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더기 앤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로버트 스윈델스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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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장마다 마사와 스콧의 이야기가 교대로 펼쳐지면서 두 아이 주변의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화자가 두 명 이상인 소설은 주인공의 입장에만 치우치지 않고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게 해주면서 개인별 감정이 드러나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더한 것 같다. 왕따를 당하는 마사의 대열에 끼는 것이 편치 않았던 스콧의 마음이 우정을 넘은 사랑으로 변해가는 감정을, 마사의 1인칭 시점으로만 전개했다면 이만큼 잘 잡아내지 못했으리라.

대화체가 많아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은근히 무겁다. 마사는 학교에서 대놓고 왕따를 당한다. 어머니가 집에서 만들어준 옷을 입고 다니는 마사는 책 제목처럼 '누더기 앤'이라고 친구들로부터 놀림받는다. 집이라고 해서 편한 것도 아니다. '의로운 사람들'이라는 교회의 교리에만 충실한 마사의 부모는 아이의 감정과 생활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폭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마사의 자유를 억압하며, 친구와 친해서도 안되고 친구를 집에 데려와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마사의 언니는 집을 나가 해외에서 생활하고 있다. 언니에게서 온 엽서는 마사에게 큰 위안이 되어, 나이를 먹으면 언니처럼 집을 나가 살 희망을 갖고 있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기댈 곳이 없어 의기소침하게 지내던 마사에게 스콧이 나타나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마사를 두둔하다가 함께 왕따를 당하는 스콧은 반듯하신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서인 왕따에 잘 대처하며 마사와의 우정을 거리낌없이 키워나간다. 

마음놓고 맞서도 되는 사람이 아닌, 가족으로부터 자행되는 폭력은 참으로 정신을 혼란하게 할 것만 같다. 아마도 '애증'이라는 낱말이 딱 어울릴 만큼 복합적인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마사 부모님의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혐오'의 정체가 밝혀지는 부분에서 절정에 달한다. '혐오'가 무엇인지 알고는 상당히 놀랐기 때문에, 책 뒷편을 미리 보고 싶은 유혹을 참고 스릴넘치는 기분으로 읽어나가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소설 속의 허구일지라도 6년간 빛을 못보고 산 작은 생명의 존재는 생각만 해도 안쓰럽다.

인터넷이란 매체를 통해 마사의 언니와 연락이 닿으면서 탈출은 극적이고 신나게 이루어진다. 학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느샌가 학대를 받고 있었던 마사의 이야기는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진 일부 부모들의 행동에 경종을 불러 일으킨다. 부모란 잠잘 곳을 마련해주고 먹을 것을 주는 것이 다가 아님을 소설은 얘기한다. 또한,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자식을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보고 인간적 권리를 존중해줘야 한다는 당연한 진실, 그리고 그것이 꼭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마사같은 아이가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스스로의 의사를 밝히기엔 너무도 어린 아이가 사이비 종교단체의 부모들에 의해 어이없는 일을 당한 사례를 티비 프로그램으로 본 기억도 난다. 마사는 다행히도 스콧이라는 믿음직한 친구가 생겨 도움을 받아 탈출할 수 있었지만, 정작 우리 주변의 마사들은 도움을 청할 곳이 그리 많을 것 같지가 않다. 우리가 이웃에 관심을 가져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이렇게 억압당하고 학대당하는 아이들의 존재가 있는지 사회적 감시가 필요한 까닭에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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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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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내전 소식이 한참 신문지상을 달궜을 때 지구 한편에서 일어나는 작은 전쟁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어 있을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방관했던 기억이 부끄러울 만큼, 사라예보의 그 시절은 암울한 잿빛이었다. 세상의 어느 전쟁이 참흑하지 않겠냐마는, 자국민의 손에 의해 인종 청소를 당하는 어이없는 현실에 일상적인 생활이 먼 추억이 되고 말았을 때, 또한 그러한 상황이 4년이나 이어진다면 그 시기를 온전한 정신으로 잘 살아낼 사람들이 과연 있기나 할까.

언덕 위의 사람들(세르비아계)은 게임을 즐기듯이 사라예보의 시민들에게 총을 겨눴다. 옆집의 이웃이 물을 길러 가다가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빵을 사러 늘어선 긴 줄에 폭탄이 떨어져 참사가 빚어지기도 하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그저 하루를 연명해 나갔을 뿐이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는 이렇듯 메말라가는 감정으로 기계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잊어버릴 뻔했던 감성을 깨우쳐 주었다. 1992년 당시 실제로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섰던 사람들이 박격포탄에 쓰러져 22명이 사망했을 때, 베드란 스마일로비치는 그 자리에서 22일간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실화를 모티브로 하여 탄생한 소설에서는 첼리스트를 보호하라는 임무를 맡은 저격수 애로와 가족들을 위해 나흘에 한 번씩 물을 길으러 목숨을 내놓은 위험의 길을 오가야 하는 케난, 가족을 피신시키고 누이의 집에 얹혀 살며 빵공장에 다니고 있는 드라간의 얘기가 교대로 펼쳐진다.

소설의 흐름은 느리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냐가 아니라, 일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상태이다. 길을 건너다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 봐야 하는 세상에서 텅빈 공황상태에 있을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괜찮냐고 보듬어주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한문장 한문장은 그들의 마음을 노크하고 어루만지며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데 익숙한 솜씨를 발휘한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그는 어디선가 자신을 겨누는 총신에서 불을 뿜을 수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메마른 마음을 뚫고 전쟁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확인시켜 주는 희망 그 자체로서 존재했다. 그가 켜는 '아다지오 G단조'는 음악 이상의 힘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으며 예전의 평범한 시절로 되돌아갈 의지를 심어주며 인간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심어주었다.

이 책은 전선없는 전쟁 상태에서 실험용 쥐가 된 듯이 목숨을 담보로 내놓은 삶을 힘겹게 살고 있는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꿈을 잃고 원하지 않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없기에 음악으로 상처를 치유해고자 나선 한 남자를 얘기한다.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지켜낸 애로와 첼리스트 같은 사람들, 얼굴도 모르는 병든 사람에게 약을 전달하러 위험한 길을 나선 에미나, 소시민적 삶 속에서도 조금씩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드라간을 만나보시라. 일부에 의해 일어나는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 그 속에 떨어진 희망 한 조각을 줍는 의미를 넘어서서,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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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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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부호들이 없는 문체가 낯설었지만,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주제 사라마구의 이 책은 시험에 나온다고 달달 외우기도 하는 문장부호란 것들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내용면에서는 사람의 본성과 인간사회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묘사로 감탄을 자아내고 있어, 거장이란 말이 그에게 참 잘 어울린다는 것을 실감하고야 만다.

운전 중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아 당황하는 남자를 둘러싼 수런거림.
다행히 도움을 자청하는 한 남자를 의지해 집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눈먼 남자는 집에까지 들어가 말벗이 되어주겠다는 과잉친절을 의심해 그냥 돌려보낸다. 잠시 의심이 들었다. 그는 선의였을까, 나쁜 목적이 있었던 걸까? 눈먼이를 도와줬던 남자는 이런 절반의 의심을 비웃듯 눈먼 남자의 차를 훔쳐 달아난다. 이것은 인간의 아름답지 못한 본성을 맛보기로 조금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독자들은 이제 수용소에서 펼쳐지는 추악한 본성을 마주해야 한다. 다행인 것은 다양한 군상들의 집합체가 모인 것이 세상이기에 때때로 약해지더라도 근본만은 정의롭고 선한 사람들의 존재가 힘을 준다는 것이다.

눈먼 사람들은 정부에 의해 강제로 수용소에 감금되어 군인들이 전해주는 식사만을 제공받으며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게 된다. 눈이 머는 병은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전염력이 있어서 군인들조차 그들 곁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심지어 죽기를 바라기도 한다. 절대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정도는 눈감아버리는 세상, 그게 어디 수용소 안만의 풍경일까?
이제 수용되는 인원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식량을 빼돌리고 훔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눈먼 깡패집단이 무기와 폭력을 휘두르며 식량을 점거하고 금품과 여자를 요구할 때는 그 몰염치함과 폭력성이 절정에 치다른다. 눈먼 사람들의 사회에서조차 힘을 무기로 못가진 자의 몫을 약탈하고 권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주제 사라마구는 이렇게 눈먼 이들의 세상에서 눈뜬 이들의 세상을 그려낸다. 

오로지 혼자만이 세상을 볼 수 있었던 의사부인은 모든 눈먼 자들의 치다꺼리를 해줄 수 없었기에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도왔고, 깡패들의 불의에 항거했다. 앞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편리했지만, 수용소의 온갖 역겨운 행위와 볼썽사나운 것들을 여과할 장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 누구보다 외로운 책임감에 시달렸을 그녀의 무게감이 책 속에서 전해졌다.
관심이 갔던 또 한 명의 인물은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이다. 그녀는 눈뜬 세상에서 방종한 삶을 살았었고 의사와 한 번의 불륜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엄마 없는 '사팔뜨기 소년'을 보살피던 배려심과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의 내면을 사랑할 줄 아는 열린 마음도 지녔다. 혼탁한 세상에서 방탕함을 배웠지만, 수용소의 생활을 통해 나눔의 미학을 끌어내는 법을 배운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수용소 밖의 세상도 그다지 다를 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장님이 된 세상에서는 네것, 내것의 구별이 무의미하며 한끼를 뱃속에 털어넣으려는 원초적 욕망만이 가장 중요한 삶의 과제가 되어버렸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의사의 집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그들은 의사부인의 주도 아래 나누고 서로 돕는 삶에 익숙해진다. 정의감 있는 리더의 역할이 난세에 얼마나 중요한지 그녀의 역할을 보면 알 수 있다.

왜 갑자기 눈이 멀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어느 시점부터 사람들의 눈이 시력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의사부인은 말한다.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말, 그것이 주제 사라마구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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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동안의 과부 1
존 어빙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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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더 하우스'에 대한 평이 괜찮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 그가 쓴 다른 소설인 '일년 동안의 과부'에도 관심이 갔다. 따뜻한 가족소설인 줄 알고 첫 장을 펼친 순간부터 농도 짙은 묘사에 당황하게 되었지만, 억지를 부리거나 꿰어맞춘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 이 소설은 서서히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따뜻한 이야기를 따뜻하게 듣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이 소설처럼 부적절한 관계가 치부를 드러내는 와중에 한참을 돌아서야 이것이 결국 따뜻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경험은 그리 흔하지 못했다. 내가 원했던 소설은 아니었으나, 결국엔 인물들의 마음에 동화되어 가고 이해하게 되면서 사랑과 가족이란 것의 존재를 다시한번 느끼게 된 것이다.

자동차 사고로 두 아들을 잃은 메리언의 끝도 없는 슬픔과 그녀를 흠모하는 16세 소년과의 나이를 넘어선 사랑은 세상 사람들의 지탄이 되기에 알맞았지만(한국에서라면 더욱 더) 37년을 떨어져 있으면서도 변함없는 그들의 사랑은 일반인의 사랑과 색깔이 살짝 다를 뿐, 사랑이라 부르기에 흠잡을 것이 없었다. 메리언이 4살짜리 딸아이 루스를 마음에서 밀어내려 했던 것은 아들들의 경우처럼 사랑을 잃게 되는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깊은 상처를 받은 자만이 하는 극단적 행동이다. 루스가 자라 어른이 되고 유명한 작가가 되고 엄마가 되었을 때, 사랑스러운 아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떠난 엄마를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스가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 건 그로부터 5년이 더 지나서이다.
--하나뿐인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해질수록, 이미 두 자식을 잃은 메리언이 또 다른 자식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던 심정이 가슴 깊이 이해되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그대로 수락하지 않으려고 버둥거렸는지를 생각하면, 루스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또다른 자식을 낳을 엄두를 냈다는 사실만큼 경이로웠다. 별안간 왜 어머니가 그녀을 떠났는지 이해가 되었다. 매리언은 세 번째 아이를 잃는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루스를 사랑하길 원치 않았다.(p267)--

이 책을 설명한 글 중에 저자가 남자라는 것에 당황하게 된다는 내용이 있는데, 나 또한 그렇게 느꼈다. 세상만사 별별 감정을 다 느껴본 듯한 존 어빙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기 힘들 감정까지 모두 꿰뚫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등장인물들의 연애행각 때문에 작품에 몰입하는 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상황 설명과 대사와 인물의 마음 전개가 적절히 융합되어 있는 재미와 설득력으로 두꺼운 두 권의 책을 술술 읽게 만드는 건 분명 작가의 힘일 것이다. 다른 작가가 같은 내용을 소설로 쓴다면 어떤 스타일의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루스가 오랜 기다림 끝에 엄마를 만나는 장면은 감동적이면서도 세련되게 절제되어 있다. 울고 불며 부등켜안아야 정상일 것 같은 그 마지막 장면은 과잉된 감정 없이도 엄마를 만나는 루스의 벅찬 마음에 동화되어버리게 하고 루스를 둘러싼 풍경 속에 우리를 초대한다. 소설은 여운을 남기며 끝날 뿐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았다는 자질구레한 설명이 없지만, 독자들은 충분히 느낄 것이다. 가족의 화합과 용서가 이룬 행복한 생활이 보이지 않게 담겨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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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4
J.M.G. 르 클레지오 지음, 김윤진 옮김 / 민음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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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만만치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노벨상을 받은 작가가 흔히 그렇듯이 쉬운 책은 아닐 거라는.
역시나 처음 몇 장을 넘기고서 작가의 정신을 따라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슬슬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도 포기는 금물이다. 100% 이해를 못해도 계속 읽어대는 뚝심이 독서에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체득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 중에서도 난해한 부류에 속하는 책들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사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읽었던 부분은 다시 몇 장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는 행위를 수시로 반복했었음을 고백한다. 그만큼 집중하지 않으면 이해가 어려운 소설이다.
물론 줄거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주인공인 아담과 미셸과의 관계를 비롯해서 아담이 왜 개를 따라다니는지, 왜 혼자 나와 살고 있는지와 같은 행동의 연유를 책을 읽으면서 잡아내지 못한 데 있다.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설명이 의미하듯 주인공의 성향이 뚜렷하지 않은 것도 원인이겠지만, 그래도 작품 해석력의 부족이란 면에서는 많이 부끄럽다. 마치 미술작품 중에서 추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선과 점으로 이루어져 있거나 물감을 입으로 훅 불어 그린 것처럼 자유분방한 정도는 아니다. 그림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보이는데 부분적으로 이해가 어려운 그림 말이다. 꼭 그런 그림 앞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주인공인 아담 폴로는 산 중턱의 빈 집에서 무단으로 살고 있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해변가를 빈둥대기를 즐기는 그에게는 미셸이라는 여자친구가 있다. 미셸을 강간한 후 친구가 되었던 설정부터가 책을 읽는 데 몰입을 방해하는 원인 중의 하나였었다.
아담이 쥐를 죽이는 장면은 그 표현력 면에서 기막혔다. 두려움을 느끼며 도망가는 쥐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질 정도로 생생했지만, 도대체 아담이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면서 읽었다. 뒤이어 숲속에 던져버린 쥐를 미셸에게 편지로 얘기하는 부분도, 후반부에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아담의 연설도 물음표의 연속이다. 작가의 훌륭한 역량은 알겠는데, 이해는 하지 못하는 불협화음 속에서 읽어나가는 독서는 스스로도 불편했다.

책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건 뒷부분의 해설을 읽었을 때이다. 막혔던 물길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한 느낌으로 해설이 있음에 감사했다. 개인적 독서 역량의 부족으로 읽기에는 버거웠지만, 작가인 르 클레지오의 사실주의적 표현(약간은 난해하지만)은 충분히 감탄할만 하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문명사회를 비판하고 인간의 소외감을 표현한 방식이 그가 범상하지 않은 존재임을 나타낸다. 아직 르 클레지오의 다음 책을 골라 읽을 용기는 생기지 않지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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