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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왜라니요? 어린애한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꽃한테 왜 피었냐고, 태양에게 왜 빛나고 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을 사랑에 대한 신념처럼 가슴 속에 수줍게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도 괜스레 심장이 쿵쾅거리고 금기의 언어인양 부끄러워하며 숨기던 시절이라 책에 옷을 입혀 제목을 숨기고 가슴 떨리며 반복해 읽곤 했었다. 그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돌아왔다. 지크프리트 렌츠의 소설 <침묵의 시간>을 읽으며 자연스레 마음이 그 시절로 흘러들어갔다. 독일 유수의 문학상을 두루 수상한 노작가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 쓴 소설이라는 사전 정보가 없었더라면 풋풋한 사랑의 감정이 아직 생생한 젊은 작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성년으로 막 접어든 나이의 감성을 수줍은 듯 생생하게 전하는 목소리가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죄다 순수했던 그 시절로 휘감아 떠미는 매력을 지녔다.


지나가버린 사랑의 기억 위로 묵직한 시간들이 쌓인다. 세월의 퇴적층 아래 설렘의 순간, 두근거림, 애달픈 그리움, 끝나버린 사랑에 곧 죽을 것 같은 사랑의 고통마저 조용히 잠들어 있다. 고통은 희석되고 추억은 기이하리만큼 미화되는 게 지나간 사랑에 작용하는 시간의 힘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추억의 이미지들이 가끔씩 불쑥거리며 튀어나올 때면 그렇게 영원히 봉인되어 버릴 거라던 믿음이 헛된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무수한 사람들 머리 위로 안개꽃 한 무더기가 둥둥 떠서 내게로 온다. 배경이 되는 계절도 기억나지 않고, 꽃을 든 사람의 차림새도 기억나지 않고 그저 광장의 인파속에서 공중에 둥둥 뜬 채로 내게로 오던 안개꽃 한 무더기. 나에게 첫사랑은 내게로 둥둥 떠오던 안개꽃 한 무더기다. 나에게 안개꽃은 안타까움과 설렘의 다른 이름이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나는 사랑은 운명이라 믿는다. 눈앞에서 카메라 후레쉬가 터진 후 찾아오는 찰나의 현기증처럼 사랑은 그 사람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멍하게 만들어 버린다. 고등학교 영어교사 슈텔라 선생님과 졸업반 학생 크리스티안의 사랑, 어떤 불륜 막장 드라마 소재보다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금단의 사랑. 어느 여름날 해변 축제에서 시작된 사랑은 절정에 치닫기도 전에 어이없는 사고로 황급히 끝나버렸다. 슈텔라 선생님은 떠났고 크리스티안은 영원히 침묵할 수밖에 없는 선생님과의 추억 속에 영영 갇혀버렸다. ‘침묵의 시간을 이겨내거나, 아니면 아무 일없이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것’이 크리스티안에게 남겨진 유일하고 고통스런 축복인 셈이다. 크리스티안은 침묵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겠지만 선생님과의 사랑은 ‘젊음의 영원한 비극인 동시에 상실의 아픔을 보듬는 크나큰 위안’이 되리라 믿는다. 


슈텔라 선생님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추모식에 참석한 크리스티안이 치러야했던 황망한 이별에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슬픔이 눈물로 줄줄 흘러내리지 않고 가슴 안에 가둬두고 내 안의 추억의 소회들과 온통 뒤섞여서 마음을 저릿하게 만드는 노작가의 절제되고 섬세한 문장에 찬사를 보낸다. 바다 밑에서 캐낸 표석 위에 흔적을 남겨둔 생물의 화석처럼, 호박 속에 영원히 갇혀버린 딱정벌레와 모기처럼 노작가의 젊은 시절 언저리에서 애틋한 사랑의 화석 하나를 건져 올린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베이고 잘려나간 상처보다 훨씬 오래도록 아픈 상처지만 훈장처럼 이런 상처 하나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어딘가 인간적인 향기가 난다.

    

<독일인의 사랑>은 나에게 첫사랑의 기억이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 순수함의 상징과도 같은 책이다. <침묵의 시간> 또한 그런 독자를 만나 오래도록 사랑받기를 바란다. 평소 즐겨 읽는 사계절 청소년 도서 ‘1318 문고’ 리스트에서 이 책을 만난 반가운 이유다. 일회적이고 수두룩한 조건들이 줄줄이 따라붙는 계산적인 사랑이 전부가 아님을, 매 순간 설레고 매 순간 눈부시길 이제 막 사랑의 감정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젊은 영혼에게 기원한다.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갈 포트키(미리 정한 시간에 마법사들을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는데 사용하는 물체/해리포터 참조) 하나쯤 청춘의 증거처럼 지니고 살면 좋겠다는 바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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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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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이 작가, 참 묘하다.

그가 내놓은 책 <바람의 그림자>는 에드거 앨런 포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거기에 스티븐 킹을 뒤섞어 평가를 받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이 심심찮게 거론된다. 이 정도면 초호화 작가군단이 아닌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장미의 이름>과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 한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이 이야기의 플롯이 비슷하다는 점과 <장미의 이름>에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가 있다면 <바람의 그림자>에는 페르민과 다니엘 콤비가 추리기법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되고 있으리라. 또 희귀본을 취급하는 고서점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브루클린 풍자극>을 비교하는 것일 테지만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 라인과 치밀한 구성과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구조를 비롯해서 독자를 책속으로 끌어들이는 흡입력 면에서도 폴 오스터와 비교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작품으로만 작가를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니 좀 더 지켜보려 한다.


저주받은 책들의 이야기, 그걸 쓴 사람의 이야기, 소설을 불태우기 위해서 소설 바깥으로 나온 인물의 이야기, 그리고 배신과 실종된 우정의 이야기야. 사랑의 이야기이고 증오의 이야기이며 바람의 그림자에 살고 있는 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1권 285~286쪽)


친절하게도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를 해주는 작가. 그렇다, 2권 합쳐 800쪽 정도 분량의 이 책은 바로 이런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로맨스 소설이면서 추리소설의 미스테리한 분위기가 깔리고 성장소설의 냄새도 풍기고 스페인 내전 또한 중요한 배경이 되니 전쟁과 역사 또한 무시하지 못할 주요 요소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 가지 맛이 혼합돼서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괴상한 맛이 나는 소설일 것 같지만 작가의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각각의 맛을 제대로 적당하게 혼합하여 아주 맛깔스런 작품을 내놓았다. 어찌 보면 한 권의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많이 쏟아낸, 욕심을 잔뜩 부린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작품답게 세심함과 꼼꼼함이 돋보인다. 예를 들자면, 스치듯 지나칠 법도 한 인물들에게도 특유의 색깔을 입혀주는 탁월한 글솜씨와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작가다.


<바람의 그림자>는 과거의 연인 훌리안-페넬로페와 현재의 연인 다니엘-베아의 닮은 듯 달랐던 사랑 이야기가 그 중심에 있다. 모자점 주인의 아들 훌리안, 희귀본을 취급하는 서점주인의 아들 다니엘이 대부호의 외동딸인 페넬로페와 베아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이 여인들의 아버지들은 누구보다 딸들을 아끼지만 고집스럽고 엄하고 권위적이라서 딸들의 애정행각이 드러났을 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발하며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낸다는 점도 그대로 닮아있다. 그로 인해 딸의 죽음과 딸의 가출로 이어지지만 사랑이 컸던 만큼 그 화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는 것이 이 모든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의 두 집안에 외동딸보다 평가절하 됐던 외아들들의 반응 또한 판박이다. 이렇듯 데칼코마니의 양면처럼 닮아있는 연인의 사랑은 목숨을 건 용기와 충고와 사랑으로 현재의 연인에게 조금 다른 엔딩을 선사하지만 소설 속 설정이라는 느낌보다는 지금의 내 모습 또한 과거의 누군가가 살아낸 모습이겠구나 하는 공감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에 모든 인생을 다 건 훌리안. 유배자처럼 살아오는 동안 온 마음으로 그리워했던 사랑의 죽음을, 그 뒤에 감춰진 추악한 음모와 치를 떨게 하는 배신을 확인한 순간 모든 인간사의 밑바닥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곤 하는 운명의 횡포에 분노한다. ‘불에 삼켜진 흉터가 아문 검은 가죽으로 된 가면’과 같은 얼굴로 불에 탄 종이 냄새를 풍기면서 자신의 닮을 꼴 인생을 향해 발을 내디딘 다니엘과 첫 대면한 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니엘이 되풀이 하지 못하도록 충고한다.


인생에는 다만 후회가 있을 뿐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없단다.(2권 197쪽)


훌리안의 유일한 사랑 페넬로페. 페넬로페가 누구더냐. 남편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낮에는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여 베를 짜고 밤이면 다시 그것을 몰래 풀어버리며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절개를 지켜낸 여인네가 아니더냐. 그리스 신화 속 페넬로페와 20세기 바르셀로나의 페넬로페는 그 이름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운명 또한 닮았다. 20년을 기다린 신화 속 페넬로페였지만 20세기의 페넬로페의 기다림은 그리 길지 못했다. 아니, 살아서의 기다림이 길지 못했다. 신화 속 페넬로페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귀환으로 보상받지 못했다.   


네 번째 생일날 엄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열 살 소년 다니엘. 아버지를 따라 ‘잊혀진 책들의 묘지’를 찾아갔던 그 새벽 이후 이 소년의 인생은 다른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손에 넣은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은 자연스레 미지의 작가 훌리안 카락스에 대한 호기심으로 번졌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은 훌리안 카락스의 삶을 자신에게서 다시 실험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니엘에게는 훌리안에게 없었던 아주 든든한 사람이 곁에 있다. 바로 아버지 셈페레씨다. 묵묵하게 곁을 지켜주는 그 모습이 책속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아버지들의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


그래. 너희 아버지 같은. 머리와 가슴과 영혼이 있는 그런 남자 말야. 자식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자식을 이끌면서도 또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남자, 하지만 자기 결점을 자식에게서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 그런 남자 말야. 아들이 그냥 자기 아버지이기에 좋아해주는 그런 사람 말고 그의 인간성으로 인해 감격해하는 그런 남자. 아들이 닮고 싶어하는 그런 남자 말야. (1권 298쪽)


그리고 다니엘의 연인 베아. 다니엘의 절친한 친구 토마스의 누이다. 용감한 그녀 베아는 연인 다니엘을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은 훌리안과 다니엘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한다. 훌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은 이 모든 사건들의 결실이다.


그밖에도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심한 고문을 당한 기억을 안고 사는 남자 페르민, 무기제조업으로 부를 축적한 아버지를 경멸하며 상속받은 유산을 마지막 한 푼까지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으며 친구인 훌리안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우정을 보여준 미켈, 한번도 본적이 없는 페넬로페를 질투하며 훌리안을 사랑하다 죽어간 누리아, ‘잊혀진 책들의 묘지’의 주인이기도 하면서 누리아의 아버지인 이삭,...매력적인 인물들이 넘치는 즐거운 책읽기였다. 책읽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문장들...


도서관이 하나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책 한 권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알고 잇는 우리 수호자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지. (1권 14쪽)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거울이라고, 우리들은 책 속에서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발견한 뿐이라고,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걸고 독서를 한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희귀해져가고 있다고 베아는 말한다. (2권 386쪽)


이 책을 처음 읽고 난 어느 날, 바람의 흔적들에 에워싸여 산길을 오르며 ‘바람의 그림자’를 골똘히 생각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실재함에도 늘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하는 흔적들로만 만날 수 있을 뿐인 바람. 그 바람의 그림자라... 참으로 찰나적이며 상실과 부재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 책의 제목인 동시에 책 속에 존재하는 동명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의 작가 훌리안 카락스. 존재하나 부재의 의문만 던져주고, 살아있으나 이미 오래전에 스스로를 묘지보다 더 참혹한 추억의 감옥 속에 가둬버린 남자, 온통 의문투성이인 이 남자, 바람의 냄새를 닮았다.


「바람의 그림자」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연작소설로 예고됐는데 그 두 번째 이야기가 바로 「천사의 게임」이다. 연작소설의 재미 또한 빼놓지 않고 있다. 「바람의 그림자」속의 매력적인 서점 ‘셈페레 서점’과 ‘잊혀진 책들의 묘지’를 만날 수 있다. 한번 마음에 들어온 작가의 작품은 무턱대고 덮어놓고 막무가내로 달려가게 된다. 첫인상이 계속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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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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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이 작가, 참 묘하다.

그가 내놓은 책 <바람의 그림자>는 에드거 앨런 포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거기에 스티븐 킹을 뒤섞어 평가를 받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이 심심찮게 거론된다. 이 정도면 초호화 작가군단이 아닌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장미의 이름>과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 한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이 이야기의 플롯이 비슷하다는 점과 <장미의 이름>에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가 있다면 <바람의 그림자>에는 페르민과 다니엘 콤비가 추리기법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되고 있으리라. 또 희귀본을 취급하는 고서점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브루클린 풍자극>을 비교하는 것일 테지만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 라인과 치밀한 구성과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구조를 비롯해서 독자를 책속으로 끌어들이는 흡입력 면에서도 폴 오스터와 비교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작품으로만 작가를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니 좀 더 지켜보려 한다.


저주받은 책들의 이야기, 그걸 쓴 사람의 이야기, 소설을 불태우기 위해서 소설 바깥으로 나온 인물의 이야기, 그리고 배신과 실종된 우정의 이야기야. 사랑의 이야기이고 증오의 이야기이며 바람의 그림자에 살고 있는 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1권 285~286쪽)


친절하게도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를 해주는 작가. 그렇다, 2권 합쳐 800쪽 정도 분량의 이 책은 바로 이런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로맨스 소설이면서 추리소설의 미스테리한 분위기가 깔리고 성장소설의 냄새도 풍기고 스페인 내전 또한 중요한 배경이 되니 전쟁과 역사 또한 무시하지 못할 주요 요소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 가지 맛이 혼합돼서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괴상한 맛이 나는 소설일 것 같지만 작가의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각각의 맛을 제대로 적당하게 혼합하여 아주 맛깔스런 작품을 내놓았다. 어찌 보면 한 권의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많이 쏟아낸, 욕심을 잔뜩 부린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작품답게 세심함과 꼼꼼함이 돋보인다. 예를 들자면, 스치듯 지나칠 법도 한 인물들에게도 특유의 색깔을 입혀주는 탁월한 글솜씨와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작가다.


<바람의 그림자>는 과거의 연인 훌리안-페넬로페와 현재의 연인 다니엘-베아의 닮은 듯 달랐던 사랑 이야기가 그 중심에 있다. 모자점 주인의 아들 훌리안, 희귀본을 취급하는 서점주인의 아들 다니엘이 대부호의 외동딸인 페넬로페와 베아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이 여인들의 아버지들은 누구보다 딸들을 아끼지만 고집스럽고 엄하고 권위적이라서 딸들의 애정행각이 드러났을 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발하며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낸다는 점도 그대로 닮아있다. 그로 인해 딸의 죽음과 딸의 가출로 이어지지만 사랑이 컸던 만큼 그 화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는 것이 이 모든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의 두 집안에 외동딸보다 평가절하 됐던 외아들들의 반응 또한 판박이다. 이렇듯 데칼코마니의 양면처럼 닮아있는 연인의 사랑은 목숨을 건 용기와 충고와 사랑으로 현재의 연인에게 조금 다른 엔딩을 선사하지만 소설 속 설정이라는 느낌보다는 지금의 내 모습 또한 과거의 누군가가 살아낸 모습이겠구나 하는 공감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에 모든 인생을 다 건 훌리안. 유배자처럼 살아오는 동안 온 마음으로 그리워했던 사랑의 죽음을, 그 뒤에 감춰진 추악한 음모와 치를 떨게 하는 배신을 확인한 순간 모든 인간사의 밑바닥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곤 하는 운명의 횡포에 분노한다. ‘불에 삼켜진 흉터가 아문 검은 가죽으로 된 가면’과 같은 얼굴로 불에 탄 종이 냄새를 풍기면서 자신의 닮을 꼴 인생을 향해 발을 내디딘 다니엘과 첫 대면한 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니엘이 되풀이 하지 못하도록 충고한다.


인생에는 다만 후회가 있을 뿐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없단다.(2권 197쪽)


훌리안의 유일한 사랑 페넬로페. 페넬로페가 누구더냐. 남편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낮에는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여 베를 짜고 밤이면 다시 그것을 몰래 풀어버리며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절개를 지켜낸 여인네가 아니더냐. 그리스 신화 속 페넬로페와 20세기 바르셀로나의 페넬로페는 그 이름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운명 또한 닮았다. 20년을 기다린 신화 속 페넬로페였지만 20세기의 페넬로페의 기다림은 그리 길지 못했다. 아니, 살아서의 기다림이 길지 못했다. 신화 속 페넬로페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귀환으로 보상받지 못했다.   


네 번째 생일날 엄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열 살 소년 다니엘. 아버지를 따라 ‘잊혀진 책들의 묘지’를 찾아갔던 그 새벽 이후 이 소년의 인생은 다른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손에 넣은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은 자연스레 미지의 작가 훌리안 카락스에 대한 호기심으로 번졌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은 훌리안 카락스의 삶을 자신에게서 다시 실험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니엘에게는 훌리안에게 없었던 아주 든든한 사람이 곁에 있다. 바로 아버지 셈페레씨다. 묵묵하게 곁을 지켜주는 그 모습이 책속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아버지들의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


그래. 너희 아버지 같은. 머리와 가슴과 영혼이 있는 그런 남자 말야. 자식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자식을 이끌면서도 또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남자, 하지만 자기 결점을 자식에게서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 그런 남자 말야. 아들이 그냥 자기 아버지이기에 좋아해주는 그런 사람 말고 그의 인간성으로 인해 감격해하는 그런 남자. 아들이 닮고 싶어하는 그런 남자 말야. (1권 298쪽)


그리고 다니엘의 연인 베아. 다니엘의 절친한 친구 토마스의 누이다. 용감한 그녀 베아는 연인 다니엘을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은 훌리안과 다니엘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한다. 훌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은 이 모든 사건들의 결실이다.


그밖에도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심한 고문을 당한 기억을 안고 사는 남자 페르민, 무기제조업으로 부를 축적한 아버지를 경멸하며 상속받은 유산을 마지막 한 푼까지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으며 친구인 훌리안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우정을 보여준 미켈, 한번도 본적이 없는 페넬로페를 질투하며 훌리안을 사랑하다 죽어간 누리아, ‘잊혀진 책들의 묘지’의 주인이기도 하면서 누리아의 아버지인 이삭,...매력적인 인물들이 넘치는 즐거운 책읽기였다. 책읽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문장들...


도서관이 하나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책 한 권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알고 잇는 우리 수호자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지. (1권 14쪽)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거울이라고, 우리들은 책 속에서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발견한 뿐이라고,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걸고 독서를 한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희귀해져가고 있다고 베아는 말한다. (2권 386쪽)


이 책을 처음 읽고 난 어느 날, 바람의 흔적들에 에워싸여 산길을 오르며 ‘바람의 그림자’를 골똘히 생각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실재함에도 늘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하는 흔적들로만 만날 수 있을 뿐인 바람. 그 바람의 그림자라... 참으로 찰나적이며 상실과 부재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 책의 제목인 동시에 책 속에 존재하는 동명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의 작가 훌리안 카락스. 존재하나 부재의 의문만 던져주고, 살아있으나 이미 오래전에 스스로를 묘지보다 더 참혹한 추억의 감옥 속에 가둬버린 남자, 온통 의문투성이인 이 남자, 바람의 냄새를 닮았다.


「바람의 그림자」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연작소설로 예고됐는데 그 두 번째 이야기가 바로 「천사의 게임」이다. 연작소설의 재미 또한 빼놓지 않고 있다. 「바람의 그림자」속의 매력적인 서점 ‘셈페레 서점’과 ‘잊혀진 책들의 묘지’를 만날 수 있다. 한번 마음에 들어온 작가의 작품은 무턱대고 덮어놓고 막무가내로 달려가게 된다. 첫인상이 계속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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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아이 - 제12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48
이은용 지음, 이고은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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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감정이 없다면, 내 행동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 (223쪽)


인간의 감정은 과거라는 시간을 지독스레 편애한다. 기억의 편린들이 흩뿌려진 지나온 시간언저리에서는 궁핍과 절망과 슬픔조차 봄꽃처럼 화사하다. 그에 반해 인간의 감정이 다가올 미래를 대하는 태도는 야박하리만큼 황량하고 암울한 디스토피아的 시선을 고집한다.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는 완벽한 사회를 위해 개인의 감정을 통제하여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는 사회를 그려냈다. 사회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식욕과 성욕도 약으로 억제하고, 모든 구성원들을 색맹으로 만들어 색깔 구분조차 없애고, 장애아나 노인이나 사회 부적응 인자가 있는 사람들은 ‘임무 해제(일종의 안락사)’를 시켜버리는 일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극단적으로 통제된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비하면 부모가 주문한 아이가 통조림 깡통에 넣어져서 배달되어 온다는 설정의 동화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깡통 소년」은 한 토막의 즐거운 에피소드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2년作 「블레이드 러너」는 환경오염이 심각해서 대기에는 항상 스모그가 잔뜩 끼여 있고 산성비가 수시로 내리는 축축하고 뿌연 2019년 미래의 지구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에 나오려면 뭐든 완벽해야 해. 사람이든. 기계든 (56쪽)


『열세 번째 아이』가 그리는 2075년의 대한민국 또한 디스토피아的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유전자 조작으로 부모가 원하는 완벽한 아이가 만들어져 세상에 나오고, 인간에게서 쓸데없다고 버려진 ‘감정’과 ‘기억’들은 완벽한 로봇에게로 장착되는 세상이 바로 그것이다. 완벽한 아이, 완벽한 로봇을 외치면서 로봇과 인간이 서로의 대척점을 향해 완벽함을 더해가는 희한한 모양새다. 열세 번째 아이라는 꼬리표가 늘 붙어 다니는 장시우라는 아이가 사는 세상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맞춤하는 세상이다. 부모가 원하는 아이의 외모나 성격에 맞춰 유전자를 재배열하는 과정을 통해 완벽한 아이가 세상에 나온다. 앞선 열두 번의 과정을 거쳐 열세 번째로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시우는 인간의 감정 부분을 억제하고 이성이 부각된 완벽한 인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냉철한 인간에게서 쓸모없다고 내쳐진 인간의 감정은 감정 로봇들이 대신한다. 부끄러움(지오의 로봇 나르)이나 즐거움(시우의 동생 시아)처럼 단일 감정을 입력한 로봇들이 넘쳐나지만 레오는 차별화된 로봇이다. 이성과 감성이 고루 풍부해서 다방면으로 특출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처럼 레오는 경험에 의한 기억이 입력되어 완벽한 감정을 느끼는 완벽한 로봇이다.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느꼈지만 그 기억 모두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영화「블레이드 러너」복제인간 로이의 마지막 대사)


미래에 대한 결정권마저 저당 잡힌 채 관리와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는 시우 앞에 인간보다 더 섬세하고 완벽한 감성을 가진 로봇 레오의 등장은 갈등을 예고한다. 레오의 감정칩에 입력된 만들어진 기억들을 끄집어내 시우를 자극하는 레오와 사춘기에 따른 호르몬 변화로 인해 스트레스의 증가가 겹치면서 시우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던 중 시우의 미래에 보류결정이 내려지고, 때맞춰 최연소 노벨상을 수상하며 완벽한 인간의 전형이라 믿었던 맞춤형 아이의 첫 번째 성공사례였던 김선 박사의 자살 소식이 들려온다. 인간보다 더욱 섬세한 인간의 감정을 지닌 감정로봇들의 시위도 사회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급속도로 번져나간다.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 상황의 중심에서 두 손을 잡은 시우와 레오는 비로소 서로를 깊이 이해하며 입력된 가짜 기억이 아닌 진짜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경찰의 포위망은 좁혀오고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데 감정과 기억이 사라진 채 살 수 없다는 레오와 냉철한 아이였던 시우의 눈물의 이별 장면은 고조된 슬픔에 장엄함까지 더한다. 미래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가 강했던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 로이의 죽음이 오버랩 된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었던 복제인간 로이가 빗속에서 인간에 대한 용서와 함께 마지막 수명을 다하며 들려준 메시지.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느꼈지만 그 기억 모두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시우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목 뒤 지문인식 센서에 가만히 올려놓는 레오의 모습이 느린 화면으로 펼쳐지며 슬프도록 긴 여운을 남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과 머리에서 벌어진 일들. 내게 일어나선 안 되는 그것을 내가 찾게 된다면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 (216쪽)


부모가 원하는 완벽한 맞춤형 아이 장시우. 이후에 태어난 맞춤형 아이의 롤모델이 될 정도로 완벽한 아이였던 시우는 완벽한 인간보다 완전한 인간을 꿈꾼다. 예전으로 돌아가 치료를 통해 회복하고 다시 통제와 관리를 받으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삶을 지속하기엔 레오의 간절한 눈빛과 아프게 뛰고 있던 심장의 느낌이 너무나 생생하다. 완벽한 인간이냐 완전한 인간이냐 선택은 시우의 몫이다. 인간성 회복을 부르짖는 시우와 레오의 외침이 미래의 우리 아이들 모습이 아니기를 바라며 레오의 기억을 가슴으로 전해 받은 시우의 ‘진짜 나’를 찾아가는 행보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얹어 응원한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TV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자신이 명색이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사람이고 외국에 나가서 공부해서 학위까지 받았지만 자기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 3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만큼 부모로서 자기 자식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부모가 단지 자신의 유전형질을 물려줬다는 이유만으로 자식의 삶에 관여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는 기간이 태교를 통해 부모의 온갖 희망사항이 투영된 야무진 꿈을 꿀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세상에 나와서 나와 연결된 탯줄을 끊어낸 후부터는 야무진 꿈이 실현됐든 무참히 깨졌든 내 아이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흡사 구도자(求道者)와도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게 부모의 숙명이 아닐까 생각되는 순간들을 아이를 키우면서 자주 만난다. 조금만 방향을 잡아주면, 조금만 열의를 북돋워주면 부모의 기대치에 근접해 갈 수 있을 것 같은 욕심과 매번 싸운다. 부모가 원하는 사양의 아이가 통조림 깡통에 넣어져 배달되는 「깡통 소년」이나 부모가 원하는 아이를 만드는 『열세 번째 아이』와 같은 이야기는 극단적 섬뜩함으로 그런 욕심에 제동을 걸어준다. 인간을 획일적 상품화 하는 시대, 인간의 탐욕이 극에 달해 아이마저 유전형질의 적극적 선택으로 상품화해서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시대에 대한 비판이 날카롭다.   

 

과학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지만 사람들은 계급을 나누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 같다.(37쪽)


『열세 번째 아이』는 미래 사회에 대한 생생한 구성으로 별반 다르지 않은 지금의 세태 또한 날카롭게 꼬집는다. 맞춤형 아이를 신청할 자격이 되지 않는 부모들은 불법으로 아이를 만드는 일에 손을 대고, 변두리에 사는 가난한 계층은 매일 신제품으로 갈아치우는 상류층과는 다르게 개인 로봇 하나 없이 주변의 이죽거림의 대상으로 살아간다. ‘과학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지만 사람들은 계급을 나누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 같다.(37쪽)’는 시우의 독백이 들려주는 인간 계층 간의 대립각은 2012년과 2075년 사이의 시간을 빠르게 훑으며 씁쓸함을 남긴다. 미래 사회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이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은퇴’(복제인간을 사살하는 것) 「기억전달자」의 ‘임무 해제’(노인이나 장애아동, 사회적 위해인자를 가진 인간을 안락사 시키는 것) 『열세 번째 아이』의 생명윤리와 인간성에 역행하는 행위들이 횡횡하는 미래 사회는 단지 상상속의 일일뿐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보트 주위를 선회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상어처럼 우리의 발밑을 조용히 잠식해 들어와 어느 순간 아가리를 쩍 벌려 인간이 인간다움을 포기한 사회를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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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와 소름마법사 2
발터 뫼르스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발터 뫼르스의 ‘차모니아 환상문학 시리즈’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차모니아의 작가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가 쓰고 발터 뫼르스가 차모니아어에서 번역하고 삽화를 그린 작품들이다. 작품이 발표된 순서대로 꼽자면 『푸른 곰 선장의 13과 1/2 인생』,『엔젤과 크레테』,『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꿈꾸는 책들의 도시』다. 차모니아라는 상상의 대륙에서 펼쳐지는 작가적 상상력의 끝을 가늠하기조차 힘든 환상적인 모험들을 소개하고 있다. 발터 뫼르스의 팬이라면 능청스럽고 세세하게 지도까지 첨부해서 소개하고 있는 차모니아는 온갖 기이한 존재들과 고도의 지적  두뇌와 마법과 연금술이 혼합된 익숙한 공간이다. 나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통해서 차모니아 문학을 처음 접했고 순서를 완벽하게 거꾸로 이 시리즈들을 읽었고 결국 시리즈의 종착역인 『에코와 소름 마법사』에 이르렀다. 허겁지겁 홀린 듯 읽었던 4편의 차모니아 시리즈와 『에코와 소름 마법사』사이에는 2,3년 정도의 공백이 있다. 오랜만에 읽은 차모니아는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 긴장감도 떨어지고 상상력 지수도 한껏 높아진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 느낌이 강하다. 아무래도 『꿈꾸는 책들의 도시』로 정점을 찍고 『에코와 소름마법사』는 아쉬워하는 팬들의 여흥을 달래주는 조용한 마무리처럼 느껴진다.


늑대와 노루의 유전자를 가진 뿔 달린 강아지처럼 생겼으나 거인과의 싸움에서도 용맹스런 ‘루모’, 스물일곱 개의 삶을 산다는 ‘푸른 곰’처럼 ‘에코’는 모든 동물들의 언어를 알고 있는 고양이처럼 생긴 ‘코양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에코의 능력은 차모니아의 모든 언어들을 앍고 있으며 모든 생명체와의 대화가 가능하고 점차적으로 밝혀지지만 한번 듣거나 본 것들은 완벽하게 기억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예술분야에도 능하다. 더군다나 에코는 슬레트바야라는 도시의 마지막 남은 코양이다. 배고픔에 시달리며 거리를 전전하던 에코 앞에 나타난 소름마법사 아이스핀은 환상적인 요리로 배부르게 먹게 해줄 테니 한 달 뒤 소름보름날 에코의 몸에서 기름을 짜내는 거래를 하자고 제안한다. 소름마법사는 차모니아의 희귀한 생명체들의 몸을 푹푹 끓여서 기름 덩어리를 추출해서 수집하고 있었는데 시야에 들어온 도시의 마지막 남은 코양이를 눈독들일 수밖에... 거리에서 굶어죽거나 들개들의 공격에 죽든지 한 달 동안 진귀한 음식들 배불리 먹고 죽든지 매한가지라고 생각한 에코는 당장의 배고픔에 소름마법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우선의 화려한 음식들에 현혹되어 자신의 처지를 잊고 있던 에코에게 음침하고 비밀스런 소름마법사의 저택 지붕에 살고 있는 수리부엉이 피요도르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며 위기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모색할 것을 당부한다. 은밀한 비밀들까지 터놓는 사이가 됐으니 죽이기까지 하겠냐며 안이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동정심이나 사랑의 감정에 호소해 보려고도 했지만 결국 소름마법사와 대치관계인 소름마녀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공동작전을 펼치게 된다. 소름마법사의 저택은 연금술의 집합체다. 소름마녀는 감정이 배제된 소름마법사의 ‘연금술’에 자신의 ‘소름술’로 대항하려 한다.    


과거 비극적인 사랑으로 인해 광기에 사로잡힌 소름마법사 아이스핀은 생과 사의 주재자가 되려는 과대망상에 빠져 연금술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그녀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날이면 코스 요리를 장만해 식탁가득 차려놓지만 주인 없는 식사는 수년째 그대로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다. 그 장소를 에코에게 보여주는 소름마법사는 잠깐의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역시 사랑만큼 위대한 것이 없는 걸까? 오로지 사랑에 인생 전부를 저당 잡히고, 비극적 사랑에 인생을 송두리째 광기로 몰아넣고, 도시전체를 절망과 질병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비열한 악당을 흠모하게 만드는 사랑. 세상사의 근간을 이루는 최고의 연금술이며 소름술이 바로 사랑임을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차모니아 시리즈의 지독한 악역들, 예를 들면『꿈꾸는 책들의 도시』의 ‘스마이크’나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의 구리용병 대장 ‘짹깍짹깍 대장’의 비열함과 악랄함에 비하면 역시 소름마법사는 이름만큼 소름끼칠 정도는 아니다. 이파리 늑대, 개암나무 마녀, 황금 데몬, 백설 과부처럼 차모니아의 악랄하고 비열한 존재들이 총집합해서 혼란과 공포를 담은 쿠테타를 일으키는 장면마저도 덤덤하다. 발터 뫼르스의 환상문학에 내성이 생긴 탓일까.


발터 뫼르스의 ‘차모니아 시리즈’는 열성팬들에게 정교하게 얽혀있고 중첩되어 있는 인물들을 찾아내는 재미를 빼놓지 않는다. 발터 뫼르스가 능청스럽게 이 모든 저작의 장본인이라 소개하는 차모니아 공룡작가 미텐메츠도 전설의 대장장이(‘푸른 곰 선장의 13과 1/2인생’), 풋내기 작가(‘꿈꾸는 책들의 도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엔젤과 크레테’)로 등장한다. ‘루모’나 ‘스마이크’를 비롯해서 이파리 늑대, 숲거미 마녀등의 차모니아의 괴이한 생명체들 또한 작품들을 넘나들며 출현한다. 발터 뫼르스가 상상력으로 구현한 기이하고 독특한 환상의 세계 ‘차모니아’는 아직 탐험해보지 못한 지역의 못 다한 이야기들을 뒤로 하고 비밀스런 안개 뒤로 숨겠다고 한다. 스물일곱 개의 삶을 갖고 있지만 절반인 13과 1/2의 삶 이야기만 하고 나머지는 침묵하겠다고 했던 『푸른 곰 선장의 13과 1/2인생』의 서문이 기억난다. 나머지 절반의 삶은 푸른 곰의 비밀로 남겨둬야 매력적이고 신비롭지 않겠냐는 작가의 말처럼 이제 아쉬움을 뒤로한 채 환상적인 모험으로 안내하던 ‘차모니아’와 작별해야 한다. 공룡작가 미텐메츠의 차모니아 시리즈를 벗어난 발터 뫼르스가 보여줄 다음 세상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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