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책으로 -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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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언 울프는 전작인 <책 읽는 뇌>에서 원래 독서를 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인간의 뇌가 어떻게 독서라는 행위를 수행하고 그러기 위해 뇌가 어떻게 재조직 되는지를 말했다. 또한 특정한 아동기에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와 그 방법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설파한 바 있다. <다시, 책으로>로 돌아온 그녀가 다루는 주제는 디지털 시대에도 독서가 유효한 이유, 아니 책을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인터넷에 방대한 정보 - 현대인들은 매일 디지털 기기를 통해 무려 34 테라바이트의 정보를 소비한다 - 가 넘쳐나는 지금, 아이들의 뇌는 점점 텍스트를 깊이있게 읽는 능력을 습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손가락만 까딱해도 언제든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면서, 그리고 그 정보의 양이 너무나 많아지면서 뇌는 정보를 빠르고 가볍게 캐치하는데만 익숙해진다. 그 반동으로 우리는 획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깊이 사고하는 방법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방법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이제 지식의 원천을 인터넷에 의존하게 되면서, 예전엔 책을 통해 우리 내부에 축적했던 고유한 배경 지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식을 뇌에 저장하면서 동시에 체계적으로 구조화 하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의 클라우드에 단지 쌓아 놓고만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궁금한 게 있으면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간단히 검색할 수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검색한 첫 페이지를 통해 얻은 정보 이상을 찾아보려 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매일 얻는 지식들이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되는 현상을 낳고,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다른 견해를 배척하는 결과를 만든다. 또한 인터넷 상의 지식은 집단 지성으로 보완되기 보다는 댓글이나 ‘좋아요’ 등의 행위로 인해 배타적으로 변질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집단적인 자기 확신이 되먹임되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이 때문에 저자는 디지털 매체의 범람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고하는 능력을 외부에 위탁하게 되면서, 마치 종교와 미신에 사로잡힌 고대의 인류와 비슷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정보, 너무나 많은 선택지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사고와 통찰이 필요없는 정보에 의존하도록 만들고, 그러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방식과 내용에 부합한다는 이유만으로 편향된 정보만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선택한 정보를 토대로 자신이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게 되며, 좀 더 깊이 성찰할 동기, 자신과 다른 관점들을 취하게 될 동기를 잃어버린다. 이러한 연쇄작용은 개인의 분석력과 판단력을 마비시켜 여론에 쉬이 휩쓸리게 만든다. 당장 지금의 대한민국만 해도 포털 뉴스와 카톡과 커뮤니티에 떠도는 거짓 정보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매리언 울프는 우리가 디지털 매체를 배척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아이들이 필요에 따라 책읽기와 디지털 읽기를 병행할 수 있는 교육 방식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매리언 울프가 소개하는 교수법은 아직 초기 연구 단계로 보이며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꽤 의심스럽다. 이 책의 주장과는 상관없이 이제 인류가 깊이 읽는 능력을 다시 복원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비관이 내 마음 속에서 고개를 쳐든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긴 텍스트를 읽는 게 힘겨워졌는데 그 이유가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뇌도 이미 디지털 읽기에만 익숙해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노트북과 아이폰, 유튜브와 OTT로 소비하게 되면서 말이다. 이걸 깨달았다고 해서 지금보다 책을 더 많이 읽고 디지털화된 정보를 멀리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하여 앞으로 인류가 ‘디지털 치매’에서 벗어나기는 점점 요원해 질거라는 가벼운 절망감이 든다. 마치 변곡점을 넘어버린 기후변화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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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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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오랜 시간 SF의 불모지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나란히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추리소설과 판타지는 최소한 한 번씩 크게 붐이 일었던 적이 있지만, SF는 90년대 초반 <파운데이션>과 <듄>이 발매되면서 잠깐 반짝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대세가 된 적이 없었다. 고전 SF의 대표작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마지막 편이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아 원서로 읽어야 했을 정도로 한국에서 SF가 처한 현실은 열악하다. Scientific Fiction을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번역하는 것부터가 SF가 곧 허무맹랑한 공상의 집합체라는 대중의 편견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렇기에 김초엽 작가의 등장은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다. 근간에 곽재식과 듀나가 SF를 집필하고 출판하였으나 SF 팬들 사이에서만 화제가 되었고 출판 시장에선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런데 김초엽은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잇달아 베스트셀러에 작품 목록을 올리고 있다. 참 신기하다고 고개를 갸우뚱 거렸는데, 그 대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비로소 이 현상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녀가 발표한 일곱 개의 단편을 묶은 단편집이다. 배경은 다르지만 일곱 편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등장인물이 잃어버린 것,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그 과정 끝에 만나는 화해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올리브가 어머니 릴리를 찾아 지구로 떠나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는 과정이고, <스펙트럼>은 희진이 우주 탐사에서 만난 외계인 루이와의 감정 교류를 통한 범우주적인 유대의 발견이다. <공생가설>에서 이미 멸망한 행성의 지적 생명체는 지구까지 흘러 들어와 인류의 의식 속에서 미토콘드리아 처럼 공존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100년 넘게 동면을 거듭한 안나는 우주 반대편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이미 죽어버린 일가족이 잠든 행성계를 찾아간다. <감정의 물성>은 다양한 감정을 실체화한 상품에 집착하는 인물을 다룬다. <관내분실>의 주인공은 생전에 사이가 좋지 못했던 엄마의 기억이 디지털로 보존된 도서관에서 비로소 엄마를 용서하고 화해하며,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가윤은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우주비행사 이모의 사고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지만 자신도 우주비행사로 훈련받는 과정을 통해 차츰 이모를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김초엽의 작품에서 SF는 인물들의 감정과 서사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SF의 장르적 특성을 통해 작가가 뜻하는 바를 충실하고 풍부하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지만, 뒤집어 말하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비단 SF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상실과 갈등, 탐험과 시련, 화해와 성장이라는 소설의 보편적인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SF의 외피를 쓰고 독특하고 호소력있게 전개되는 서사가 김초엽 소설의 인기 비결로 보인다. 거기다 대다수 작품에 등장하는 소수자들 - 여성, 장애인, 노인, 비혼모 등 - 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다루는 문제의식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이 소설들이 SF보다 일반 문학에 가깝다고 느끼게 만드는 요인이었을 듯 하다. 그러니 SF에 거부감을 갖는 독자들도 김초엽의 소설에 쉽게, 그리고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을 터이다. 즉 김초엽의 소설은 지금 출판 시장에서 순수한 SF로서가 아니라 SF의 향취가 더해진 일반 문학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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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백이호 옮김, 이인식 / 김영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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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평가를 박하게 내린 가장 큰 이유는 형편없는 번역이다. 과학기술 서적은 매끄러운 가독성보다 적확한 의미 전달이 중요한지라 직역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직역은 둘째치고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단락이 지나치게 많다. 번역된 문장을 다시 머릿속에서 해석해야 하는 작업이 얼마나 피곤한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지 않길 권한다.

헨리 페트로스키가 이 책에서 하려는 말은 다음의 단 한 문장이다. ‘도구의 형태는 기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앞선 도구들의 실패와 그에 대한 지속적인 개선에서 기인한다.‘ 이는 생물이 신에 의해 창조되고 완성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누적된 진화의 결과라는 생물학적 진화론과 유사하다. 기능만으로 도구의 형태가 결정된다면 그 도구는 단 몇 번의 디자인으로 완성되고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을 터다. 그 도구의 쓰임이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도구들이 어떤 식으로든 개선되고 있으니까. 인류 역사는 도구의 발전과 함께 해왔으니까.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한 문장이지만, 그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매우 혼란스럽다. 예시를 집중적으로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메시지를 분명하게 나타내지도 않는다. 형편없는 번역 때문에 안 그래도 문장의 뜻을 파악하기 힘든데, 그걸 차치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헷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디자인과 기능의 연관관계를 다루는 책인데도 예시가 되는 사진이나 그림이 상당히 빈약한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책의 원제는 <The Evolution of Useful Things>이다. 번역서의 제목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건 책을 팔아야 하는 출판사의 고충 때문이리라 이해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이토록 흥미를 유발하는 제목과는 다르게 학술적이다 못해 따분하다. 제목만 보고 우리가 흔하게 쓰는 도구의 유래와 변천사에 대한 책일 것이라 짐작한 독자들은 큰 배신감을 느낄 터이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되, 일반 독자가 이 책에서 얼마나 효용을 얻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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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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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헤아려 보니 내가 서울에서 산 지 벌써 27년이 넘었다. 27년 전 처음 서울에 발을 디뎠을 때와 비교하면 서울의 지형이나 문화가 참 많이도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만 해도 서울 중심가의 한 축이었던 종로는 이제 노년이 지배하는 쇠락의 상징이 되었고, 인쇄공장이 잔뜩 들어서 있던 성수동은 유행을 선도하는 핫플레이스로 변모했다. 4호선 까지만 있었던 서울의 지하철도 이젠 9호선을 넘어 경전철이 개통되고 있으며, 촌놈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던 고가도로들도 속속 철거되고 있다. 고작 30년도 안 되는 시간으로도 이렇게 도시가 바뀌는데, 그보다 먼 과거의 서울은 어떠했을까?

<서울은 깊다>에서 전우용 교수는 거대 도시 서울의 역사를 구석구석 좇는다. 시간대로는 조선 건국부터 유신 정권까지가 되겠으나, 연재 컬럼을 엮은 책이라 매 장마다 다루는 주제는 각기 다르다. 저자는 권력에 의해 서울이 형성되는 과정, 그리고 권력의 변동에 따라 생멸하는 문화의 변천사를 꽤 설득력 있게 - 인문학의 특성 상 가끔 지나친 상상력이 동원되기는 하지만 - 제시한다. 이를테면, 영조 대에 한양의 개천을 준설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 그렇다. 17세기 말에 이르러 한양에는 물난리가 자주 났는데, 그 이유는 개천들의 하상(河床)이 높아져 배수로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개천의 하상이 높아졌을까? 조선 시대, 도시의 분뇨를 해결하는 방법은 개천에 내다 버리거나 텃밭에 퇴비로 뿌리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만 해도 한양의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집마다 텃밭을 곁에 둘 수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로 상비군과 그 식솔들, 유랑민들, 벼슬길에 오른 양반들이 한양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텃밭은 몽땅 주택지로 전환되었다. 그러니 자연히 개천은 똥물이 될 수 밖에. 게다가 17세기 후반부터 온돌이 보급되면서 땔감의 소비량이 급속히 늘었고, 온돌에서 타고 남은 재가 개천으로 쓸려 들어가면서 퇴적되어 하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결국 수해가 빈발하게 된 것은 전란으로 인해 한양으로 부와 인구가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언어의 유래도 말해준다. 아이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은, 조선 시대 거지들이 다리 밑에서 생활하며 패거리를 짓게 된 데서 온 말로 ‘거지 아이를 데려왔다‘는 뜻이란다. 그리고 광장시장은 원래 일제 때 광교와 장교 사이의 구간을 판자로 덮어 시장을 만들려는 계획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돗떼기 시장‘은 돗자리째 물건을 떼어가는 도매 시장을 뜻하는 말로, 상품을 조금이라도 좋은 가격에 매매하려는 사람들이 크게 북적이게 되어 ‘혼란하고 정신없음‘을 대변하는 단어가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역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역사는 곧 맥락이고, 맥락 속에는 그 흐름을 만드는 권력과 대중의 역학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같은 이유로 서울의 도시사를 읽는 것은 유의미하다 할 수 있겠다. 나와 내 아이들이 발디디고 사는 땅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니까. 게다가 이 책은 서울의 곳곳에 담긴 맥락을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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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필요한 순간 - 인간은 얼마나 깊게 생각할 수 있는가
김민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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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수학은 지독한 낯섦이었다. 끝없이 쫓아다니고 아무리 끌어 안으려 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그 무엇. 조금 알게 되었다 싶다가도 결국 내가 이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걸 깨닫게 되는 불가해한 존재였다. 고등학교 시절, 다른 과목은 그럭저럭 적응이 되었지만 수학만큼은 졸업할 때까지도 ‘납득‘이 되지 않는 과목이었다. 그해 수능 수리영역이 쉽게 출제되지 않았다면 내 운명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세계적인 수학자 김민형 교수의 <수학이 필요한 순간>을 읽는다고 갑자기 수학의 원리를 깨치게 되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는다. 수학이 쉽게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다. 당연하다. 이 책은 일타강사의 수학 요령 익힘책이 아니니까. 이 책은 제목대로 다양한 학문의 발전 과정 중에서 수학이 기여한 순간을, 그리고 수학이 어떻게 그 학문의 언어로 기능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수학적으로 사고한다는 게 대체 어떤 건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어떻게 논리의 끈을 이어가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처음 수학이 발명되었을 땐 곱셈, 나눗셈은 물론이고 덧셈, 뺄셈 조차 보통의 사람에게는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지금 시점에선 이해가 잘 안 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당시의 인류에게 사칙연산은 완전히 새로운 추상적 도구였을 터였다. 수의 영역이 자연수에서 정수로, 그리고 유리수, 실수, 복소수로 확장되면서 가능한 사고의 폭과 깊이도 늘어났다. 기하와 대수, 확률은 이제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필수재가 되었다. 장마철이 되면 당장 스마트폰으로 그날의 비올 확률부터 검색하니까.

이 책은 나같이 수학에 젬병인 사람이라도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능력만 있다면 쉽게 읽을 수 있다. 김민형 교수는 수학적 논리가 일상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좋은 논리와 나쁜 논리가 있을 뿐, 수학의 논리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학문에도 응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과학에 관심이 있다면 더더욱 이 책에 재미있게 빠져들 수 있다. 수학적 사고가 과학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이만큼 알차게 보여준 책이 또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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