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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앙드레 모루아 지음, 신용석 옮김 / 김영사 / 2016년 6월
평점 :
얼마 전 아들이 다녀왔던 파리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연락이 왔다. 초대하겠다고. 갑자기 파리를 다녀올 수 있겠다는 꿈이 생겼다. 그러나 현실은 마치 땅에 뿌리를 박고 떠나지 못하는 나무 같은 신세다. 하지만 그런 현실을 잊고 꿈이라도 꾸어볼 수 있는 '독서'라는 여행을 떠난다. 그것도 800페이지가 넘는 거의 무기와 같은 책,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다.
독서모임에서 서양사를 한 번 훑어보았다. 전체를 보다 보니 각 나라의 역사도 또한 궁금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스페인과 터키가. 아마 이번에 읽은 <프랑스사>는 그렇게 유럽의 각 나라로 떠나는 작은 독서여행의 시작이 될 듯싶다.
역사 책은 소설책보다도 작가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이 작가의 눈을 통해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보는 것처럼, 역사는 역사가의 눈을 통해 역사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가 쓴 책이냐에 따라 역사의 서술은 그 방향이 다르다.
우선 앙드레 모루아는 들어는 봤는데, 잘 알지는 못하는 그런 작가였다. 나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의 조각을 훔치다 딱 걸린 문화부 장관의 이름과 헷갈렸다. 앙드레 말로. 앙드레 모루아를 검색해보니 그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이름마저 비슷한 그리고 둘 다 작가로서 유명했던 분들이다.
작가 앙드레 모루아(1885~1967)는 철학박사와 전기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전기작가로 <셸리의 일생>, <바이런>, <마르셀 프루스트를 찾아서>, <발자크> 등을 썼다. 그리고 1937년 <영국사> 1943년 <미국사>를 썼다. 하지만 프랑스인으로서 객관적 서술에 부담을 느낀 그는 <프랑스사>를 쓰기를 거부하고 있었지만, 1947년 <프랑스사>를 쓴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연합국 사령부의 연락장교를 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으로 망명을 한 적이 있다.
왜 미국으로 망명을 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어서 가장 궁금한 점은 해결을 하지 못하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선 이 책은 우리가 많이 알던 역사 책과는 다르다. 딱딱하게 서술된 책이 아니라 상당히 말랑말랑하다. 수많은 경구 메이커인 작가답게 역사적 인물들이 남긴 말은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마치 소설 같은 느낌의 역사 서술이라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기에 전혀 부담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사>는 프랑스 국민의 역사라고 말한다. 물론 프랑스 인종이 존재했던 적은 없다. 지금 프랑스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리구리아인, 이베리아인, 켈트인, 로마인 등 수많은 인종의 혈액이 혼합되어 흐르고 있다.
그가 주로 프랑스사로 쓰고 있는 부분은 중세부터이다. 프랑크 제국을 프랑스라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한 시작으로 보는 듯하다.
그가 프랑스사를 쓰면서 우려한 대로 '객관적 서술'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들은 자주 등장한다. 특히 십자군 전쟁에 대한 해석과 아비뇽유수가 그랬다. 또한 재미있었던 부분은 문예부흥에 대한 그의 시각이다. 그는 이탈리아 문예부흥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악행에 주목하단. 그들의 몰염치와 허무주의가 유럽 악덕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또한 프랑스혁명을 쓰면서 곳곳에서 프랑스 정신의 위대함을 예찬한다.
이 부분은 십자군 전쟁을 서술하는 부분이다. 앙드레 모루아는 십자군 전쟁의 이점을 서술한다.
두 문명의 접촉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었는데, 특히 새삼스레 독창성을 인식한 서유럽 정신은 새로운 활력을 흡수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그리스 사상의 황금시대와 부합한 것처럼 십자군도 유럽의 부흥과 때를 같이 했다. 3세기 동안 십자군은 뜻하지 않게 상업과 해운의 세계적 중심지를 결정했다. 십자군의 출발 장소가 된 마르세유, 제노바, 베네치아는 대도시로 발전했고 순례자를 위한 여관이 수없이 들어섰다.
십자군이 프랑스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은 봉건 제후와 영주들의 희생으로 왕정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영주들은 성지 출정으로 거의 파산했고 또한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이렇듯 기사 계급이 몰락하며서 국왕뿐 아니라 도시의 주민도 여러 혜택을 받았다.
십자군 전쟁을 밖에서 보면 전혀 다른 점이 보인다.
우르비누스의 연설과 달리 성지를 '능욕'한 것은 오히려 그들이었다. 5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에 들어간 그들은 성지 정화라는 명목으로 현지 주민들을 대량 살육했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은 문명사적으로 서양 문명이 동양 문명, 적어도 서남아시아 문명을 앞서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 직접적인 결과는 동부 지중해가 서유럽 세계의 손안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아비뇽 유수에 대한 남경태의 <종횡무진 서양사>의 서술이다. 아비뇽유수는 교황의 납치로 보았는데, 앙드레 모루아의 책에서는 '납치'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고, 스스로 아비뇽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게 서술되어있다.
그 서술의 마지막에 가서야 '바빌론의 포로 생활'이란 말을 썼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쓸 때에도 우리에게 불리해 보이는 부분은 약하게, 부드럽게 우리에게 강해 보이는 부분은 특히 강조해서 쓰게 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역사가라면 냉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러면서도 역사가 이전에 어쩔 수 없이 프랑스인이었던 작가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