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세트 (반양장본) - 전3권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4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꾸려진 사신단이 애초에 열하에 갈 생각은 아니었다. 게다가 연암은 사신단의 꼽사리였다. 열하는 중국의 한 변방의 이름이다. 연암 박지원은 개인 여행자의 자격으로 사신단을 따라 북경 여행을 갔는데, 고생고생 그 먼길을 갔건만 황제는 그곳에 없었다. 애타게 기다렸는데 수행단의 예법이 뭔가가 거슬렀는지, 황제는 그들에게 날짜를 정해주며 짐을 줄이고 수행단 규모를 축소해 자신이 있는 여름 별장인 열하로 오라고 명한다. 북경의 선진 문물에 눈이 휘둥그레해진 연암은 처음엔 북경 구경할 기회가 줄어들 것을 우려해 북경에 남기로 결심하지만,  황제에게로 향하는 험한 길을 다시 따라나서기로 한 것은 당시 조선에 북경을 다녀온 사람들은 많지만 열하에까지 다녀온 사람은 없기에 연암이 다녀와서 열하를 소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주위 사람의 권고다. 이런 팔랑귀에서도 엿볼수 있듯, 연암의 여정을 넘치게 풍부한 컨텐츠로 채우는 것은 꽃중년 연암의 천방지축 귀엽귀엽 캐릭터다.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가는 다른 관료들과 달리, 청국 여행이라는 목적만을 가진 연암은 첫 해외 여행, 길거리와 여정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 담았다. 말 위에서 자느라 기린이 지나간 것을 놓친 것을 그토록 안타까와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자느라 구경을 놓친 이국의 동물을 안타까와하는 연암은 그렇게 보고 느끼고 말하고 쓰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하나도 놓칠 세라, 다가가서 말을 섞고, 배우고 전하며 지적 세계를 넓혀가는 경험을 한다. 중국말과 한국말이 다르지만, 한자를  공유하던 당시, 필담은 말이 달라도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도구였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당시의 가치관으로서는 도발적이기까지 한 연암의 세계관 뿐만이 아니다. 이미 망한 명에 대한 환상 속 명의 숭배와 새로운 세계로 떠오른 지 오래된 청에 대한 배격 사상을 틈틈히 비판하면서, 변화하는 세계 정세를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 속에 깊이 침잠한 채 고립되고 가난한 채로  고인 물처럼 정체되어 있던 조선을 비추었던 거울이기도 하다. 명이 청으로 바뀌었고, 변발을 강요당한 채로 죽음을 선택한 명장들과 왕족들은 그 때로부터 100년도 더 지난 과거였으나, 여전히 조선인들은 청의 만주족들을 되놈들이라고 지칭했고, 오랑캐로 취급하지만, 연암은 가는 곳마다 발달된 청의 문명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여행을 하며 적은 것이라 일기니 풍경과 느낌의 산문이려니 생각할 수 있지만, 연암은 말하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였고 그것을 적었다. 그의 글에는 오만가지 잡다한 분야의 지식들이 따라다니는데, 그 분야는 문학, 사상, 과학, 예술에서부터 정치 사회 언어학까지 정말로 방대한 분야의 지식들이 자유럽게 넘나들며 유연한 사고의 과정을 보여준다. 뭐 조선의 세익스피어라고 하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몽퇴스키외에 비유된 적이 있다 하는데, 내가 읽으면서 생각난 사람은 움베르토 에코였다. 무엇보다도 에코의 유머러스함과 엉뚱함을 지녔고, 중국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면서 음과 훈의 차이로 인한 언어적인 놀이,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 골동품(서적)에 대한 애정까지. 특히 비상한 암기력이 아니면 아무리 사고의 틀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도 가능하지 않는 대화 중 툭툭 튀어나오는 선인들의 말에 대한 인용 같은 것들을 보면서 에코의 책을 볼 때 하는 감탄사가 같이 나온다. 


책은 어떤 시대의 가치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 시피, 조선시대의 유교관 속에서 그 숨막히는 고리타분함이 세계관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을 고전을 겁내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이유다. 아프리카나 아랍, 남미와 같이 먼 공간의 문학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먼 시간 속의 글귀들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이렇게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서로 다른 시대적 가치라는 벽이 소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전이 살아남은 까닭은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그 때의 가치 속에서 열광했던 어떤 것들이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열하일기의 명성은 바로 우리가 판타지 속에서나 재밌게 바라볼 수 있는 조선시대 실제했던 한 개인이 엄청난 지식과 해학과 풍자로 그 어느 여행서도, 일기도, 혹은 산문집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문학을 완성시킨 것이다. 

 

의주에서 국경을 넘는 때로 시작해서 사신단들과 함께 중국에서 북경으로 향하는 여정이 담겨 있다. 의주에서 국경을 넘기 전, 밀반출 차단을 위해 철저하게 몸검사를 받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압록강을 건너 무인지대를 지나 각 도시를 통과해가며 베이징에 도착하는 여정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이 때 사신들은 어디서 무얼 먹으며 어떻게 여행을 했는지, 또 연암이 길에서 혹은 성에서 만난 중국 사람들은 조선인들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연암과 어떻게 인연을 만들었는지 등등 수많은 흥미로운 요소들로 가득하다. 특히 윗선의 명을 어기고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도시를 구경하고, 낮에 만났던 사람들과 밤새 필담하며 대화하는 모습은 하나의 짧은 소설만큼 재미있다. 


연암은 특히 발달된 청의 기술문명을 속쓰리게 바라보았는데,  속히 본받아야 할 것을 촉구하는 것 중 몇가지가 수레와 도량형 통일, 벽돌, 난방 구조 등이다. 리처드 불리엣의 <바퀴 세계를 굴리다>라는 책을 얼마 전에 읽었었는데, 그것을 읽으면서도 중국의 바퀴 사용에 대한 의문점이 가시지 않았었고, 이 책을 통해 보다 현실적이고 풍속적인 차원에서 중국의 수레 사용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연암의 글을 통해, 조선에서도 수레 사용을 본받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던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연암은 글을 통해 중국의 험한 골짜기 까지 다채로운 수레들이 다니는 것을 보라며 길은 다녀야 생기는 것이라고, 바퀴와 도량형 통일을 받아들여야할 시급한 과제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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