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이란 무엇인가
하인호 지음 / 일송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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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미래” 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면 새로운 문물에 대한 궁금함을 넘어서는 기대감과 그 시대를 경험하고 싶은 욕심까지 생겨난다. 불과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 인류는 과연 지금의 발전된 생활환경과 사회모습을 꿈꾸며 살고 있었을까? 물론 지금의 미래에 대한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그때도 먼 미래가 선사할 세상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며 한 발자국씩 다가섰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분명한 것은 과거에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이 사회의 큰 변화를 이끌고, 전혀 새로운 문화를 구축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과거 전자계산기의 발명에 이은 컴퓨터의 등장과 발전으로 사회에 큰 변화를 줄 것으로 예감했다면. 그 변화에 통신혁명이란 불리는 핸드폰과 인터넷의 발달이 더해지면서 보다 그 변혁의 폭을 넓혀놓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발전진행중인 변화 또 색다른 혁명적인 문화가 더해지면서 급진적인 발전상을 보여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듯 우리가 그려가며 누리는 미래상에는 기본적으로 점진적인 발전의 모습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산업을 통한 물질적인 발전은 풍요로움 이면에 인류에게 여러 가지 정신적인 고통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여기에는 계층 간의 갈등에 비롯되는 피해의식과 공허감도 작용을 할 수 있겠고, 인간적인 교류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인 장애로 인한 사회문제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렇듯 미래는 우리에게 결코 풍요로운 행복만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이런 발전과정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에 해결책까지도 미리 연구 해갈 때 우리의 미래는 조금이나마 희망적일 수 있는 것이다.

국내 최고의 미래학자로 꼽을 수 있는 하인호 박사님이 오래전에 펴낸 <미래학이란 무엇인가> 에서는 지난 인류의 미래예측에 대한 발자취와 더불어 미래를 학문적인 발전으로 이끈 과정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앞으로의 미래는 예전보다 날씨예보만큼이나 정확하게 우리들의 머릿속과 생활 속에 녹아들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무엇보다 예전의 미래학자들이 내놓은 이야기들이 때로는 마치 특별한 예지을 지닌 예언자들이 내놓는 불안한 사회에 대한 경고성 예언처럼 들렸지만, 지금의 미래학은 폭넓은 시각으로 모든 학문과 사회현상들을 분석하고 조합해서 만들어지며, 또한 그러한 통찰력에서 기인한 미래예측이 제대로 이사회에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통찰력 역시 신적인 예지가 가져다 준 것이 아닌 끊임없이 세상의 이모저모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의 하루 일과 중 절반은 신문읽기와 인터넷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촉각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이제 미래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첨단의 기술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광범위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쌓은 빛나는 통찰력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통찰력에는 기본적으로 미래를 학문으로 이해하고, 폭넓은 사고를 통한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을 생각된다. 따라서 <미래학이란 무엇인가>을 통해 그려보는 미래에 대한 밑그림은 곧 강한 예지로 빛을 발할 미래통찰력을 위한 기본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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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금서
김진명 지음 / 새움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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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역사계의 연구 초점은 고대사에 집중되고 있다. 여기에 발맞추어 최근 사극의 주류 역시 조선시대에서 삼국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러한 기조가 꾸준히 이어져 조금씩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는 고조선사에 대한 고증이 완성단계에 이르게 된다면 우리는 중국역사에 버금가는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된다. 물론 이러한 고대사에 대한 사료들에 대한 새로운 고증이 늘어갈수록 오금 저려할 나라는 중국과 일본이다. 일제 식민사관을 통해서 최대한 축소시켜놓고, 동북공정을 통해서 고대 유적들을 마구 짓밟아 놓았는데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시간의 더께들이 하나둘씩 벗겨질 때 그들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통쾌한 감이 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소설로 친숙해진 김진명의 <천년의 금서> 고대사의 고증을 통한 통쾌함에 앞서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이끌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자국이 아닌 이국에서 아주 사소한 역사적인 사실 한 가지라도 찾아보려고 노력을 우리는 숭고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여전히 역사를 두고 어떠한 사조간의 밥그릇 싸움이나 하고 있는 유명무실한 정부의 역사 관리의 허술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고조선과 단군의 역사적인 사실로써 재조명해 놓은 책을 읽으면서도 민족적인 자존심 이면에는 동북공정이니 식민사관에 대한 맞불놓기 수준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건 아무래도 고증에 대한 불확신과 편파주의라는 우문에 빠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새로운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연구 노력이 이어질 때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고, 새로운 역사를 더해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고 믿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시간의 더께는 후세의 사람들이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완전하게 지울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정할 수 없는 거와 같은 이치지.” (p.261)

지난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아무리 사실을 은폐하거나 고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사실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어떠한 형태로든 세상에 전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천년의 금서>를 통해서 전하는 역사적인 교훈은 과거사에 국한된 것이 아닌 자신의 역사와 끊임없이 과거로 자리를 옮겨가고 있는 현재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겨보았다는데 보다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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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
박웅현, 강창래 지음 / 알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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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차례에서 수 십 차례 아니 인터넷 팝업광고까지 포함시킨다면 정말 수없이 많은 광고들의 유혹에 둘러싸여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는 요즘의 광고의 특징은 주로 소비자의 궁금증을 최대한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일정기간동안 상품뿐만 아니라 어떤 기업광고인지도 모를 정도로 애매모호한 광고카피만을 내본다. 그리도 그 궁금증이 최고조에 이를 때 기업과 상품을 수면위로 올려놓는 것이다. 굳이 새로운 광고를 통해서 기업과 상품을 내보이지 않아도 인터넷 검색엔진을 통해서 궁금한 소비자들이 찾게 된다는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짧은 15초라는 시간동안에 함축된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을 통한 이미지 마케팅 효과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광고의 변화가 인간에 관련한 전반적인 학문인 인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구?

그렇다. 우리는 대개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전달받는 광고들이 일방성을 갖는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광고를 본 소비자는 어떠한 형태로든 그 광고에 대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 반응은 우리가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나 인터넷을 통한 쇼핑을 할 때 등 모든 소비행동을 통해서 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전혀 자신은 그러한 광고에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무관심 역시도 또 다른 형태의 반응인 셈이다. 이렇듯 광고는 기업과 소비자의 소통을 이끌어내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둘 간의 원활한 소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광고가 잘된 광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활한 소통을 이끌어 내기 위한 잘된 광고의 어떠한 학문을 통해서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그 해답 역시 인문학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는 광고를 통해서 기업과 소비자 간의 원활한 소통을 이끌어내는 다리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어떠한 창의성의 힘까지 불어넣어주는 CD(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조적인 소통기술의 뿌리를 인터뷰 형식으로 담고 있다. 무엇보다 창의성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시작된 인식이 행동으로 이어졌을 때 새로운 창의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가장 머릿속에 기억된다.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친밀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힘 역시도 한순간 어떠한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아서 부리는 것이 아닌, 1999번의 실패 끝에 발견한 2000번째 성공이라는 점은 뭐든 쉽게 접근해서 쉽게 해결하려는 요즘 사람들의 가벼운 사고를 크게 질타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 이라는 책을 마무리하는 글에서도 이렇게 얘기한다. 자신과 자신이 만든 광고가 왜 크리에이티브하냐는 질문에 “답이 없는 질문이다.” 라고. 하지만 그 답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인문학적인 창의성의 힘을 나는 이렇게 느꼈다. 창의성(력)은 신이 주는 선물이라고, 끊임없이 자신과 더불어 다른 대중들과의 소통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작은 선물 같은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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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도록 나를 바꾸고 싶을때 - 자극이 필요해!
안상헌 지음 / 북포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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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지루했던 장마와 더불어 여름도 지나고 있다. 이제는 아침에 조금은 서늘한 기운에 몸을 움츠리며 깨어나곤 한다. 계절이 바뀌어 감에 따라 우리의 몸과 마음 또한 조금은 변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대한 준비는 짧게 지나가는 가을을 넘어 겨울에까지도 이어지곤 한다. 반소매 옷들은 내년 여름을 기약하며, 긴 잠을 준비하게 되고, 여름내 잠을 잤던 긴소매 옷들이 옷장을 독차지하게 된다. 먹는 것에도 변화는 생긴다. 따라서 냉장고 안의 식재료들 또한 바뀐다. 시원한 음식들에서 따뜻한 음식들을 준비할 수 있는 재료들로 말이다. 우리는 이렇듯 계절의 바뀜이라는 자극에 자연스레 반응을 하게 된다.

오늘도 친구와 저녁식사 약속을 잡으려하는데, 이런저런 이유와 조건들을 늘어놓는다. 오래된 만남을 이어오고 있어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도 있지만, 가끔 내가 기분이 꿀꿀한 날 그런 이유와 조건들을 듣게 되면 앞으로는 먼저 만나자고 전화하고 싶은 생각이 달아나게 만든다. 미리 이런저런 잣대를 들이대보는 보는 그 친구의 모습을 나름 꼼꼼하고, 세심하다며 칭찬해 줄 수도 있겠지만,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매번 그렇게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불필요한 거리만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씩 일침을 놓곤 한다. “너는 친구 만나는 이유가 너무 많다” 며 말이다. 하지만 심한 강요를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모습 또한 그 녀석이 그동안 세상을 살아오면서 만들어 놓은 이력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이력에 대한 자존심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보다 신선한 자극으로 그 녀석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가령, 그 녀석은 빚지고는 못 참는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 녀석에게 먼저 저녁식사나 술 한 잔 먹자는 전화나 제의를 받기 위해서 먼저 저축하는 셈치고 한두 번 저녁식사나 술을 사는 거다. 그러면 빚지고 있다는 생각에 조만간 내 핸드폰에 녀석의 전화번호가 뜨게 된다. 그렇게 몇 번 자극을 주고 받다보면 분명 녀석도 보다 긍정적인 반응을 맘 한 구석에 키우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모든 세상사의 자극에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으로 반응을 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앞서 마란 자신이 살아오면서 몸과 마음속에 그려놓은 인생이력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자극에도 다른 반응을 볼 수 있게 된다. 책 <미치도록 나를 바꾸고 싶을 때 자극이 필요해!> 에서는 그동안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자극들에 대한 자신의 반응기작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어떠한 반응들이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끌어 행복에 까지 이르게 하고, 반대로 또 어떠한 반응들이 인생을 부정적인 것들로만 쌓아 우울한 인생으로 이끌려 갈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물론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자극에 대한 반응기작을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자극에 대한 긍정과 부정적인 반응으로 야기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이해이다. 마지막 단계가 자신을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의 문으로 들어서게 하는 방법들을 생활 속에서 하나씩 익혀가는 단계이다. 이 책을 통해서 전하는 이러한 변화의 단계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준비운동 정도는 충분히 마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과 부정의 시각은 늘 각자의 마음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이는 마치 자극과 반응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선택의 자유와 힘의 공간이 늘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다 좋은 선택의 자유와 힘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인식을 문을 열어가기 위한 자극을 이어갈 때, 이는 분명 자신을 성장시키며 행복의 길로도 인도할거라 생각한다. 더불어 행복 바이러스가 묻어있는 모든 자극들은 또한 한 개인에 머물지 않고 또 다른 주위사람들에게 시선한 자극이 되고 또 다른 행복한 반응을 끊임없이 이어가게 하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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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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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정말 천사가 있을까? 때로는 내가 착한 일을 했거나 좋은 생각을 할 때면 혹시 내가 천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볼 때도 있다. 하지만 결코 틀린 생각은 아니라는 것을 한비야 님 의 <그건 사랑이었네>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의 천사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악마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에세이 <그건 사랑이었네>에서 한비야 님 은 근 10년 동안 세계 곳곳의 구호현장을 누비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자신의 의지와 열정들의 원천이 되어 주는 것들에 대해 소소한 행복감을 담아 전해준다. 무엇보다 거대한 산을 움직이고, 바다를 가를듯한 기운은 작은 일들의 실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듣다보며, 지금의 나는 남들에 비해서 너무도 뒤쳐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무기력을 훌렁 벗어 던질 수 있는 강한 모티브를 선물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지난 세월동안 자신을 지켜주었다 믿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내준 관심과 격려에 이은 사랑이 담긴 기도들을 자신 안에만 두지 않고, 곧바로 자신이 받은 것의 두 배, 열 배, 백배로 키워 세상 속에 투영시켜가는 모습들은 이기주의로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에 대한 밝은 희망의 빛을 볼 수 있게끔 해준다.

세계여행이나 한비야 님 처럼 어려운 나라들을 찾아다니며 구호활동을 하다보면 수없이 많은 문화적인 충돌도 경험하게 된다. 특히 끝없는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만드는 종교에 대한 선입견에 이은 갈등은 이미 그 도를 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이념과 종교의 가장 커다란 실천의 뿌리는 사랑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다른 나라의 문화와 종교를 좀 더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작은 사랑의 실천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더불어 해보게 된다. 특히 이러한 것들은 현재 한비야 님 이 추진하고 있는 세계시민을 키워가는 일의 튼튼한 밑바탕으로 자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건, 사랑이었네>를 통한 한비야 님 의 10년간의 행적을 통해서 변함없이 재해와 빈곤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어난 만큼 그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마음으로라도 함께 하겠다는 사람들 역시 크게 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의식에 커다란 변화물결을 봤을 때,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끼게 된다.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은 분명 자신만의 길이며, 오늘 행하는 모든 행동들은 자신의 과거라는 기록과 더불어 미래로의 연속선의 방향을 만들어 간다. 우리는 자신이 걸어갈 방향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생각이나 의견에 내맡길 때가 많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생각을 거친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나름의 방향을 구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완성된 성공에 대한 조급한 생각이 집착을 낳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다. 강을 가로 지르는 수 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다리도 흙 한줌과 시멘트 한 줌 그리고 물 한 바가지에서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비야 님께서 는 앞으로 보다 체계적이며 인도적인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지원을 이끌어 내서 활용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신다고 한다. 이 또한 나는 다시금 세상에 사랑과 희망이라는 거대한 다리를 놓기 위한 흙과 시멘트와 물을 한 줌씩 모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공부가 마무리되어 볼 수 있을 어두운 세상의 그림자를 밝혀줄 사랑과 희망이 빛나는 다리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름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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