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문방구
구시다 마고이치 지음, 심정명 옮김 / 정은문고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철학자 겸 문필가 우시다 마고이치는 한 잡지사 편집자의 요청으로 4년에 걸쳐 문구에 대한 짧은 수필 48편을 연재한다. 수필 한 편마다 한 가지의 문구를 다루었는데, 나중에 이 글들을 묶어 책으로 펴낸 게 1978년. 그 후 두 차례의 개정판을 내면서 글꼭지는 총 56편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 책은 당대의 거의 모든 문구류를 수록하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문구는 물론이고 요즘 세대는 처음 들어보는 문구류도 많이 들어 있는데, 이는 구시다 마고이치가 1915년 생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렸을 때나 써본 주머니칼이나 스크랩북 같은,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로 박제되어 버린 것들. 이 책은 구시다 마고이치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수필이기 때문에, 그가 써보지 않은 비교적 최신의 문구류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형광펜이나 수성펜 같은 것들 말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저자는 문구의 전문가가 아니다.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지라 항상 접하는 문구에 애착과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이 소박한 옛날 사람의 검소하기 그지 없는 문구 생활을 읽고 있으면 내 어릴 적 90년대가 아련히 떠오른다. 비단 문구류만이 아닌, 내 과거의 기억에 살아 있지만 잊혀져 있던 물건들이. 중고등학생 때 한참 게임과 유틸리티들을 수집할 때 쓰던 거대하고 투박한 5.25인치 플로피디스크 보관함이라던가, 매일 새벽마다 굿모닝 팝스를 녹음하던 카세트 테이프라던가, 띠디디디띠디~ 취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온라인 세상으로 내밀하게 나를 안내하던 2400bps 모뎀이라던가…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거기까지다. 독자들의 개인적인 체험을 소환하는 매개체로서 훌륭하게 기능하지만, 아무래도 연식이 있다보니 지금 읽기에는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요즘 누가 압지나 아일릿펀치를 사용하겠는가. 또한 저자가 어려웠던 젊은 시절에 문구류를 극도로 아끼려고 궁리했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 절약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시대여서가 아니라, 절약하는 방법과 그 묘사가 지극히 일본적인 정서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가 말하는 어려운 시절이 바로 태평양전쟁이라는 점은 불편함을 넘어 냉소마저 짓게 한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가느다란 금테 안경을 쓰고 하얀 반팔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백발의 깡마른 노학자가 떠오른다. 왠지 학생들에게 연필 아껴쓰라고 싫지 않은 잔소리를 할 것만 같은, 그러면서도 마음에 쏙 드는 문구를 발견하면 소년처럼 기뻐하는 그런 이미지의 저자가 남긴 이 글엔 제목 그대로 문구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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