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 열린책들 세계문학 176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소임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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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그러나 갈라테이아 입장에서 이야기를 다시 보자. 아프로디테의 힘으로 생명을 얻은 갈라테이아는 피그말리온을 사랑했을까? 자신을 창조했다고 해서, 그의 욕망에 의해 얻은 생명이기에 그의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생명이 되어야만 했을까. 만일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의 사랑을 거부했다면. 혹은 그가 만든 자신의 아름다움 앞에서 아무런 주체적 선택 없이 단지 감사와 복종만을 그에게 바친다면 갈라테이아는 진정한 생명일까.


그렇게 따지다가 문득, 신이 주었다는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라는 불손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신이 주었지만, 신을 믿지 않을 자유도 주었으니, 신이 금한 행동을 한들, 신이 간섭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 라는.. 버나드 쇼의 희곡에 등장하는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이아는 언어와 발음 때문에 신분상의 제약이 따르던 시대 런던의 최하류층에서 꽃을 팔며 연명하는 한 소녀다. 발성학자이자 언어학자인 히긴스는 피커링 대령과 함께, 그녀의 영어 발음을 철저히 재교육시킴으로써 그녀에게 새생명을 준다.

얼마전 읽은 영어이야기에서도 언급된 사실이지만, 영국에서는 19세기 20세기까지도 지역과 신분에 따라 발음차가 컸다고 한다. 런던 하류층의 악센트와 발음은 그들의 신분상의 굴레를 고착화시키는 데 한 몫했다고 한다. 특히, 발성학자, 언어학자인 히긴스는 상대방의 말만 듣고도 어느 지역 출신인지를 알아맞춘다. 당시 9년간의 의무교육이라는 선구적인 사회보장장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꽃파는 일라이자의 발음은 자신의 가난하고 피곤한 하류층 신분에서 한 발작도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한 마디만 말하면 신분이 바로 드러나는 그 발음상의 차이는 꽃파는 가게에조차 취직할 수 없게 만든다. 

누추한 거리의 소녀가 대변신을 하는 신데렐라성 스토리는 아무리 수많은 변형의 이야기를 낳았어도 우리를 매혹시킨다. 6개월만의 대변신을 이룬 그녀에게 부자인 피커링 대령이 제공한 드레스와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눈부신 등장은 파티장의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인다. 사람들은 심지어 그녀의 발음은 너무나도 정확해서 그녀가 제대로 영어를 교육받은 헝가리의 공주일 거라고 추측하기까지 한다. 일라이자의 완벽한 변신을 성공시킨 그들(히긴스와 피커링 대령)은 자축하지만, 여기부터가 갈등의 시작이다. 

갈라테이야와는 달리, 일라이자는 자신의 변신에 대한 의미와 자각을 자유의지로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던 한 사람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꽃을 팔았지 자신을 팔지는 않았었음을 깨닫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다시 거리에서 꽃 파는 그 누추한 문법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없음을 함께 깨닫는다. 때로 구차하게 때로 비굴하게 천박한 언어로 길거리를 누비며 꽃을 팔던 그 때가 더 좋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 때는 몰랐던 이 세계가, 자신이 원래부터 속한 세계도 아니며, 앞으로도 속할 세계도 아니라는 것, 그 속에서 그녀는 혼란스럽다. 헝가리 공주도 아니고, 거리의 꽃파는 소녀도 아닌, 히긴스의 교육 아래 상류층을 흉내낼 수 있는 그녀가 된 그녀는 히긴스가 자신을 소유하되, 사랑하지는 않을 것을 안다.

당시, 여자가 무엇이 되는 일은 힘들었을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이 대개 여자들 인생의 성공의 열쇠였을 테니 가문적 배경이 없는 그녀가 좋은 가문의 남자를 만나 호의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바로 간파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또, 자신을 호되게 가르친 히긴스에게 존경심과 경외감을 품은 연정을 품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버나드 쇼는 그녀와 히긴스 사이에 로맨스와 해피엔딩으로 변형되어 가는 연출에 강하게 반발하고, 스스로에 후일담이라는 챕터를  희곡이 아닌소설 형식으로 한챕터 추가해서, 그녀와 그들 주위 인물들이 어떠한 인생을 살아갔는지, 왜 피그말리온과는 달리, 히긴스와 일라이자가 결합할 수가 없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드리 햅번이 주연을 맡은 <마이페어레이디>를 비롯한 많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은 히긴스와 일라이자가 사랑에 빠지고 둘은 결혼해서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와 연극이 사람을 매혹시키는 건, 구차하고 너저분한 현실을 떠나,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태어나서 목욕한 번 해번 적이 없는 누더기 꽃파는 소녀가 자신을 변화시킨 교수와 사랑에 빠져,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환상적인 이야기에 더 끌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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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5-11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영국은 진짜 아직도 계급이 뚜렷한 거 같아요. 말하는 거 들어보면 출신성분(?)을 알 수 있다고요. 아직도 그렇다는 말 듣고 좀 놀랐습니다. 일례로 윌리엄 왕자비 미들턴 엄마가 왕실 모임에서 토일렛이라고 해서 욕 먹었다고요. 자리가 자리니만큼 그럴 수도... 뒷간 느낌일까요? ㅋㅋ 기네스님은 영국에 계셨으니 잘 아실 것 같습니다.

CREBBP 2015-05-11 21:55   좋아요 0 | URL
평민들이 쓰는 말만 들어서 실제로 계급적 언어를 실감할 기회는 없었지요
그런데 코크니라는 런던 사투리는 자음들을 꿀꺽꿀꺽 심키듯 발음해서 초기에 정말 애를 먹았죠. 티브이에선 반듯반듯 한글로도 옮길 수 있게 또렷이 말하는데 말에요.

에이바 2015-05-11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현지인들은 들으면 바로 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사투리를 미세하게 감지하는 것과 비슷한 걸까요... RP는 멋지지만요.ㅠㅠ 그래도 마음껏 꼬부랑대는 미국식 영어가 더 편해요...

CREBBP 2015-05-11 22:06   좋아요 0 | URL
그런데,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귀족들의 표준어를 배우는 것 같아요. 애가 6살 때 돌아왔는데, 원어민(아마도 캐나다나 호주 출신쯤) 학원 선생이 영국 귀족같은 말투를 쓴다고, 그런데 발음이 계속 희석돼서 미국식 영어로 바뀌는게 안타깝다고들 하더라고요. 우리같은 사람들이야 알아먹고 의사표현 하는게 우선이기 때문에 발음은 뒷전이었죠.

에이바 2015-05-11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아까운데요. 이왕이면 고급 발음이 좋지요. 그러고 보면 아이들은 언어를 빨리 흡수하는 것 같아요. <피그말리온> 끝까지 본 적 없는데 이번 기회에 봐야겠습니다 ㅎㅎ

CREBBP 2015-05-11 23:16   좋아요 1 | URL
결말이 천편일률적인 해피엔딩이 아닌데다가 일라이자가 약간은 히긴스에 대한 마음이 은근히 있음에도 신발짝을 던지는 등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게 전통적인 여성상이 아니라서 좋았고 후일담 만으로도 만담꾼같은 이야기가 있어서 좋았어요. 희곡이라 익숙하지 않은 포맷이지만 이아ㅏ기자체가 워낙 매혹적인 것이라서 재미있게 읽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