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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은 정체성의 일부다. 집단이 공유하는 기억 속엔 집단이 동의한 가치 철학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일부를 이루는 과거의 기억이라는 환경은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에 의해 형성된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망각 속에 길을 잃고 외로이 서 있는 사람은 기억이라는 억압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현재가 그런대로 살만 하다면, 망각 속에 잊혀진 것들은 알고 싶을까 알고 싶지 않을까. 희미한 안개는 노부부가 한평생을 의지하며 살아온 모든 소중한 순간들을 감춘다. 봉인되 망각 속으로 사라진 것들 속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위협하게 될, 혹은 공동체의 대재앙을 실어오게 될 고통과 불화의 씨앗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잊혀져서 무의미한 나날들에 의해 두 사람의 현재가 행복하다면, 서로 이질적인 두 공동체가 전쟁 없이 평화를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봉인은 해제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까? 그것이 옳을까? 그래도 괜찮을까. 그렇게 살아도? 그것은 혹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지 않는 것, 나치와 스탈린을 생각하지 않는 것,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들의 행적을 조용히 묻어두는 것과 같지 않을까?
<남아있는 나날>로 부카상을 수상한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은 집단과 개인의 망각과 용서라는 성찰적 주제를 아득한 세월동안 전설로 남겨진 아서왕의 브리튼 기사들과 섹슨족 전사들의, 그리고 괴물과 용, 도깨비들이 판을 치는 판타지 소설속에 정교하게 녹여낸 판타지 소설이다. 사료로는 알 수 없는 전설을 구체화한 것, 존재하지 않는 도깨비와 괴물들의 등장, 용이 뿜어내는 안개를 집단 망각의 형태로 은유화한 점 등을 보면 판타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영웅들의 활약상보다는 상징성을 통한 인간성의 탐구와 서사가 주는 막연한 슬픔은 문학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아서왕의 시대에 브리튼족은 섹슨족을 물리쳤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가 죽고 난 후 두 부족은 이곳 저곳에 흩어져 마을 단위의 공동체를 이루며 상호 불가침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두 부족간의 언어와 관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개인으로 서로 만나면 말을 섞고 서로 돕는다. 비어트리스와 액슬은 브리튼족 부부로 촛불 사용마저 박탈당할만큼 늙고 노쇠한 부부로, 집단적인 망각 현상을 눈치채고, 언젠가 무슨일로 자신들을 떠나게 되었는지를 잊은 아들을 찾아 나선다. 개인간의 친분은 존재하지만 여전히 각자의 왕을 섬기는 브리튼족과 섹슨족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흐르던 원시적 환경 속에서 아들을 찾아가는 여정은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 노부부들이 왜 어떤 이유로 아들과 떨어져 살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들이 사는 마을에 가면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아들은 왜 늙은 부모를 찾지 않는 걸까. 이 모든 의문은 망각 속에 묻힌 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동안 수없는 만나는 고난과 난관을 헤쳐나갈 뿐이다. 부모가 연로하다 보니, 노부부의 아슬아슬한 여정이 마치 목숨을 건 모험처럼 느껴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이 조마조마 하다. 하루밤 묵기 위해 찾은 섹슨 족 마을에서는 때마침 출연한 도깨비들 때문에 브리튼족인 마을의 이방인인 노부부를 경계하고, 병을 고치기 위해 들른 산꼭대기 수도원에서는 함께 동행하던 섹슨족 전사와 소년을 찾는 병사가 들이닥치고, 지하 무덤에 갇히게 된다. 강을 건너던 중에는 괴물들이 나타나 아픈 비아트리스의 목숨을 노린다.
섹슨족 전사인 윈스턴과 섹슨족 소년 에드윈, 그리고 아서왕의 기사인 가웨인과 그의 말 호레이스는 이들 부부와 동행과 이별을 반복하게 되는 인물들이다. 그들 역시 망각을 경험하고 있고 또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괴물에 물린 상처때문에 동족에게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한 소년을 윈스턴이 마을 밖으로 데리고 떠나면서 노부부와 동행하게 된다. 윈스턴은 소년이었던 한 때 브리튼족의 군사학교에서 함께 훈련을 받으며 자랐지만 색슨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집단 따돌림의 대상이 되자, 나와 섹슨족의 전사가 된다. 브리튼의 기사 가웨인은 호탕하고도 흥미로운 인물인데, 말 호레이스를 마치 살아있는 동료처럼 대하며 노부부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서 투덜거리게 돈키호테를 연상시킨다. 돈키호테와는 가웨인은 실제로 아서왕이 살아있었을 때부터 그의 기사로서, 늙었지만 훌륭한 칼솜씨와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다.
노부부는 여정 중 망각의 원인을 알게 되고, 둘만의 소중한 시간들을 되찾고 싶어한다. 기억을 앗아가는 것은 암용의 입김이 뿜어내는 안개다. 안개는 시야를 뿌옇게 가리고, 과거 역시 희미하게 가린다. 부부의 사랑은 오롯이 서로에게만 향해 있으며,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위험을 피하지 않고 함께 같은 방향을 보고 걷는 모습은 무모하고 답답하면서도 서로 의지하는 노부부의 애틋함을 잘 전해주는데, 그들에게 없는 것은 과거다. 베아트리스는 궁금하다. 희미한 기억의 그림자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고통스러운 장면에 불안해진 액슬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그대로 모르는 채로 감추어져 있는 편이 나을지 그래도 기억을 찾아야 할지 확신하지 못한다. 우리가 젊었을 때에도 한결같이 같은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그녀는 확신한다. 두 사람의 삶이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더라도 함께 기억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비아트리스, 그들은 암용을 제거하고자 하는 섹슨족 전사와 암용을 지킴으로써 섹슨족과 브리튼족간의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가웨인 사이에서 어느 쪽 편에 서게 될까. 안개 걷히듯 망각으로부터 진실이 밝혀진다면 그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무엇일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