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바다의 기별'을 읽은지가 벌써 일주일이 넘어서니 가물거리지만, 내 딴에는 읽은 감동을 숙성시켰다고나 할까! 그의 책을 읽고 어줍잖은 몇 마디로 리뷰를 쓴다는 게 송구할 뿐이다. 그의 문장에 감탄하며 압도되듯 밑줄을 좌악 그었고, 무엇보다 그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좋았다. 에세이는 저자의 삶이 담겨 있기에 나와 같이 숨쉬는 김훈을 만난다는 것, 그의 살내음을 맡는다는 것이 좋았다.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것은, 카리스마의 그도 따듯한 인간애가 물씬 풍기는 아버지라는 것! 

허클베리핀의 아버지 같았다는 그의 아버지. 광야를 달리는 말이었지만 달릴 광야가 없었던 시대에, 그의 아버지는 기자였고 무협소설도 썼다니 그의 글발은 아버지로부터 유전이구나 짐작해본다. 그의 아버지 이야기는 짠하게 가슴을 파고 든다. 병석에 계신 아버지의 아랫도리를 살필 때, 아버지도 울고 자신도 울었다는 이야기는 내 아버지가 생각나 눈물을 떨구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 파이프를 훔쳐내 담배를 태우다 뺏겼을 때, 학교에서 찾아 아들에게 건네며 한마디 하셨다. 청소년들은 이런 아버지가 부러울까?^^
"너 가져라, 학교에는 가져가지 마라. 너, 담배 줄여."

그는 딸이 취직해서 첫 월급으로 사온 핸드폰과 용돈 15만원을 즐거이 받는 아버지다. 일상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더라도, 무사한 순환이 계속되는 걸 행복으로 삼는 평범한 아버지다. 그는 귀가가 늦어지는 딸에게 전화해서, "운전 조심해라." 말하는 우리들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라는 글에서, 긴급조치 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형법 상의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던 사위 김지하가 형집행정지로 영등포 교도소에서 출감하던 날, 10개월 된 손자를 업고 마중 나온 박경리선생을 관찰했던 이야기를 풀어냈는데 기어이 나를 울렸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만, 그 여인네의 등에 매달린 아이가 발이 시려우면 안 될 텐데. 그런 걱정만을 했다. 지방판 마감이고 뭐고 간에 어서 빨리 저 여인네의 용무가 끝나서 그 아이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이 추운 언덕의 바람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서, 나에게 없었던 따듯한 것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울음에 가까운 따듯한 것들이 돋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가, 나는 지금 그 20년 전의 따스함의 정체를 겨우 입을 벌려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은 나에게 감염된 그 여인네의 모성이었으며 허름하고 남루한, 그 풀포기와도 같은 무력과 무명의 모습이야말로 그 여인네의 힘의 모든 원천이었음을."(89~90쪽)

 
   

스물두 살 영문과 학생이었던 그가 만난 '난중일기'는 그의 인생을 통째로 흔들어버렸다. 낭만과 이상을 꿈꾸는 문학이 현실을 말하기엔 얼마나 빈약한지 깨닫고 학교를 접고 군대를 갔고, 제대해선 내 밥을 벌어먹으려고 신문사에 들어갔단다. 난중일기를 만난지 27년이 지나 '나의 언어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날, 난중일기와 이순신이 처한 절망에 대해 무언가를 쓸 수 있겠구나' 생각했고, 37년이 지나서 두 달만에 엄밀히 말하면 40일만에 '칼의 노래'를 써버렸단다. 일체의 수사 없이 사실만을 기록한 난중일기에서 글쓰기의 진수를 발견했고, 언론과 담론이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은 의견처럼 말해버리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깝다 말한다.  

자신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고귀함을 언어로써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말미엔 부록으로 그의 소설과 소설집 서문과 에세이집 서문, 문학상 수상소감이 수록되어 그의 작품과 그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바다의 기별은 작가이며 아들이고, 아버지이며 시민인 김훈이 말하는 사랑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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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17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김광주 씨의<정협지>가 나오던데요.저에겐 김광주 단편 몇 편이 있어요.아직 안 읽어봤지만...

순오기 2009-01-18 10:22   좋아요 0 | URL
김광주씨가 김훈의 아버지군요. 책에선 이름이 안 나오고, 무협지가 잘 팔릴 때 장안의 술값을 다 내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리고 당대의 글쟁이들이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벼락을 맞아 '우리들의 시대는 이미 갔다'고 밤새 술마시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이야기가 나오죠.^^
아무래도 노이에님과 같은 광주에 사니까 한번 만나야겠어요.ㅋㅋ 우리딸은 요즘 작은할아버지(6.25때 돌아가셨을거라 짐작됨)가 남긴 6.25때 일기를 읽고 있는데, 태백산맥과 남부군에 묘사된 것들과 같은 상황을 보고 있지요. 현대사 관련 과제물에 적용한다고 연구하고 있어요. 나중에 일기를 사진으로 한번 올려볼게요. 노이에님도 관심이 생길거예요. 다른 분들이 남긴 일기도 있거든요~~ 아마 귀중한 자료가 될 거예요.^^

노이에자이트 2009-01-18 16:21   좋아요 0 | URL
그런 중요한 일기는 순오기 님 가문에서 먼저 연구해야겠는데요.어느 정도 해당 시기에 대한 공부를 한 다음 그 당시를 체험한 고령자와 이야기를 해보면 생생한 지식을 얻을 수 있지요.따님이 그 방면에 관심이 있나 보군요.

프레이야 2009-01-1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은가요? 그런 것 같군요, 오기님 리뷰를 보니.

순오기 2009-01-18 10:16   좋아요 0 | URL
김훈의 에세이는 많이 읽지 않아서, 그를 알아가는게 즐거웠어요.
도서관에 있으면 한번 보셔요.^^

메르헨 2009-01-17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
소설 이외의 글은 별로라 계속 어쩔까 했는데 순오기님 리뷰를 보니 봐야겠네요.^^

순오기 2009-01-18 10:17   좋아요 0 | URL
저도 김훈의 소설만 봤기에, 그가 이런 사람이구나~ 알아가는게 좋았어요.^^

소나무집 2009-01-18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남한산성> 읽다가 짜증나서 그의 글이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요.

순오기 2009-01-18 10:19   좋아요 0 | URL
흐흐~ 남한산성, 정말 읽기 힘들었어요. 나도 재작년 8월1일부터 사흘간 삐대며 읽었어요. 리뷰 제목을 '답답한 남한산성'이라고 붙였지요.^^

가시장미 2009-01-1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시어머니께 선물로 드렸어요. 읽고 싶었던 책인데, 저도 김훈의 책이라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었답니다.
좀 어둡고 무거운 면이 많을 것 같아서요. 나중에 아이낳고 봐야겠죠? :)

순오기 2009-01-18 21:40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선 어둡고 무거운 면은 없어요. 편하게 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