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우리나라는 오랜 시간 SF의 불모지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나란히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추리소설과 판타지는 최소한 한 번씩 크게 붐이 일었던 적이 있지만, SF는 90년대 초반 <파운데이션>과 <듄>이 발매되면서 잠깐 반짝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대세가 된 적이 없었다. 고전 SF의 대표작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마지막 편이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아 원서로 읽어야 했을 정도로 한국에서 SF가 처한 현실은 열악하다. Scientific Fiction을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번역하는 것부터가 SF가 곧 허무맹랑한 공상의 집합체라는 대중의 편견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렇기에 김초엽 작가의 등장은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다. 근간에 곽재식과 듀나가 SF를 집필하고 출판하였으나 SF 팬들 사이에서만 화제가 되었고 출판 시장에선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런데 김초엽은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잇달아 베스트셀러에 작품 목록을 올리고 있다. 참 신기하다고 고개를 갸우뚱 거렸는데, 그 대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비로소 이 현상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녀가 발표한 일곱 개의 단편을 묶은 단편집이다. 배경은 다르지만 일곱 편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등장인물이 잃어버린 것,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그 과정 끝에 만나는 화해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올리브가 어머니 릴리를 찾아 지구로 떠나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는 과정이고, <스펙트럼>은 희진이 우주 탐사에서 만난 외계인 루이와의 감정 교류를 통한 범우주적인 유대의 발견이다. <공생가설>에서 이미 멸망한 행성의 지적 생명체는 지구까지 흘러 들어와 인류의 의식 속에서 미토콘드리아 처럼 공존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100년 넘게 동면을 거듭한 안나는 우주 반대편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이미 죽어버린 일가족이 잠든 행성계를 찾아간다. <감정의 물성>은 다양한 감정을 실체화한 상품에 집착하는 인물을 다룬다. <관내분실>의 주인공은 생전에 사이가 좋지 못했던 엄마의 기억이 디지털로 보존된 도서관에서 비로소 엄마를 용서하고 화해하며,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가윤은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우주비행사 이모의 사고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지만 자신도 우주비행사로 훈련받는 과정을 통해 차츰 이모를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김초엽의 작품에서 SF는 인물들의 감정과 서사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SF의 장르적 특성을 통해 작가가 뜻하는 바를 충실하고 풍부하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지만, 뒤집어 말하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비단 SF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상실과 갈등, 탐험과 시련, 화해와 성장이라는 소설의 보편적인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SF의 외피를 쓰고 독특하고 호소력있게 전개되는 서사가 김초엽 소설의 인기 비결로 보인다. 거기다 대다수 작품에 등장하는 소수자들 - 여성, 장애인, 노인, 비혼모 등 - 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다루는 문제의식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이 소설들이 SF보다 일반 문학에 가깝다고 느끼게 만드는 요인이었을 듯 하다. 그러니 SF에 거부감을 갖는 독자들도 김초엽의 소설에 쉽게, 그리고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을 터이다. 즉 김초엽의 소설은 지금 출판 시장에서 순수한 SF로서가 아니라 SF의 향취가 더해진 일반 문학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