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성서의 이해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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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도 역사가 있는가? 성경은 신의 말씀을 받아쓴 것인데 신의 말에도 역사가 있을 수 있는가? 이책은 그런 생각 때문에 기독교가 욕을 먹는다는 입장이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기독교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독선적이다 오만하다 심하면 미치광이들. 이런 말로 요약될 것이다.

얼마 전 결혼정보회사의 조사를 보면 그런 인식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잇다.

“'배우자 조건 중 특별한 기피사항은 무엇인가?(기본적인 조건 외)'라는 질문에 남성 41%와 여성 50%가 '특정 종교'라고 답했다.

뒤를 이어 여성의 경우 '부모님 또는 본인 연고지'(21%), '자취의 유무(부모님과 동거)'(18%), '특정 혈액형'(10%), '기타'(1%)의 순으로 답하였다. 기타 답변에는 '머리 숱의 많고 적음', '특정지역 유학 경험 유무' 등이 있었다.

남성의 경우 '자취의 유무(부모님과 동거)'(32%), '부모님 또는 본인 연고지'(16%), '특정 혈액형'(9%), '기타'(2%)의 순으로 답했다.”

‘특정종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뻔하다. 그리고 그 이유도 뻔하다. 교만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은가? 중세 기독교에서 지옥에 갈 7대 죄악으로 으뜸을 교만으로 꼽았다. 교만한 자는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든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없다면 믿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산상수훈’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 하는 말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믿음 자체가 ‘기적’이라 말한다. “기적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활동이다. 나의 한계를 절망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께서 직접 나에게 자유롭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을 때만이 기적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결국 나의 주체적 삶의 신앙의 표현이다. 그것은 나의 일상성을 지배하는 자연적 인과에 대한 신념의 포기마저도 야기할 수 있는 ‘가까움’이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나의 모든 아집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럼 그 교만한 자들의 믿음은 뭐란 말인가? 저자는 무지의 믿음이라 말한다.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는 자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바른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기독교에 관한 한 믿음의 근거는 성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성서라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다는 것조차 모르기에 그 믿음은 교만해진다는 것이다. 이책의 내용은 별 것이 아니다. 신학대 학부과정에서 다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기초지식 조차 없기에 ‘개독교’란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모든 책이 그렇듯이 성서 역시 책일 수 밖에 없고 책인 이상 오자, 탈자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필사 과정에서의 실수 또는 의도적인 변형, 전승 계통의 차이에서 오는 판본의 문제, 번역의 오류 등 셀 수 없는 오류에 노출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번역의 오류로 널리 알려진 경우를 보자.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근거로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라는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복음서에 인용된다. 그러나 이 인용은 그리스어 구약에서 인용한 것이며 그 인용구의 히브리 원문은 처녀가 젊은 여자였다. 복음서 저자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히브리어 원문을 몰랐던 것이다.

저자는 동정녀 잉태설은 문헌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복음서 기자의 픽션일 뿐이라 말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검토하면서 저자는 그런 예를 몇가지 더 든다. 동정녀 잉태설과 같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저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억지로 끼워진 그런 픽션을 당시 예루살렘이 말살되고 디아스포라가 되어야 햇던 유대인들의 처지에서 이유를 찾는다.

“그런데 성서는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사실에 접근하기는커녕 점점 그 본질로부터 멀어져만 간다는 것이다. 성서를 이렇게 한 줄 한 줄 분석해들어가면 사실과 부합하는 것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사가 별로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분석방법이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가? 과연 가능할까? 이러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복음서의 기자들에게 사실의 기록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기쁜 소식을 복음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선포할 수 있을까? 그들은 복음의 역사를 말하려는 것이지 인간의 역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그랫듯이 성서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이상이 이책의 주된 내용이다. 저자는 바울에서 요한까지 초기 기독교가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외에도 밀라노 칙령을 전후하여 정경이 어떻게 선정되었고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된 교회정치적 논리, 라틴어 번역의 성립과정, 구약의 번역과정, 판본의 문제, 외전의 의미 등을 지적하고 있지만 주 내용은 신약의 주 텍스트가 어떻게 성립되었고 어떤 해석학적 틀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이책의 주 목적이다.

저자는 복음서를 문학으로 다룬다. 효과를 기대하고 쓰여진 문학으로서 문학적 진실을 갖는다는 것이다.

“김소희 선생의 청아한 진양의 소리가 너무도 구슬프게 울려퍼질 때 나 어린 도올은 매번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뻔히 아는 이야기일지라도 심청의 죽음은 나 어린 도올의 통곡을 자아내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렇게 ‘믿는’ 자에게 그만큼 감동은 크다. 그리고 그녀가 연꽃에서 부활했을 때 그리고 가까스로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그 얼마나 기뻤던가? 이것이 ‘기쁜 소식(복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헬라세계에서 유앙겔리온(복음)이란 단어가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곳은 전승의 소식장면이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케리그마의 핵심은 예수의 드라마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이다. 예수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케리그마의 어떠한 양식을 통하여 어떠한 드라마적 배열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든지간에 그 말씀의 진실성은 확보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최종적 소통이다. 그 말씀을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여러자기 내러티브나 드라마적 장치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게 되면 우리는 케리그마의 핵심을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

저자는 복음서와 판소리를 비교하면서 복음서의 ‘진실’은 판소리의 진실과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공관복음에서 마가복음이 처음 나온다. 마가복음 이전에는 바울의 서신들이 널리 읽혔다. 그러나 바울의 예수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법신(진리)이지 색신(역사적 예수)가 아니었다. “바울의 지평에서 예수는 매우 추상적이었다. 그는 근원적으로 역사적 예수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부활한 예수의 의미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성령의 계시를 통해 직접 해후했을 뿐이다. 그의 관심은 지상에 살았던 예수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져준 은혜와 믿음과 사랑과 정의의 예수였다. 따라서 그의 예수는 매우 추상적인 예수였다.”

저자는 복음서가 바울의 예수관에 대한 반동이었다고 말한다. “바울의 예수가 법신적 예수였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색신적 예수였다.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논술했다고 한다면 마가는 나사렛 예수의 삶을 기록했다. 여기에 최초의 복음서라는 문학장르의 탄생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기적과 영광과 권세의 수퍼 히어로, 신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마가는 그러한 교인들에게 완전히 다른 복음의 드라마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가의 예수는 힘이 없었고 연약했으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권면했으며 수난 속에 죽어갔다. 이러한 십자가를 통해 그는 역설적으로 그이 케리그마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수난극이었다.’

저자는 여기서 복음서와 판소리는 진실만이 아니라 그 형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당시 교회에서 바울의 서한이나 복음서는 읽히는 것이 아니라 낭송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와 같은 내용의 복음서를 낭송하는 것은 판소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마가복음은 빅 히트였다. 그 감동은 여기저기 교회마다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낭송자는 유랑극단처럼 여기저기로 순회공연을 다녓다. 70년에서 100년 사이는 유앙겔리온의 전성시대였다. 그리고 복음과 동시에 기독교가 놀라웁게 팽창했다.”

“예수의 말씀이라고 전승되어온 파편이나 다양한 목격담, 그리고 사도들의 편지가 케릭스(낭송자)에 의해 낭송되는 것이 그들의 예배엿다. 낭송문화는 반드시 운이 들어가고 인토네이션의 리듬이 들어가고 때로는 노래가 삽입되기도 한다. 그것은 거의 ‘판소리’라는 장르와 유사한 것이다. 낭송이 끝나면 성찬이 베풀어진다. 성찬이라는 것도 요즘처럼 쬐끔쬐금 상징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 먹고 마시는 것이다. 끼니를 때우는 것이ㅏㄷ. 예수에게는 금욕주의라는 것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음악성 있는 메시지와 음식문화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 때문에 초기교회에는 사람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매우 새로운 문화였다.”

그리고 그 문화를 완성한 것이 요한복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희랍의 신들은 술이나 처먹고 근친상간이나 강간, 질투와 음모와 살상을 일삼는 아주 퇴폐적인 존재들이었으며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나 상기시킬까, 전혀 인간의 구원과는 무관한 존재들이엇다.

희랍인들에게 인간의 구원을 말하는 유일신 신앙은 참으로 신선하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만나온 신들은 전혀 도덕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가 선포하는 복음 속의 하나님은 강렬하게 도덕적이었고 매우 체계적인 구원의 논리를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마태, 누가 복음의 수준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의 교양인들에게는 그런 이야기전승으로는 ‘그들의 지적, 종교적, 예술저그 문화적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요한복음은 짙은 철학적 사색을 도배질하면서도 기실 공관복음서가 노리고 있는 모든 케리그마적 성격을 더 드라마틱하고 더 선명하고 더 실존적으로 듣는 이의 가슴에 와닿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위대성이다. 사실 오늘 우리가 알고있는 기독교는 요한복음 기독교라 해도 과히 어긋나는 말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해석의 지평에는 (교리사에서 말하는 가현론이 아닌 헬레니즘 문화의 종합으로서) 영지주의라는 우주론이 깔려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철저히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이해하고 그러한 어휘로써 새로운 복음의 해석의 지평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ㅜ역설적으로 기독교는 험난한 2,3세기를 살아남을 수ㅜ 있었다. 바울이야말로 기독교를 헬라화시킨 장본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헬라세계에서 기독교의 지속성을 보장한 것은 요한의 해석의 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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