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악마 - Angels & De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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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태로든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인이든, 과학적 합리주의를 추종하는 비종교이든 한 시대 안에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늘 문제는 우월성이다. 서로가 여전히 풀지 못하는 큰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이상 지나친 우월성 주장은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까지 불러 일으켜 결국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치욕적인 역사를 주고 받게 된다. 인간의 불완전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신성함을 강조하며 인간에게 자애로운 신을 섬기는 이들은 결국 인간이기에 신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과학을 향해 칼날을 들이댄다. 여기에 과학자들 역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영혼에 대한 무시로 시작한 갈등에 맞서 총부리를 겨눈다. 결국 인간이기에 벗어 던지지 못하는 인간이 갖고 있는 천사와 악마의 이중성 때문에 우리는 시대에 따라 천사의 부름을 느낄 때도 있지만, 소름끼치는 사악함을 경험하게도 된다.




<다빈치 코드>를 통해서 신과 과학의 충동은 이 영화 <천사와 악마>를 통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과학은 이제 신과 종교에 대한 진실 규명을 떠나 마치 새로운 신의 가치를 과학적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는 지구와 은하계, 우주의 커다란 진리에 대한 도전장과 같다. 하지만 그 도전장은 순수한 진리 탐구의 도를 넘는 이들에 의해 지난 역사 속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대한 복수심(악마)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시작부터 시종일관 한눈을 팔 수 없었다. 먼저 문제해결 시한 5시간이라는 촉박한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빠르고 박진감 넘치게 전개되는 사건의 풀이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된 바티칸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옛 성당과 교회 등의 건축물들과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며 바티칸이 간직한 역사에 푹 빠져들었다. 가령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관심을 갖을 만한 교황의 선종 후 바티칸 내에서 바티칸 법에 의해 행해지는 의식절차 등은 좋은 상식적 지식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 영화 <천사와 악마>를 통해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경고적인 메시지도 보았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신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과학적인 합리적인 사고는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깊은 상념들을 정리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 정리의 결론은 이렇다. 우주의 만물들이 이루는 모든 일들은 그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한 지배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종교도 과학도 이러한 절대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상생할 수 있는 데로 힘을 모아야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다. 스크린을 통해서도 주지하는 바에 대해서 크게 느낄 수 있었지만, 보다 섬세한 궁금증들에 대해서는 원작을 책으로 다시금 곱씹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게 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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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렉 더 비기닝 - Star Tr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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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인류와 또 다른 행성의 종족들로 결성된 연합군이 여지없이 등장하는 악의 무리에 대항하여 결전을 벌이는 장면들은 분명 먼 미래에 대한 상상의 결정체들이다. 하지만 그동안 인류가 꿈꾸는 미래는 하나둘씩 우리 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할 때 그리 먼 미래가 아니라고도 느껴짐은 인류문명의 발전 속도는 더욱 가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산업혁명을 인해 괄목상대한 발전을 거듭한 인류는 또다른 혁명을 통해서 그 이상 거듭날 것임이 분명하다는 것에 나 역시 동의한다.


영화 <스타트렉 : 더 비기닝>에서 만나는 미래상들 역시 미래의 생활을 예견하는 책에 등장하는 운송수단과, 로봇,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상을 선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무척 신선한 희망을 던져준다. 물론 영화에서 보여주듯 늘 인류를 한 순간에 우주의 먼지처럼 만들만큼의 가공할 위력을 가진 악의 무리 역시 존재할 수 있음에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 때문에 우주가 가진 거대한 힘을 인류를 비롯한 다른 우주 내 종족과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그 신비로움을 즐기는 것이야 말로 우주에서 인류의 존재감을 찾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속에서 또 한 가지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감정이다. 미래의 지식의 수준은 사실 개인간의 편차가 무의미할 거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개인간의 능력은 무엇보다 감정을 얼마만큼 다스릴 수 있느냐에 따라 리더가 될 수도 구성원으로 남을 수도 있는 것이다. 때로 조직을 다루는 큰일에 있어서는 냉철함이 필요하지만, 몸 안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이상 뜨거운 사랑까지 냉철함으로 덮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블리지미르 메그레의 책 <아나스타시아> 에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우주의 힘이 당신과 함께하며,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밝은 꿈을 이루게 하고, 마음의 평화를 주고, 가까운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게 하고, 당신을 더욱 사랑하도록 돕는 거야”
우주의 힘이 분명 인간의 탄생을 이끌었을 것이며, 그 신비스러운 힘을 인간이 느끼며 향유하게끔 이끄는 것도 우주가 갖는 커다한 힘의 한 몫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순간적으로 시공을 초월한 이동이 가능한 미래에 우주에 살아갈 인류와 또 다른 우주인과의 소통을 보여준 이번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은 우주의 커다란 무게중심에 인류가 서 있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보다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상상을 앞으로 미래를 이끌어 갈 사람들에게 즐거운 미리보기를 제시한 영화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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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슬기 맑힘이다 사이의 사무침 1
구연상 지음 / 채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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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哲學), 그 이름만으로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게 될 때 주눅 들게 만드는 왠지 가까이하기 힘든 학문의 영역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가 철학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에는 어떠한 사상과 이론의 깊이에서 찾아보기보다는 단지 철학이라는 이름값에 때문에 자기 스스로 쉽게 이해할 수도 있고, 가깝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과 이론들을 지나치게 고상한 척 포장하려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철학은 생활과 같은 거라 말한다. 가령 우리가 마시는 물 한 잔에서도 철학을 그려낼 수 있다. 여기에 꼭 무슨 주의니 무슨 사상을 개입시킬 필요는 없다. 자신이 스스로 자유롭게 만든 스타일이 굳어지고 그 속에서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차별된 지혜를 발견한다면 바로 그것이 지혜와 더불어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하나의 철학이 되는 셈이다. 이렇듯 우리는 일단 먼저 태양의 강한 자외선을 피하듯 철학을 향한 두툼한 선입견의 외투부터 벗어 던져야 한다. 
 

 나의 오감, 아니 육감을 감싸고 있던 선입견의 외투를 벗어 던지는 데 도움을 준 책이 바로 복잡한 번뇌 만상의 마음에 슬기를 더해주는 실용 철학 강의를 담고 있는 <철학은 슬기 맑힘이다> 이다. 내가 이 철학 강의 앞에 ‘실용’이란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그동안의 철학서에서 발견할 수 없는 그동안 철학의 입문에 주저했을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쉽게 다가서는 친밀감을 느꼈기 때문이며.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저자도 이 책을 통해서 누구든 철학의 우물에 풍덩하고 빠질 수 있도록 아주 쉽게 철학을 생활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1강 슬기 맑힘과 악(惡)에서 우리는 먼저 철학을 가장 쉽게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운동을 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 어려운 사상이나 이론적인 배경 역시 배제되어 있으며, 단지 단어의 정확하고 명쾌한 풀이에 집중한다. 이러한 단어의 풀이는 곧 다음에 제시하는 철학적인 명제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대개 대부분의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단어여서 개념은 얼핏 머릿속에 있지만 정확한 표현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이런 점을 조금의 노력으로 극복하면 이제 철학은 자신의 슬기로움을 밝혀줄 기쁨의 학문으로 다가온다.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후 저자가 책을 통한 강의에 첫 번째로 내세운 단어는 바로 악(惡)이다. 순자자 주장한 성악설에 저자가 무게중심을 두었던 탓일까? 아니다. 아마도 악이 행해진 자리를 예(禮)로써 다스려지기를 바랐던 마음 때문이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순자의 성악설에서도 인간의 선천적인 욕맘과 싸움으로 인한 파멸을 막는 방법을 예(禮)속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제2강 개인의 유래에서는 우주의 온갖 사물과 현상 즉,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보고 듣고 느낌으로써 경험하게 될 유일한 자신을 개인이라는 개별적인 상황으로 분리시켜 때로는 자유롭고 세상을 활보하고, 탐험하며, 그러다가 파멸을 하기도 하는 개인들의 삶을 돌아봄으로서 각자가 간직한 삶의 의미를 조명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이는 또한 현대의 복잡한 사회 안에서 구성원들과 제대로 접목하며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여러 충고를 담고 있는 셈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이란 매우 어렵고 지루할거야 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있는 나는 이번 <철학은 슬기 맑힘이다> 라는 색다른 철학 강의를 통해서 새로운 철학의 문에 노크를 하고 문손잡이를 잡은 느낌이다. 그리고 앞으로 좀 더 생활속에서 자연스럽게 철학을 찾아가는 노력에 까지도 지금의 이 여운이 남아서 미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철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보다 가깝게 호흡하듯 소통하는 일만 남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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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 순례
최준식 지음 / 소나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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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나의 서울생활도 5년이란 나이를 먹는다. 예전에 서울에 오가며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느끼는 서울생활은 과히 비관적이었다. 무엇보다 비교적 공기 맑은 지역에서 20년 넘게 살아 온 나에게 서울의 공기는 답답함 자체다. 그리고 환경공해 이상의 스트레스를 주는 교통체증까지 그래서 서울은 나의 거주에 필요한 조건들을 충분히 채워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서울 하늘아래 살고 있다. 지금은 서울의 문화가 나의 채워주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조건들을 다르게 채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600년의 수도 서울은 그 오랜 기간 한반도의 중심축으로 자리한 만큼 수많은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얻었을까? 아니다 단지 일반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실제로 서울 안에 널려 있는 역사의 현장을 지나고 문화재를 바라보면서도 그 현장과 문화재의 유래나 의미에 대해서는 몇마디 달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듯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1,000만명이 넘게 살고 있는 서울의 문화는 우리의 무관심속에서 그 뿌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는 바로 남대문 화재소실 등이 입증한 셈이다.

 사실 서울의 문화에 대한 나의 관심은 최근에 중국 상해여행을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운 좋게도 우리가 방문하는 곳마다에 담겨진 역사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조선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의 역사나 문화에 연결 지어서까지 설명하는 모습을 보며, 만약 외국인 친구가 있어 서울을 방문할 때 나는 어디를 데려가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각성을 했다. 적어도 외국인들이 서울에 왔을 때 가장 많이 찾는다는 경복궁이나 인사동, 창덕궁 등에 대해서만큼은 그 안에 담겨진 역사적인 이야기와 함께 설명할 수 도록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책 <서울문화순례>와의 인연이 된 셈이다.

 <서울문화순례>는 애초에 외국인을 위한 관광서적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동경로를 무척 자세하게 담고 있다. 소위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생 생각을 많이 하며 살고 있는 나 같은‘서울 촌놈’들에게는 안성마춤이다. 그리고 책의 구성은 네 갈래의 길로 구성, 첫 길에서는 서울의 풍수지리와 더불어 남산안의 유적들과 얽힌 이야기들을 담고 있고, 두 번째 길에서는 서울의 심장부에 위치한 경복궁과 북촌 한옥, 그리고 창덕궁을 다양한 사진을 통한 설명으로 만날 수 있어 서둘러 가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세 번째 길은 국사당과 종묘, 성균관, 조계사 등을 돌아보며 서울 안에 간직된 한국인의 민간신앙을 포함한 종교 유적의 뿌리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길에서는 옛 것과 새 것의 교차점이라 할 수 있는 인사동과 홍대 앞의 문화들을 돌아보며 앞으로 옛 것을 지키는 마음과 새로운 것을 접목시켜 발전 시켜야 하는 우리의 남은 숙제들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바라보는 보존되어 있는 서울의 유적과 문화들은 우리들의 작지 않은 무관심으로 묻혀버리고 변색되거나 퇴색해 버린 것도 있으며, 신구의 조화를 이룬 것이 있는 반면 전통이 무시한 체 새로움을 추구한 부분도 발견할 수 있다. 저자 역시도 책의 중간 중간에서 현재의 유적과 문화재 관리 실태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처음엔 좀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이러한 정책방향과 의식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분명 앞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간직한 소중한 문화 유적들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과정에 있어 전환적인 각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고 생각한다.

 왠지 앞으로 서울 안에서의 문화생활이 풍성해 질것에 대한 기대감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한 달에 하루 이틀 아니 많게 일주일에 하루정도는 문화의 날로 정해 놓고 잠시 지나든 그곳에 머물러 보다 자세히 음미하든 서울의 살아있는 문화들을 찾아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겨볼 생각이다. 그러다보면 나만의 맞춤형 서울문화순례 지도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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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 - 누가 감히 '한다면 하는' 나라 미국을 막아서는가
아브람 노엄 촘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 데이비드 버사미언 인터뷰 / 시대의창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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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촘스키와의 대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그 이름은 귀에 익숙하다. 무엇보다 세상의 진실을 대변하는 듯 한, 그동안 나 이외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을 깊이 자극한 인상이 나에게도 어렴풋이 여운으로는 남아 있었다. 나는 먼저 책의 몇 장을 앞서 뒤적거렸다. 인터뷰형식의 구성으로 된 책의 내용은 왠지 첫인상이 좋지는 못했다.

그리고, 본격으로 “촘스키의 책이 필요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옮긴이의 글로부터 촘스키를 나의 머릿속에 각인해갈 준비를 했다. 목차를 지나 8개의 PART중 1개를 읽었을 때 이미 촘스키가 나의 심장 근처에서 대화를 걸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자유”라는 단어로 내 마음을 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촘스키의 글을 통해서 내가 느끼는 자유는 결국 이데올로기적 자유였다. 세상의 권력의 중심에 서있는 사람이건, 하루살이에 힘겨운 노동자나 여전히 줄 듯 늘어나는 노숙자들이건, 사람들은 모두가 좋은 세상을 갈망한다. 모두의 좋은 세상에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유다.

우리는 한동안은 자유에 목말라했었다. 그리고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지만, 조금의 자유를 누리며, 바로 풍요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완전한 풍요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 사이 권력자들은 풍요와 안전이란 눈앞의 가림막으로 자유를 억압하며, 유린한다. 결국 제자리 인 셈이다. 물론 눈에 보이는 세상은 크게 변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저변에서 우리의 자유를 조금씩 빼앗다가 어느새 송두리째 빼앗아버릴지 모르는 비도덕은 여전히 깊은 뿌리를 뻗어가고 있었다.

촘스키와의 대화는 바로 이러한 진실을 왜곡하며 인권을 유린하는 인간의 사악함에서 비롯된 비도덕적인 뿌리에 제초제를 가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경험들을 갖고 있다. 그동안 진실인줄 알았던 일들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접했을 때의 배신감과 더불어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말이다. 촘스키가 바라보고 끊임없이 진실을 향한 열정은 바로 이러한 카타르시스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에서도 촘스키는 우리를 까맣게 속이려 했던 진실의 왜곡에 메스를 드리워 새로운 카타르시스의 발로를 열어 주었다. 그동안 외신의 체로 걸러진 기사로 잘 알고 있던 미국, 그리고 그들과 동조하는 국가와 무리들의 계획된 음모, 그 치밀한 각본처럼 짜여진 듯 한 일들의 진실들을 바라보며, 배신감은 조용히 비장한 미소로 입가에 남게 되고, 무엇보다 진정한 자유까지도 권력에 의해 공격받고 짓밟혀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갔다.

촘스키와의 대화를 통해서 지난 사실과 역사의 진정성을 깨닫는 것은 중요일이다. 진정 필요한 생각과 일은 우리가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역사적 사실의 진정성을 보호하는 작업이다. 물론 그 작업이 원활하게 이뤄지려면 무엇보다 자유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 자유의 필요성과 의지를 나는 촘스키의 대화를 통해서 발견한다. 자유 없이 비롯된 변화의 미래는 더욱 큰 시련의 미래로 다가올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의 큰 변화의 물줄기에 자유를 심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행복한 돼지로 살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다. 촘스키의 이 책은 우리가 여전히 누리지 못한 자유의 소중함을 목이 터져라 외친다. 다음 세대에 나타날 촘스키를 기대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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