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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7월
평점 :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는 <연애 소설 읽는 노인>으로 잘 알려진, 1949년 칠레에서 태어난 루이스 세풀베다의 동화 같은 소설이다. 아니 8세부터 88세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동화다.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 <생쥐의 친구가 된 고양이>에 이은 세 번째 창작동화라고 하는데 이 세 권의 동화의 제목은 우리가 흔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어긋나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느림의 대명사인 달팽이가 느닷없이 느림의 중요성을 깨닫다니?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을 읽고서 제목도 재미있었지만, 그 내용이 더욱 흥미로웠던 기억을 안고 있던 탓에 제목만으로, 그리고 저자의 이름만으로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다.
이 동화의 주인공은 느리면 느린 대로 체념하며 살던 달팽이들과는 달리 왜 자신이 그렇게 느린지 알고 싶어 한다. 더불어 다른 존재들은 가지고 있는 이름이 왜 자신들에게는 없는지 너무나 궁금해 관습처럼 모여 앉는 자리에서 질문을 던져 다른 달팽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다른 달팽이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질문이며, 저 자식만 사라지면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신이 왜 느린지 궁금한, 이름이 없는 게 신경 쓰이는 달팽이는 알기 위해 길을 떠난다. 달팽이는 워낙 아는 것이 많다는 수리부엉이에게 물어본다. 수리부엉이는 자신이 '사라져 버린 나무들에 대한 추억이 쌓이면서 몸이 너무 무거워지는 바람에 이젠 날 수 없게 되었다'며 '네가 무거운 이유도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길을 떠난 달팽이는 '기억'이라는 거북이를 만난다. 거북이는 인간과 함께 살며 기억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만, 인간들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고 말한다. 거북이는 '그렇게 빨리 하려고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라든지 '꼭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해지는 걸까?'처럼 거북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두고 보토 '반항아'라고 한다고 하며 '반항아'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반항아'는 길을 떠나 인간들이 사는 마을 근처에 다다른다. 자신의 발도 느리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둥근 다리와 금속 심장을 가진 힘이 장사인 동물을 타고 다니며, 별 없는 밤보다 더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흙보다도 더 시커먼 걸로 동물들이 살고 있는 들판을 뒤덮고 있다. 이런 위험을 알리러 달팽이는 동족들에게 부지런히 돌아온다. 달팽이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민들레 나라'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달팽이의 말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눈으로 그것을 보고도 거부반응을 보이는 달팽이들의 일부를 데리고 '반항아'는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난다.
'기억'이라는 거북이는 '만약 느리지 않았다면 둘의 만남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달팽이가 느리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것들, 우리가 놓치고 외면했던 것들을 세풀베다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담아내고 있다.
'기억은 결국 반항이다.'
잊어버리기를 바라는 거대한 음모가 있는 듯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두고두고 새겨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얼른 잊어버리라고 부추기며 '기억'하려는 자들은 다들 국가에 민족에 '반항'하는 자들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우려는 의도를 가진 이들이 있다.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려는 인간이 보지 못한 것들, 아주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잊지 말아야겠다.
어르신들의 말씀이 맞아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새로운 민들레 나라를 찾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되는지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가는 도중에 우리가 어떤 위험에 부딪힐지,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다 같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찾는 새로운 민들레 나라는 앞에 있지, 뒤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에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