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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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의 늙은 사진은, 솔직히 내게 호감을 주진 못한다. 나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낀다. 1975년의 사진을 실었다면, 이 책을 썼을 당시 그의 어떤 면모을 엿볼 수 있을 터인데, 이 사진은 늙은 작가의 쉽지 않은 성격을 짐작하게는 하지만, 여전히 젊은 그의 모습에 대한 그리움을 상쇄하진 못한다.

생각의 흐름은 늘 제멋대로다. 그것에 일정한 방향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 뇌가 정교한 계획에 의해 진화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관성이며, 새로운 진화를 위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던 체계를 땜질해 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맞는 걸까?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 또한 인간 개개인마다 다르다. 만약 진화가 직선방향의 진보라면, 인간에게 과거의 실수는 되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보라!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는 과거의 어떤 때의 그것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는 진보는 차치하고라도 겨우 제자리걸음을 할 수 있기라도 하다면,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다.

장담하건대 인간은 과거의 잘못을 일부 수정할 수는 있을 지언정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우울하다. 나는 가끔 정의라고 하는 것이, 허무맹랑한 위선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책 속에서나 정의를 살리고 정의를 수호하고 정의가 이기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머리 속에서만이 가능한 것이 정의라면,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또한 우울함을 더한다.

카타리나 블룸은 명예를 잃었다. 그보다 더 나쁠 것이 없는 모욕적인 방식에 의해서였다. 꽤 괜찮은 스물 예닐곱의 여성이 검찰이 오랫동안 고군분투하며 검거에 나선 강력범죄혐의자의 도주를 도운 애인이며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내로라하는 결혼한 남자의 정부였다는 평판만큼 치명적인 모욕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녀 한 개인의 명예감을 훼손한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들이 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던 평판까지  현저히 훼손시킨 것이라면? 이미 이것은 일개인을 뛰어넘는 일이며, 사회적 의미를 띨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명예훼손의 주체가 수만 수백의 독자를 가진 신문사에 의해서라면 말이다.

그렇다. 카타리나 블룸은, 이제 추락한 자신의 명예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더 큰 적들과 대면해야 한다. 그것은 전쟁이다. 이웃으로부터의 업신여김과 손가락질뿐 아니라 매일 아침 신문을 펼쳐볼 수만 수백만의 독자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정점에는 사람들의 은밀한 관음증과 호기심을 부추기는 주관적 판단 유포자로서의 신문사가 있다.

1970년 대 독일은 분단국이었고, 그녀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혐오증을 가진 사람들과 동시대인이었다. 그녀에 대해 사람들은 자기식대로 기억하고 말하고, 여기에 취재기자(혹은 신문사)의 일방적인 판단이 더해져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자극적인 기사들이 연일 보도된다. 기사라는 형식을 쓰고 무방비의 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언어적 폭력의 결말은?

하인리히 뵐은 이 작품을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걸기 방식으로 쓴 것이라고 하였다.  마치 보고서를 쓰듯 검찰 조서를 출처로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부제로 붙은 "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가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30년 전의 독일 사회와 현재의 우리를 비교한다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문득 이 범상치 않은 소설을 늦게라도 알게 된 기쁨에 앞서, 우리 사회의 언론 환경은 과연 어떤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지난 여름,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이미 국가권력보다 더한 힘을 가졌다는 몇몇 언론사들의 펜에 의해 추락한 힘없는 개인들의 명예감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과연 그것은 어떤 결말을 가져올 것인가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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