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역사
버나드 로 몽고메리 지음, 승영조 옮김 /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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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차 세계대전의 수많은 명장 중에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있다.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그 유명한 롬멜을 격파하고, 지상군을 총지휘하여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시켰으며, 패튼과 지독한 앙숙이었던 당대의 명장. 2차대전의 빛나는 무훈 외에도 그가 후대에 남긴 유산이 있었으니 바로 이 <전쟁의 역사>이다. 저자가 팔순이 넘은 나이에 완성한 이 책은 기원전 7000년 전 예리코에서 벌어진 전쟁부터 현대의 냉전까지 약 9천년 간의 전쟁사를 다룬다. 주요한 전쟁을 개별적으로 서술한 역사서는 많지만 이처럼 전쟁 한 가지만을 주제로 한 통사(通史)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갖는 가치는 각별하다.

9천년의 장구한 역사 만큼이나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철저히 전쟁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이를테면,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은 세계사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사건이지만, 몽고메리는 이 사건을 아예 다루지 않는다. 전쟁사적 관점에서 아즈텍 정복은 새로운 전술이나 무기가 등장하여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게 아닌, 일방적인 학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군인의 관점은 역사가의 관점과는 다르다. 전쟁에 관련된 것으로만 역사와 국가를 바라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역사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의구심을 가질 만한 대목이 종종 등장한다. 특히 우리에게 친숙한 동아시아 역사가 그렇다. 중국은 평화를 사랑한 나머지 타 민족을 침략한 적이 없는 국가인 반면, 일본인들은 비견할 바 없는 전투 민족이다. 게다가 우리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도 있는데, 일본이 391년에 한반도 남부는 물론이고 개경까지 점령했다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보다도 황당한 주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전쟁사 답게 전쟁과 무기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전국시대까지 사무라이의 주된 무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 달리 칼이 아니라 활이라는 점 등이다.

다른 역사서에서 볼 수 없는 이 책 만의 장점을 꼽자면 양차대전을 전부 겪은 명장 중의 명장이 지은 책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전쟁들을 장군의 입장에서 상세히 리뷰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만약 그 전쟁의 지휘관이었다면 어떻게 작전을 펼쳤을지를 독자에게 이야기한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너럴십 - 좁게는 지휘관의 통솔력이고 넓게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환경을 창조하는 것 - 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이러한 몽고메리의 전쟁 리뷰를 통해 지휘관의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게 된다. 아무리 탁월한 역사가라도 전쟁과 전략, 그리고 신무기의 전쟁사적 의미까지는 분석할 수 있겠지만, 실전을 수없이 겪은 노장의 관록은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경험은 특별하다.

영국 육군 원수까지 지낸 인물이라 그런지 역사 서술이 상당히 편향되어 있다는 점은 좀 불편하다. 영국이 치른 주요한 전쟁들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며(심지어 영국과 관련된 인도는 한 챕터 전체를 할애한다. 중국, 몽골, 일본을 한데 묶은 것과 동일한 분량이다.), 본인의 최대 업적인 알라메인 전투는 쓸데없이 디테일하다. 또한 근대 아시아 파트에서는 진취적인 서양에 대비되는 나약한 동양이라는 유럽의 제국주의적 정서가 은연 중에 투영되어 있어 읽기에 많이 불편했다.

전쟁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책이지만, 안타깝게도 번역의 질이 좋지 않다. 군사 전문가가 아닌 문학 평론가가 번역한 탓에 곳곳에서 잘못된 용어가 난무한다. 1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어서 그런가 뒤로 갈수록 오역과 오탈자가 급증한다. 책의 레이아웃도 문제인데, 옮긴이 주를 적기 위해 한 페이지 중 3분의 1을 비워놓아서 쓸데없이 페이지 수가 늘어났다. 덕분에 목침으로 써도 될만한 두께여서 읽는 내내 책이 뜯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우리나라 출판계의 양장본 사랑을 감안하더라도 580 페이지 가량의 원서를 1천페이지로 뻥튀기한 건 너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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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8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하철 독서가 2021-08-18 21:17   좋아요 0 | URL
손에 들고 볼 수 있는 사이즈는 아니예요. 독서대가 있어도 너무 두꺼워서 고정하기 어려울 지경이거든요.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
구시다 마고이치 지음, 심정명 옮김 / 정은문고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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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겸 문필가 우시다 마고이치는 한 잡지사 편집자의 요청으로 4년에 걸쳐 문구에 대한 짧은 수필 48편을 연재한다. 수필 한 편마다 한 가지의 문구를 다루었는데, 나중에 이 글들을 묶어 책으로 펴낸 게 1978년. 그 후 두 차례의 개정판을 내면서 글꼭지는 총 56편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 책은 당대의 거의 모든 문구류를 수록하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문구는 물론이고 요즘 세대는 처음 들어보는 문구류도 많이 들어 있는데, 이는 구시다 마고이치가 1915년 생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렸을 때나 써본 주머니칼이나 스크랩북 같은,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로 박제되어 버린 것들. 이 책은 구시다 마고이치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수필이기 때문에, 그가 써보지 않은 비교적 최신의 문구류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형광펜이나 수성펜 같은 것들 말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저자는 문구의 전문가가 아니다.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지라 항상 접하는 문구에 애착과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이 소박한 옛날 사람의 검소하기 그지 없는 문구 생활을 읽고 있으면 내 어릴 적 90년대가 아련히 떠오른다. 비단 문구류만이 아닌, 내 과거의 기억에 살아 있지만 잊혀져 있던 물건들이. 중고등학생 때 한참 게임과 유틸리티들을 수집할 때 쓰던 거대하고 투박한 5.25인치 플로피디스크 보관함이라던가, 매일 새벽마다 굿모닝 팝스를 녹음하던 카세트 테이프라던가, 띠디디디띠디~ 취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온라인 세상으로 내밀하게 나를 안내하던 2400bps 모뎀이라던가…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거기까지다. 독자들의 개인적인 체험을 소환하는 매개체로서 훌륭하게 기능하지만, 아무래도 연식이 있다보니 지금 읽기에는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요즘 누가 압지나 아일릿펀치를 사용하겠는가. 또한 저자가 어려웠던 젊은 시절에 문구류를 극도로 아끼려고 궁리했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 절약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시대여서가 아니라, 절약하는 방법과 그 묘사가 지극히 일본적인 정서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가 말하는 어려운 시절이 바로 태평양전쟁이라는 점은 불편함을 넘어 냉소마저 짓게 한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가느다란 금테 안경을 쓰고 하얀 반팔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백발의 깡마른 노학자가 떠오른다. 왠지 학생들에게 연필 아껴쓰라고 싫지 않은 잔소리를 할 것만 같은, 그러면서도 마음에 쏙 드는 문구를 발견하면 소년처럼 기뻐하는 그런 이미지의 저자가 남긴 이 글엔 제목 그대로 문구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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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 사랑과 전쟁과 천재성에 관한 DNA 이야기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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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빌 브라이슨, <감각의 박물학>의 다이앤 애커먼, <E=mc2>의 데이비드 보더니스.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교양으로서의 과학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이다. 이제 이 명단에 새로이 샘 킨을 추가하고 싶다.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는 샘 킨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작품이다.

샘 킨은 앞의 세 작가에 비해 좀 더 전문적으로 과학을 파고든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에서 다루는 주제는 바로 DNA. DNA가 어떤 연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지, 장구한 진화의 역사 속에서 DNA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DNA를 통해 인간과 다른 생물들 간의 근연성을 찾고, 현재와 미래의 유전학이 어떤 양상을 띄게 될지를 고찰한다. 멘델의 유전학과 다윈의 진화론이 충돌하고,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후성유전학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난다. DNA 연구의 역사를 이루는 수많은 에피소드들 또한 흥미롭다. 2차대전 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핵폭탄에 두 번 피폭된 불운한 야마구치 쓰토무, 북동항로 개척에 나섰다 북극곰을 잡아먹고 비타민 A 과다로 죽을뻔한 빌럼 바렌츠, 노아의 방주에 탔던 거의 모든 동물을 먹어 본 성서지질학자 윌리엄 버클랜드, 고양이 기생충인 톡소포자충의 조종을 받아 한 집에서 고양이를 700마리 가까이 키웠던 라이트 부부, 인간과 침팬지의 혼종인 ‘휴먼지’를 만들려 했던 소련의 과학자 이바노프, 거듭된 근친혼으로 인해 심각한 유전질환을 갖고 태어난 불운한 귀족 화가 로트레크,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둘러싼 크레이그 벤터와 컨소시엄의 치열한 경쟁과 알력 등등.

소소한 에피소드로 시작해 DNA에 대한 연구와 지식으로 독자를 깊숙이 끌고가는 글솜씨가 참으로 우아하고 탁월하다. 그런만큼 이 책을 읽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유전학적, 진화론적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확실히 빌 브라이슨의 저서들처럼 술술 읽히진 않지만, 생물학에 대한 소양이 조금 있다면 꽤 재미있는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이 책의 제목인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는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유전 질환에 대한 이야기다. 파가니니는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초절기교의 곡들을 연주하여 작곡가가 아닌 연주자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이 악마의 재능은 바로 손가락, 특히 엄지손가락을 놀라울만큼 유연하게 만들어준 엘러스-단로스 증후군이라는 유전질환 때문이었다. 이 병은 그에게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불멸의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허약한 호흡기와 피부와 관절을 갖게 했다. 30대부터 병마에 시달리던 그는 수은 성분이 든 약에 의존했고, 결국 이 약은 그를 이른 죽음으로 이끌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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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6 열린책들 세계문학 141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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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지만 전부 다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는 대표적인 고전 중 하나인 <천일야화>. 페르시아 왕 샤리아는 왕비의 부정으로 인해 여성을 혐오하게 되고, 매일매일 처녀와 밤을 함께 하고 다음 날 처형시키는 만행을 거듭한다. 백성들의 슬픔과 원성이 하늘을 찌르던 어느 날, 대재상의 딸 셰에라자드는 자청하여 왕의 침전에 든다. 셰에라자드는 다음 날 새벽이 되기 전 왕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었던 왕은 셰에라자드의 처형을 매번 연기한다. 이러한 <천일야화>의 기본 틀은 다들 알고 있으리라.

<천일야화>의 매력은 물론 환상적이고 기기묘묘한 이야기 자체에서 나온다. 램프의 지니, 거대한 새 로크, 눈이 휘둥그래지는 마법과 변신, 기이한 운명의 장난… 이런 소재들이 이슬람 특유의 아우라와 결합하여 신비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천일야화>의 이야기 구조 역시 이 책의 매혹적인 분위기에 큰 몫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화자는 셰에라자드만이 아니다. 셰에라자드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이야기 속의 인물들도, 또 그 속의 인물들도….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열어도 열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이러한 구조는 읽는 이로 하여금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 구조는 4권에서 갑자기 모습을 감춘다(<천일야화>는 총 6권이다). 셰에라자드가 매번 절묘한 지점에서 이야기를 끊어서 샤리아 왕과 독자의 애를 타게 했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는 끊김없이 이야기가 계속된다. 역자인 앙투안 갈랑—<천일야화>는 프랑스의 동양학자이던 앙투안 갈랑이 중동 지방의 이야기를 집대성하여 번역한 책이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셰에라자드의 등장을 생략했다고 밝히지만, 이때부터 이야기가 묘하게 밋밋해진다. 여전히 재미있고 놀라운 이야기들이지만, 전반부 만큼의 신비로운 매력은 덜하다.

<천일야화>가 앙투안 갈랑의 번역서라고 하나, 상당수의 이아기들은 앙투안 갈랑의 창작인 게 많다. 대표적인 게 ‘알라딘’ 이야기인데, 여기서 우리는 당시 18세기 초반 유럽에 널리 퍼진 오리엔탈리즘을 엿볼 수 있다. ‘알라딘’의 배경은 중국이지만, 등장인물이나 배경의 묘사는 영락없는 아랍이다. 그런데 원전에 실린 판화에는 변발한 중국인들이 등장한다. 판화의 중국인들은 한결같이 실눈을 뜨고 탐욕스러운 얼굴과 풍채를 하고 있다. 거기에 재미있는 점 한 가지. ‘알라딘’에 등장하는 공주의 이름은 ‘자스민’ 공주가 아니라 ‘바드룰부두르’ 공주이다. 지금의 산타클로스가 코카콜라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 이듯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알라딘’도 디즈니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오리엔탈리즘은 ‘알라딘’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천일야화>의 이야기들 거의 전부가 이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오리엔탈리즘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윤리관과 철저한 계급 논리도 경악할 만한 수준이다. 물론 <천일야화> 집필 당시엔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다소간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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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이야기 - 라틴어 원전 번역,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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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유명 시인 오비디우스의 역작 <변신 이야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변신’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들을 집대성한 서사시이다. ‘변신’이라는 주제가 협소해 보이지만, 원체 그리스 로마 신화 자체에 변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다, 오비디우스가 모든 사건마다 변신을 끼워 넣는 바람에 본서에서는 ‘변신’이 그리스 로마 신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처럼 되어버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라크네나 피그말리온 이야기 말고도 테세우스의 모험, 헤르쿨레스의 열 두 고역, 트로이야 전쟁 같은 중요 사건들도 변신으로 마무리된다. (오비디우스가 로마 시대 인물이라 모든 인물과 지명은 로마 신화에 맞춰져 있다.)

이 책의 문학적 성취는 맥락 없이 흩어져 있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사건들을 연결하였다는 점이다. 사건 사이의 연결과 전환이 기가 막히게 매끄럽고 인물들의 행동이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치도록 설계되어 있어,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 책에서 비로소 하나의 통합된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인물들의 생생한 성격 묘사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직전에 읽은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이 지극히 단순한 동인에 의해, 말 그대로 신화적으로 움직였다면, <변신 이야기>에선 동일한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독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감정이 변화하고 이에 따라 행동한다. 이러한 핍진성의 발현이 신화의 세계관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낸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신들의 어긋난 도덕 관념과 인간에 대한 억울한 징벌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또한 오비디우스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신화와 역사를 교묘하게 연결하는 재주를 부린다. 당대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어떤 영웅보다도 위대한, 윱피테르에 비견되는 신격화된 인물로 숭상하는묘사는 참으로 낯간지럽다. 하지만 이런 노골적인 아첨도 효과가 없었는지, 오비디우스는 알 수 없는 연유로 아우구스투스에게 미움을 사 외딴 변방에 유배되어 쓸쓸하고 비참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지금까지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서적 중 이보다 재미있는 책은 찾기 힘들 것 같다. 물론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내 마음 속 원픽은 바로 이 책, <변신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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