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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사라 워터스를 좋아하긴 하지만 귀신나오는 공포영화나 공포 소설을 좋아하지 않기에 평가단 도서가 아니었으면 읽지 않았을 터였다. 시작은 나름 선빵했지만 중간에 밀당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확 무섭지도 않고, 지루해서, 끝까지 읽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지막 1/3 ~ 1/4 지점에서 조금 뭔가 눈치를 채기 시작하면서 흥미롭기 시작했고, 맨 끝 문장을 여러 번 읽고서야 평가단에 감사했다.
수백년의 역사를 품은 고색창연한 헌드레즈홀이 잡초와 썩어가는 기둥들과 함께 허물어져가고, 저물던 젠트리 시대가 전후 암흑처럼 짙은 어둠에 묻히면서, 함께 고립되고 잊혀져가던 몇 안되는 남은 헌드레즈 홀에 사는 에어즈 가문의 식구들에게 홍반장처럼 무슨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나타나 돕는 화자 패러데이가 전하는 이야기다. 밀란 쿤데라는 <작가는 무엇인가>에서 독자가 첫문장을 기억하지 못하면 전체 문맥을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비슷한 말을 했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 책의 첫 문장은 700페이지에 가까운 긴 서사에 담긴 욕망과 비극을 한마디로 담아낸다.
훔쳐서라도 갖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가. 훔칠 수 없다면 그것의 일부를 훼손시켜 떼어옴으로써 욕망에 대한 대리 만족을 조금이라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열세살 소년 패러데이가 본 헌드레즈홀은 전쟁을 포함한 길고 긴 삼십년이라는 시간이 야곰야곰 몰락시켜간 귀신이 출몰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쇠망한 저택이라 해도, 여전히 어릴 때의 욕망의 대상에서 지울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재미없고 지루하게 느꼈던 이유 한 가지. 아무리 여주인공이 못생겼다 하더라도, 만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못생긴 점, 옷을 못입는 점, 지저분한 손가락, 흐트러진 머리카락 따위에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지 않을 것이다. 분명 말로는 캐롤라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막 사랑을 시작한 그의 눈엔 계속해서 헛점 투성이다. 게다가 우락부락 못생겼다는 말은 꽤도 하는데, 그럼에도 캐롤라인의 말, 캐롤라인의 행동을 보면 그 어려움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재치와 건강한 아름다움을 두루두루 보유한 매력이 느껴진다. 정말 길고도 긴 연막전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남의 가족 들락날락의 일상들이 끝없이 반복되던 끝에 둘 사이에 드디어 러브라인이 생기나 했는데, 이번에는 캐롤라인이 고수의 밀당인지 당시 1940년대 젠트리 귀족 여성의 행실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인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일단 여기까지. 스포 없이 책읽은 소감을 나누려니 제약이 너무 많다. 마지막 문장을 읽자 마자 나는 다른 리뷰들을 읽으며 다양한 의견들을 나누고 싶었었는데, 그러려면 강력한 스포를 포함한 이야기가 도마 위에 올라가야 한다. 여기부터 그 얘기들을 할 작정이니, 아직 안읽으신 분들은 읽기를 멈추기를 권한다.
헌드레즈홀에 계속 비극이 겹치면서 그곳과 인연을 맺는 모든 살아 있는 많은 사람, 죽은 혼령까지도 비극을 이끄는 범인으로 의심되지만, 화자의 말을 믿기에는 석연치않은 구석이 많다. 그 첫번째가 캐롤라인에 대한 사랑이다. 물론, 파티날 처음으로 경계를 풀고 유혹하는 듯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캐럴라인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매우 납득이 간다. 그토록 망설이고 부인하던 캐럴라인이 막상 결혼을 제안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쉽게 승낙한 것은 그와 함께 헌드레즈홀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패러데이는 마치 헌드레즈홀이 자신의 집이 다 된 것처럼 '우리 집'이라는 표현을 했다. 에어즈 부인까지 죽던 날, 운명은 헌드레즈홀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의 욕망에 따라 처리되는 것처럼 흐른다.
상속권자인 아들이 정신병원에 갇히고, 집에 대한 실질적 소유권을 가진 에어즈가 죽고, 이제 결혼만 하면 두 사람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 에어즈 부인의 장례식을 치르자 마자 결혼을 서두르는 패러데이와 더욱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캐럴라인의 일상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분명 캐럴라인도 패러데이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고 느껴진다. 캐롤라인은 왜 딜을 하지 않았던 걸까. 나는 이 집이 싫다, 집을 떠나 런던으로 가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을거다.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떠나자 이런 밀당이 필요없을만큼 아마도 너무나 명백하게 패러데이가 헌드레즈홀에 대한 욕망을 겉으로 나타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또한 독자를 1940년대 영국의 사회 제도로 조심스럽게 이끈다.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었을 때 전면적인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된 모양인데, 패러데이는 나름 능력을 인정받는 의사임에도 새로 도입되는 의료보험제도로 인해 고객을 놓치게 될까봐 전전긍긍하지만, 보험제가 도입하기 전인 이 책의 배경에서도 패러데이와 주변 의사들을 통해 본 의사라는 직업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차지하는 위상과는 사못 다른 느낌이다. 그럼에도 패러데이는, 물론 전통적 계급이 급격하게 재편되던 시절이니 가능한 일이었고, 지금의 대한민국으로서는 요원한 일이 되었지만, 헌드레즈 홀에서 유모로 일하고 남의집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던 부모들 밑에서 자란 노동자 계급으로서는 똑똑한 덕에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의사로서 가진 사회적 위상과 존경이, 어릴 때 그토록 그 작은 벽의 한귀퉁이를 훔쳐서라도 갖고 싶었던 헌드레즈홀과 에어즈가문이라는 갖지 못할 욕망을 대신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왔다. 그 무엇으로도 보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가 동경한 것은 단지 저택 자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 눈에 비쳤던 대저택과 그 속에서 스무 명의 하인들을 부리며 귀족으로서 사는 것을 포함한 모든 가질 수 없는 아주 높디 높은 욕망의 사다리. 그렇기에 차라리 돈을 벌어 좋은 집을 마련하거나, 의사로서 명예를 갖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 대신, 캐롤라인을 통해 그들이 왕년에 가졌던 것들을 누리고 싶었으리라.
줄리안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이후 화자에게 속는다는 일은 그리 낯선 광경은 아니지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화자가 자신의 기억에 의지해서 진술하는 이야기에 유린당하는 쪽은 독자 뿐만 아니라, 화자 자신도 포함하는 반면, 이 소설에서는 화자가 이제껏 독자들에게 무엇을 들려주었는지, 어디까지가 진실이었는지를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가 한 이야기 속 한 마디도 진실이 없을 수도 있다. 패러데이는 캐롤라인에게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까지 캐롤라인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막상 캐롤라인이 파혼을 결정하자 광기어린 그의 행동이 극에 달하면서 점점 미스테리의 범인은 화자처럼 생각되었지만. 논리적 설명이 부재한 이런 결론, 이런 마지막 문장은 사실 옳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모든 기괴스럽고 공포스러운 초자연적 현상들은 무엇으로 설명할건가. 선택은 그가 우리에게 계속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독자는 화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읽은 것이므로, 그 거짓말이 만들어낸 공포와 괴기에 이제껏 속았고, 사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이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런 질문들을 하다보면 다시 읽어봐야 대답을 조금이라도 뽑아낼 수 있겠는데.. 책이 너무 두껍다. 어찌됐건 아무 이유도 없이 남의 집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화자가 처음부터 수상쩍었었는데 틀리지 않았다. 친절한 사람을 믿지 마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