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 사랑과 전쟁과 천재성에 관한 DNA 이야기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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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빌 브라이슨, <감각의 박물학>의 다이앤 애커먼, <E=mc2>의 데이비드 보더니스.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교양으로서의 과학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이다. 이제 이 명단에 새로이 샘 킨을 추가하고 싶다.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는 샘 킨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작품이다.

샘 킨은 앞의 세 작가에 비해 좀 더 전문적으로 과학을 파고든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에서 다루는 주제는 바로 DNA. DNA가 어떤 연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지, 장구한 진화의 역사 속에서 DNA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DNA를 통해 인간과 다른 생물들 간의 근연성을 찾고, 현재와 미래의 유전학이 어떤 양상을 띄게 될지를 고찰한다. 멘델의 유전학과 다윈의 진화론이 충돌하고,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후성유전학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난다. DNA 연구의 역사를 이루는 수많은 에피소드들 또한 흥미롭다. 2차대전 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핵폭탄에 두 번 피폭된 불운한 야마구치 쓰토무, 북동항로 개척에 나섰다 북극곰을 잡아먹고 비타민 A 과다로 죽을뻔한 빌럼 바렌츠, 노아의 방주에 탔던 거의 모든 동물을 먹어 본 성서지질학자 윌리엄 버클랜드, 고양이 기생충인 톡소포자충의 조종을 받아 한 집에서 고양이를 700마리 가까이 키웠던 라이트 부부, 인간과 침팬지의 혼종인 ‘휴먼지’를 만들려 했던 소련의 과학자 이바노프, 거듭된 근친혼으로 인해 심각한 유전질환을 갖고 태어난 불운한 귀족 화가 로트레크,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둘러싼 크레이그 벤터와 컨소시엄의 치열한 경쟁과 알력 등등.

소소한 에피소드로 시작해 DNA에 대한 연구와 지식으로 독자를 깊숙이 끌고가는 글솜씨가 참으로 우아하고 탁월하다. 그런만큼 이 책을 읽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유전학적, 진화론적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확실히 빌 브라이슨의 저서들처럼 술술 읽히진 않지만, 생물학에 대한 소양이 조금 있다면 꽤 재미있는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이 책의 제목인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는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유전 질환에 대한 이야기다. 파가니니는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초절기교의 곡들을 연주하여 작곡가가 아닌 연주자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이 악마의 재능은 바로 손가락, 특히 엄지손가락을 놀라울만큼 유연하게 만들어준 엘러스-단로스 증후군이라는 유전질환 때문이었다. 이 병은 그에게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불멸의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허약한 호흡기와 피부와 관절을 갖게 했다. 30대부터 병마에 시달리던 그는 수은 성분이 든 약에 의존했고, 결국 이 약은 그를 이른 죽음으로 이끌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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