쉽게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저자 본인이 이야기하듯이) 가끔 논리의 비약이 일어나며 그 논리의 중간과정은 믿음과 반복과 구호와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즉 이것은 나름 잘 쌓아올린 성이긴 한데, 그 중간이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성이기 때문에 때로는 신기루처럼 보인다. 중간의 어떤 부분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논증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들어서야 한다. 이 성의 받침대와 그 꼭대기의 첨탑이 이어져있다는 믿음에 말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대단함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니 아마도 끊임없이 '왜'를 묻는 어린아이처럼 다시 돌아 처음으로 갈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문학은 '종말론에 반한다'는 주장에, 어떤 문학은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혹은 '그것은 사실 알고보면 종말을 반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도 이 책은 한 가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기는 했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어차피 다른 사람이 쓴 것이란 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그것을 완벽히 이해하게 된다면 완전히 발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읽는 것은 미쳐버리는 것, 서서히 미쳐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광하지 않으려 발광하며, 동시에 혁명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읽을 수밖에, 그리고 되지도 않는 리뷰를 쓸 수밖에. 이 책은 매일 밤 거의 같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여름 날씨, 가끔 쏟아지는 비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매미소리 같은 것. 이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은 이유가 있다. 아마도 이 다섯 째 밤이 지난 후에도 여름날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므로. 최소한 380만 년의 여름이 말이다. 영겁의 여름은 지속되고, 우리는 읽고, 쓰고, 혁명한다.
덧.
읽다보니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나 <세계공화국으로> 같은 책이 생각나는데, 기억이 가물거린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초반에 정보를 끌어모으는 사람들, 전문가나 비평가를 비판하는 대목은 특히 흥미로운데, 그럼 전문가도 비평가도 될 수 없다면 무엇이 되야하지,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또 그렇게 말할테지. "당신은 뭔가를 하고 그것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