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와 루소는 우리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 지킬 수 없기에 국가와 계약을 했다 한다. 그래서 국가가 내리는 명은 내가 위임한 권력에서 나온 것이니 조용히 따르라고 한다. 언뜻 그럴싸해 보이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속은 것 같기도 해 찜찜하다.

 

난 결단코 국가와 계약을 한 적이 없고, 내 권리를 양도한 바도 없다. 계약은커녕 국가와 만난 적도 없다. 대신 군대 가라고, 예비군 교육 받으라고, 세금 내라고 말하는 국가의 대리인을 고지서 같은 종이조각으로 가끔 접할 뿐이다.

 

왜 우리는 본적도 없는 계약서에 얽매여 살고 있을까?

단지 몇 자의 글자로만 존재하는 이론이 우리의 운명을 책임지는 근거의 전부란 말인가?

 

우리는 선거라는 잠깐의 시간 동안 주인 노릇을 하며 아무에게도 줄 수 없다는 우리의 권리를 거리낌 없이 대리인에게 양도하는 절차를 밟는다. 그것도 다수의 사람들이 원하면 다수결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양도하기 싫은 사람에게 양도가 돼버린다.

그렇게‘민주주의의 꽃’은 활짝 피어나고 우리의 권리를 정당한 절차에 의해 양도받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인은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 왕권신수설을 격파하고 시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럴듯한 명분을 찾고자 했던 루소나 왕권을 옹호하려 했던 홉스 같은 이도 걱정했던 ‘대의제의 약점’은 날이 갈수록 대의제 자체가 되어 간다.

 

객식구가 주인을 좇아내듯 법을 만들 권한을 제 마음대로 남용하고 오용한다. 그러나 이미 권한을 양도해버린 주인은 찍소리도 못하고 구경만 한다. 보지도 못하고 상품명과 가격만 보고 주문했는데, 나중에 내 몸에 맞지 않아도, 불량품이어도, 바가지를 썼어도 절대 반품이 안 된단다. 그냥 울며 겨자 먹기로 사용해야 한단다. 유통기한이 끝날 때까지. 그게 우리가 줘버린 권리란다. 따지고 싶어도 계약 당사자를 만날 수 없으니 계약 파기 또한 불가능하다.

 

금그어놓고 넘어 오면 한 방 날릴 기세로 째려보는 국가. 말 잘들을 땐 ‘내 새끼’하며 보듬을 것처럼 하다 조금만 반항해도 뒈지게 패버리는 폭력 아버지 같은 존재.

그렇다면 국가가 내준 한 뼘의 품안에 안주하며 애완견의 신세로 살 것인가?

두 눈 똑바로 치켜뜨고 계약서에 명기된 조항을 잘 지키는지 따져봐야 할 것 인가?

우리 반대편에 사는 저 불쌍한 보트피플을 보며 아쉬운 대로 국가라는 것이 그래도 있는 게 다행이라고 자위라도 해야 하나?

 

거창한 명분보다 한줌이지만 낸 손에 꽉 잡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굴욕은 순간이나 안락은 길고, 명예는 자랑스럽지만 상금 없는 상장에 불과하니

난 오늘도 갈등하며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세어보며......

어디선가 항상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은 저 큰형님의 듬직한 어깨가 소름끼치도록 자애롭게 다가온다.

 

주인을 위해 열심히 짖는 개는 충견이다. 칭송의 대상이다.

주인을 위해 짖지 않는 개는 똥개다. 무시 받지만 그래도 밥은 얻어먹는다.

그러나 주인을 물어뜯은 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내쳐야 한다.

아무리 주인이 학대해도 주인을 물었다면 죽어 마땅하다.

그것이 주인을 가진 개의 운명이다. 멍~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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