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에, 과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이 점이 좋았다. 누가 미래를 아는가. 상상력만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기술에 갇혀 있을 때, 즉 기술의 제약 내에서는 진정한 미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무엇인가, 현재의 기술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먼저 상상했기에 그 상상의 실현에 대한 소망이 기술을 만든다. SF 작가들 중에는 대단한 과학자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고 들었다. 한국에서 SF 작품 공모전을 할 때 유명한 과학자가 쓴 작품들도 있는데, 또한 그런 글들은 심사에서 자주 탈락된다는 말도 들었다. 기술적으로 얼마나, 어떻게, 먼 혹은 가까운 미래에 가능한 일들인지에 대해 쏟아넣는 설명과 정성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고 그 새로운 세계에서 구축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본다면, 물론 현재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기술은 기계가 생각하는 문제보다 기계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문제에 더 애로사항이 있는 듯하다. 1~2년 전 미국의 나사의 재난구조 센터에서 국제적인 로봇 대회가 열렸는데, 한국의 카이스트에서 만든 휴보가 1등을 했다. 로봇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대략 스스로 차에 올라타고 앉아서 운전을 해서 재난 사이트로 이동을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서 도구를 픽업한 다음 그것으로 가스 밸브를 잠그고, 파괴된 건물의 잔해가 쌓여있는 울퉁불퉁한 바닥을 걸어가고 하는 동작 등을 포함한다. 처음에 그 경기 미션을 접했을 때 로봇 회사들의 반응은 'It's impossible!!!' 이었다.  4차 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 알파고니 하며 곧 로봇이 마치 인간을 정복할 듯 요란한 시대지만 막상 이 세계 최고의 로봇이 치르는 경기 장면을 들여다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인간이라면 단 1초도 망설임없이 행해질 차에서 내리는 동작을 하기 위해, 세계 최고의 휴머노이드들은 느려터진 동작으로 앉았다 섰다를 수차례 반복한다. 영화에서 늘상 접했던 날쌔고 빠른 동작을 수년 내에 구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휴머노이드에서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가 기대에 못미치는 까닭은 이렇게 설명된다.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수백만년에 걸친 진화가 신경망과 함께 정교하게 만들어낸 것이므로 소프트웨어처럼 쉽게 구현가능하지 않다. 즉, 갓 태어난 아기에게 엄마가 적당한 사랑과 함께 먹을 거만 주면 스스로 알아서 서고 기고 걷고 달리고 정교한 몸움직임이 가능하지만, 소프트웨어적인 계산과 언어, 등은 외부에서 꾸준한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전자는 유전자가 하는 것이고 후자는 주입과 연습 등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까 로봇에게 생각을 주입시키는 일은 컴퓨터가 탄생한지 몇 세대만에 많은 것을 구현했지만, 로봇이 두 발로 서서 단지 중심을 잡고 걷는 일만으로도 그렇게 힘든 거였다. 그 재난로봇경진대회에 출품한 로봇들중 다수는 울퉁불퉁한 길을 걷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지도 못했다. 





다시 구병모의 소설로 돌아와 보면, 이 소설이 두고두고 좋은 것은, 과학은 과학에게 맡겨두고 오로지 인간과 로봇 사이의 교감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시대적 배경은 현재이고, 현재에 이렇게 세탁소 일을 돕고 자연어를 처리할만한 지능 있는 로봇이 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말이 안되지만, 상관없다. 죽은 아들이 근무하던 연구소에서 만든 로봇을 받아들고, 함께 살아가는 부부와, 이 로봇과 함께 지내는 이웃들과의 관계 그 속에서 싹트는 기계에 대한 무심함과, 배운대로만 행하고 감정이 없는 기계가 주변 인물들에게 느끼는 감정을 소설 속에서 처리하는 방법이 마음을 터치한다. 


구병모는 대체로 뜸을 들이지 않는다. 시작부터가 서늘하다. 몇년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세탁소 집 외아들이 외국에서 죽은 아들 이야기가 마치 옆집 개가 죽은 것처럼 덤덤하게 묘사되고 그 아들이 발신인으로 보낸 시체를 배송받은 명정은 곧 그것이 시체가 아니라 로봇이라는 것은 알 정도의 지식은 있다. 그 로봇은 아들이 미국에서 다니던 회사에서 개발한 소년 로봇인데 판매용이 아닌 불완전한 샘플이다. 이웃집 세주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초기 세팅을 마친 로봇에게 은결이라 이름짓고, 세탁소의 자잘한 일들을 돕고 가사노동을 도우며 명정과 함께 살아간다. 세탁소의 단골인 서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중학생 시호와 준교 역시 들락거리며 기계인간 은결에 관심을 보이는데.


이 이야기는 시호와 준교의 사랑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로봇 은결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이 시대 열심히 선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힘겨운 삶을 따스하게 비추는 작은 드라마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물론 명정 역시 은결에게 정신이란 것은 없으며 교감할 수도 없고, 무엇을 느끼거나 감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입력된 대로 행동하는 은결에게 시호가 위험에 처해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혼란 스러운 상황에 기억을 뒤져도 해답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데, 그렇게 은결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대면하는 시간은 마치 조금씩 인간이라는 한없이 불안전하고 예측불가능한 존재에 대해 알아가고 성장해 가는 것 같다.  9년이 지나는 동안,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고, 그렇게 그들이 성장하는 동안 아이들은 자주 함께 하는 은결이 조금씩 지식을 축적하고 도우며 적응해가는 모습에서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교감이 전해진다. 아이들이 성장을 하는동안 어른들은 늙는다. 늙은 주인이 생을 떠날 준비를 할 때, 은결은 어떻게 되기를 원할까



이제와 하나마나한 생각이지만 처음부터 이름을 붙여선 안되는 거였다. 그 이름은 언제 까지고 펼칠 일이 없는 종이 속에 접어 두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름을 붙여준 것을 떠나보내는 방법에 아직도 익숙지 않다. p191


준교는 모호한 것들을 모호하게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그의 세계는 명료한 산술과 그 결과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럼에도 은결에 한해서는, 지나치게 오래도록 알아온 부작용이겠지만, 한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전방 시각 카메라 너머 출렁이는 감정의 파고를 측정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다.  p206



존재의 진실성 여부가 그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수긍과 인정에 달려 있는 것들. 잊어버린 채 방기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노크해 오거나 부지불식간에 덜미를 잡아채는 것들. 실체를 확인하고 분석하기 위해 과감히 렌즈를 들이대면 사라지는 것들. 그래서 때로 지나치게 의미가 부여되곤 하는 것들. // 그러므로 준재하기를 그만둘 게 아니라면, 차라리 이해하기를 멈춰야 옳은 것들. 은결은 그 가운데 하나의 모습으로 그의 곁에 머물러왔다.  p208


주인으로서 관찰한 바 기계적 설명이 어려우며 인간의 반응에 가깝다고 판단한 몇 가지 사례가 이어진다. 밤거리로의 목적 없는 불규칙한 산책과 방황, 선물을 받고 난 뒤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중략)... 어린 소녀에서 처녀애로 자라난 이웃집 여성에 대한 연심 p221


무너진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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