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완전개정판 다빈치 art 3
J.M.G. 르 클레지오 지음, 백선희 옮김 / 다빈치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저번 독서모임에서 르 클레지오의 <조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전히 어려운 '르 클레지오'에 다시 한 번 도전(?) 해 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의 책 <프리다 칼로, 디에고 리베라>를 선택했다. 책을 읽는 중에 서로 카톡으로 나눈 말은 '도대체 르 클레지오는 어디에 있는 거야? 프리다 밖에 안 보여.'였다.

어제, 논현동에 있는 북티크에서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왜 르 클레지오가 이 책을 썼을까에 대해서는 답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모임을 마치고 마침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전>을 보았다. 그림을 보면서, 프리다의 일기를 보면서 나의 의문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듯 보였다. 그리고 다시 작가로 돌아가 본다.

"새로운 출발과 시적 모험, 관능적 환희의 작가이자, 지배적인 문명 너머와 그 아래에 있는 인간의 탐구자" - 2008년 한림원이 밝힌 노벨문학상 수여 사유 중에서


르 클레지오는 1950~60년대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 중이던 베트남과 알제에서 물러나는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다. 그는 알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의견을 좇아 징집을 거부하고 영국과 네덜란드를 돌며 방황한다. 이 시기에 그의 첫 소설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조서>를 쓴다. 그러다가 대체 복무로 방콕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또 다른 제국주의를 목격한다. 그는 미성년 매춘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그의 군 복무를 마치기 위해 멕시코로 보내졌다. 그는 거기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긴다.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평생을 프랑스를 떠나 세계 여러 곳을 떠돌며 생활한다. 위의 노벨 문학상 수여의 이유는 이렇게 얻게 된 듯하다.

그에게 멕시코, 아메리카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며, 파리는 시끄러워 '글을 쓸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느낀 파리에서의 소외와 고립감을 프리다 칼로도 똑같이 느낀다. 그래서 그는 프리다 칼로의 전기를 쓰려고 한 듯하다. 거기에 곁다리로 디에고 리베라까지. (책을 읽는 내내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분량이 상당함에도 디에고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열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프리다 칼로를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디에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조리 썩어빠진 지식인들이라 더는 견딜 수가 없어요. 나한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에요. 파리의 '예술가연하는' 저 멍청이들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톨루카 시장에 퍼질러 앉아서 토르티야를 파는 게 낫겠어요.'


르 클레지오의 <프리다 칼로,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와 디에고를 이야기하며 서로 함께 한 부분, 그리고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부분을 보여준다. 나이는 21살, 몸무게는 3배의 차이가 나던 디에고는 카리스마 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천재다. 그의 그런 자신감은 그의 사진과 그가 그린 자화상을 보는 순간 '아'하고 느낄 수 있다. 사진에서의 두꺼비같이 생긴 거대한 몸집과 생김새는 그의 자화상에서는 상당히 핸섬한 감각적인 남성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는 자신을 너무 사랑했던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인물이지 않았을까?

반면, 프리다는 그녀의 사진(우리는 이것이야말로 프리다의 '인생샷'으로 규정했다)보다 훨씬 못나게 나쁜 쪽으로 과장되게 자화상을 그렸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서로 닮은 점도 있겠지만, 태양과 달처럼, 삶과 죽음처럼, 빛과 어둠처럼 달랐다.
작가는 프리다를 '도발적인 꼿꼿함, 양보라곤 모르는 태도,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집착'을 가진 인물로, 디에고는 모델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있었으며, 성적 쾌락에 가까운 관능적 완벽성을 보인 인물로 묘사한다.
르 클레지오가 본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프리다의 말을 빌려 그는 둘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그가 살고 싶어 하는 세상이 거대한 축제라고 나는 상상한다. 모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사람부터 돌멩이까지, 태양까지, 그리고 그림자까지 참여하는 축제. 모두가 그와 더불어, 미에 대한 그의 생각과 그의 창조적 재능과 더불어 작업하는 축제. 형태와 색채와 움직임과 소리와 지능과 지식과 감동의 축제. 온 지구를 뒤덮을 지성과 사랑의 축제. 이 축제를 벌이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투쟁하고 가진 모든 것을 내놓는다.'

프리다의 그림은 불편하다. 보는 내내 섬뜩함을 느낀다. 그녀의 그림에 대해 초현실주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바로 '현실'을 그린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초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난 결코 꿈을 그리지 않았다. 나는 바로 나의 현실을 그렸다.

거기에는 프리다의 삶을 들여다봐야 한다. 어렸을 적 앓았던 소아마비로 얇고 짧아진 오른쪽 다리,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숙하려는 시기에 겪였던 사고, 디에고의 아이를 낳아 기르기를 열망했지만 계속되는 유산으로 인한 고통, 디에고의 사랑만을 바라보고 살지만 계속 한 눈 팔기를 멈추지 않는 디에고. 그녀의 그런 그림의 시작을 알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유산을 겪은 후 그린 그림이다.

유산 후 그린 그림
병원을 나와서 프리다는 참으로 개성 있는 그림의 시작을 알리는 두 점의 그림을 그린다. 일상의 사건들, 그녀의 욕망, 두려움, 가장 내밀한 감정들이 상징적이면서 현실적인 형태로 표현된 그림이다. 그중 한 그림에서 그녀는 제왕절개 수술 후 병원 침대에 누워있고, 그녀 곁에 아기가 있다. 다른 그림에는 피 웅덩이 속에 벌거벗은 채 누운 그녀가 있고, 침대 위로 악몽의 상징들처럼 강박적인 이미지들이 떠 있다. 부서진 골반뼈, 외과 기구들과 비데, 난초 꽃 한 송이, 괴기스런 달팽이 한 마리, 기묘한 깃발, 세 달 된 태아.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도판이 실린 의학사전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병원 침대에는 숙명적인 날짜가 새겨져 있다. 1932년 7월.

그녀가 의학사전을 가져오라고 한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 바로 알기, 그리고 세상 알기. 그런 면에서 프리다의 그림은 바로 '현실' 그 자체였을 것이다.

1934년 동생 크리스티나의 고백으로 알게 된 디에고의 배신으로 프리다는 모든 걸 잃었다. 그동안 그녀는 그녀가 쓰고 있던 가면을 깨뜨리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건으로 둘은 이혼을 하게 된다.  이 결별은 가면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그녀가 가면을 깨뜨리고 돌아가고자 한 곳을 르 클레지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의 현실은 기억을 태우는 온갖 고통들, 현실의 상처들, 걸인들과 겁에 질린 아이들의 눈길, 마치 성전에 둘러싸인 듯 부유한 집들 한가운데서 번쩍이는 황금,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조롱당한 혁명에 참여했던 떠돌이 군인들, 일상의 느린 잔혹함, 무거운 짐 아래 허리가 굽은 여인들, 여인들의 억센 손, 아득한 시간에 닳아버린 보석 같은, 희망 없고 기약 없는 삶에 씻겨버린 여인들의 눈길.

그렇지만 디에고에게 다시 돌아온 프리다, 그녀에게 과연 디에고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여전히 사랑이었을까?
그러나 '벌어진 상처의 기억'이 남아 있다. 그 기억은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끔찍한 흉터들과 같다.

그녀의 그림 "몇개의 작은 상처" 혹은 "단지 몇 번 찔렸을 뿐"이다. 이 그림처럼 디에고가 남긴 상처를 그녀는 평생 안고 산다. 책에서 볼 때는 많은 그림 중에 하나였는데, 미술관에서 직접 보니 가장 아픈 그림이다. 디에고의 칼에 찔려 흘린 피는 그녀의 몸에 침대의 흰 시트에 그리고 바닥에만 있지 않다. 그림의 프레임에까지 붉게 묻어 있다. 그녀의 아픔은 그렇게 그림을 뚫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그림과 삶에서 멕시코 인디오의 정신과 세계관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하여 다음 기회로 미룬다. 나중에 알아볼 것들은 테우아칸 여자, 아즈텍의 음양사상, 이원론적 세계관이 될 것이다.

그녀는 죽기 얼마 전 썩어가는 다리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는다. 그때 그녀가 남긴 말은 그녀의 고통을 넘는 놀라운 힘을 느끼게 한다.

발 무엇을 위해 그것을 원하지?
나에게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데.


그리고 죽기 전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에 남긴 말.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지만 침묵하기를 요구하는 말이다.

행복한 외출이 되길,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희망한다.

앙드레 브르통은 프리다 칼로를 이렇게 말한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리본 두른 폭탄이다.

프리다에게 예술은 무엇이었을까?

소통수단도 아니고 상징체계도 아니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그녀 자신이 되고, 존재하고, 감정과 육신의 파멸을 딛고 살아남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사실, 예술이 그녀의 전부였고, 바로 그래서 그녀는 예술의 자유를 제한하고 의미를 변질시키는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떤 타협도 말이다. 그녀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후견을 거부했고, 마찬가지로 끝까지 자신의 예술을 위해 정치적 해석과 손쉬운 목적을 거부한다.

르 클레지오는 디에고와 프리다의 삶을 그려내면서 그가 찾던 지배되지 않는 인간, 혁명의 환희를 아는 인간, 그리고 무수한 억압과 고통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인간을 말하고 있었다.

디에고와 프리다의 사랑의 관계는 멕시코 자체와 닮았다. 땅과 계절의 흐름과, 대비되는 기후와 문화를 닮았다. 그것은 고통과 잔인함으로 이루어진 관계이지만 절대적 필연으로 이루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프리다는 고대 멕시코였다. 조상의 가면을 쓰고서 느린 종교적 춤을 추며 인간들 사이에 내려온 대지의 여신이고, 산맥처럼 강인한 품에 아이를 안고서 천상의 수액인 젖을 먹이는 거대한 인디오 여인이었다. 그녀는 시장에서 돌절구 위로 몸을 숙인 여인들, 부유한 동네를 떠돌며 저택의 개들을 짖게 만드는 흙짐 진 여인들의 말 없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아이들의 외롭고 겁에 질린 눈길이고, 산모의 피 묻은 몸이었으며, 비벤다스 뜰에 웅크린 채 영원한 고독에서 끌어내 저주의 주문을 읊조리는 백발 마녀의 형체였다. 그녀는 인디오의 창조적 정신이었다. 서양 세계에서 무엇도 빌려오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살점을 뜯어내듯, 신화를 피를 머금고 지칠 줄 모르는 기억의 파도에 실려 일렁이는, 매우 오래된 의식의 편린들을 길어내는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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