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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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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친구의 아들은 왜 다들 똑똑하고 잘생기고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효자고 자상하고 부드럽고 능력있고 모든 여자들이 다 좋아하는 걸까. 왜긴. 엄마 친구 아들이라서다. 여기서 엄마 친구는 엄마의 어떤 친구가 아니라 엄마의 모든 친구들의 교집합이다. 그런 남자, 엄마가 매일 자기 아들과 비교하는 그런 남자가, 단일한 인격체로는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희귀한 종들을 엄친아라고 한다. 또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올 것 같이 길쭉하게 생겨서 부드러운 머리결을 바람에 휘날리며 상콤한 미소를 보내는 남자들을 만튀남 혹은 순튀남이라고도 한다. 이건 만화니까. 어쨌거나. 그런 남자들은 없다. 있다 해도 우리가 아는 건 그의 일부일 뿐. 스위디는 그런 존재였다. 실제로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온동네 모든 소녀들, 친구, 동생의 친구, 학부모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동네를 넘어 도시의 모든 사람들까지 숭배하는, 강인하고 자신감이 넘치고 능력이 있으면서 부모에게는 복종하고 절대로 거만하지 않고, 유대인이라는 낡은 가치에는 도전했던, 이상적인 소년이었다. 훤칠한 키, 금발, 뛰어난 운동신경, 완벽한 빚어진 근육으로 뉴어크의 팬들에게 승리감을 안겨주는 스포츠 스타. 친절하고 상냥하고 부드럽고 균일한 성격과 인내심. 순혈의 북구 피를 가진 사람처럼 금발을 가진 잘생긴 소년 스위디는 미국 이민자들이 4대에 걸쳐 어메리칸 드림을 향해 이룬 과정의 거의 끝인 1960년대 완성품이었다. 그리고 그의 딸 메리는 2천년동안 받아온 박해의 최종 장소인 홀로코스트를 피해 바다 건너 미국으로 온 선조들이 4대에 걸쳐 피와 땀과 민족적 자부심으로 이루어낸 낸 성취를 성년이 되기도 전에 가장 반미국적이고, 폭력적이고, 비타협적이고, 혐오받을 방식으로 박살내었다. 딸 메리로 인해 완벽하고 흠없는 인생이 저 밑바닥 끝모를 나락으로 어지는 과정, 그게 소설의 전체 내용이다. 
 
나는 여기서 스위디의 딸 메리가 극렬 베트남 반전 운동가로서 폭파범이 되어 서서히 스위디와 그의 가족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보다, 소설의 프레임 구조에 숨긴 수수께끼가 궁금했다. 필립 로스는 자신의 분신, 저크맨이라는 1인칭 화자를 통해 스위디의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왜 작품 속 나는 스위디가 아니라 저크맨일까. 게다가 저크맨이 스위디의 이야기를 쓰게 되는 동기와 그에게 스위디라는 한 인물의 인물을 회상하는 묘사는 상세하다. 소설가로서 성공한 나 저크맨은 유대 이민자의 후손으로 가난하고 페쇄된 커뮤니티 내에 살았던 경험 속에서 스위디와 그의 동생 제리와의 기억을 떠올리고, 동창회에서는 고등학교 시절의 온갖 친구들을 만나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수다들을 끝도 없이 묘사한다. 참으로 지루하다. 거기서 그는 스위디의 동생을 만나, 스위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우연하게도, 저크맨은 바로 두 달 전 스위디의 요청으로 수십년만에 그를 만났다. 그는 스위디가 실은 죽기 전 소설가인 자신에게 무엇인가 할 남길 사연이 있었음을 깨닫고 그의 인생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워웨이크의 영웅 스위디에 대한 기억은 소설가로서의 어떤 허구의 인물을 창조하고자 하는 창작자로서의 욕망보다 자신이 아는 스위디의 삶을 재현해보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구에 더 이끌리게 한다. 그러나 스위디는 이미 죽었다. 그는 스위디의 진짜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자신이 아는 것은 독단적이고 냉혹한 성격의 그의 동생 제리를 동창회에서 우연히 만나 전해 들은 짧은 미완의 이야기가 전부이다. 자신의 형을 몰락시킨 주위 사람들에 대한 독설을 토대로, 저크맨은 상상한다. 엄친아, 우리의 영웅 스위디는 어떻게 몰락해갔을까. 

 

그래서 스위디의 이야기는 로스의 소설이 아니라, 로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나, 저크맨의 소설이다. 그는 수십년만의 짧은 만남에서 얻은 아주 작은 단서들과 제리가 알려준 비극적 결말을 실에 꿰어 스토리를 써나간다. 이 때부터 우리는 나 저크맨의 상상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허구 속의 스위디와, 그 스위디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미국적 가치 체계 속에서 나오는 주변 인물의 생각을 만난다. 제리가 전해 준 메리라는 인물이 저크맨을 통해 스위디의 머리 속에서 실패와 독선과 폭력 증오의 화신인 딸이 되어 그녀의 이기적인 아내와 이루어 살아간 '목가적' 삶을 만난다. 저크맨은 스위디가 되어 글을 썼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알고 있는 인물은 스위디 뿐이다. 그를 추적할 수 있는 것은 그를 통과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적 배경 뿐이다. 그래서 실은 스위디를 이해하지 못한다. 스위디를 이해하고 싶다. 스위디의 삶을 좀 더 추적해서 그의 전기를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로스가 로스 자신과 스위디 사이에 나 라는 저크맨을 화자로 등장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 소설이 특히, 제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최대한 스위디의 인생에 가깝게 쓰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는 한 번에 여섯, 여덟, 때로는 열 시간씩 스위드 생각을 하고, 내 고독과 그의 고독을 바꾸어보고, 나와 전혀 닮지 않은 이 사람 안에서 살아보고, 그의 안으로 사라져보고, 낮이나 밤이나 겉으로는 텅 비고 순수하고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이 사람을 측정해보려고, 그의 붕괴의 도표를 그려보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만들어 보기도 했다. 중략. 나는 제리에게 원고를 보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몯고 싶은 아마추어같은 충동을 느꼈다. 121

 

 

로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답해야 하는 역사적 문제 의식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회피하고 싶었다. 전쟁의 광기와 폭력과 혼돈의 시대 속 매리라는 인물을 스스로 규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건 독자들의 몫이니까. 이미 자유라는 이름의 최고 가치가 미국인이라는 자부심과 정체성을 형성한 후에야 자신들의 과거인 이 소설을 읽게 되었으니까. 메리는 스위드의 동생 제리의 눈에, 1960년대 미국의 반항적이고 병적인 광기와 이미 실패한 혁명이란 이름의 모든 폭력적 운동을 상징한다. 우리는 메리를 모른다. 스위디가 상상한 메리의 생각이 있을 뿐이다. 저크맨은 스위디가 메리를 몰이해하는 방식으로 무너져내리게 묘사했기 때문에 독자는 스위디가 바라보는 만큼, 저크맨이 상상한 것만큼 밖에 메리를 알 길이 없다. 첫번째 프레임 내에서 오로지 메리를 보았고, 말을 해본 사람은 냉정하고 비판적인 제리 뿐이다. 그 아이는  어쩌면 착한 아이였을 수도 있다. 자신의 부가 어떤 착취를 통해서 왔는지 자신의 나라가 자유 라는 이름의 오지랍으로 어떻게 베트남 민족을 분열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미국인을 자신과 스위디 사이에 끼워 넣었다.  '로스 ≠ 저크맨  ≠ 스위디'의 공식은 그런 것이다. 이게 나의 생각이다. 

 

 저크맨이 스위디에 대해 가진 환상은 컸지만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단서로 미국의 1960년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창조해 내야 했다. 폭파범은 혁명 전사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미국은 독립과 평화를 원하는 베트남 민간인을 향해 끝도 없는 공습을 퍼부었고, 매리는 '폭력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세상에, 미국 사람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16세의 어린 나이에 폭파범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것을 보는 시각은 제리가 악마라고 규정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제리의 시선을 저크맨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그 길고 상세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고등학교 동창회가 길어졌다. 저크맨의 상상이 빚어낸, 외향적으로는 긍정적이고 평화적이고, 이타적이고 강인한 미국적 가치와 이상적으로 부합되는  스위디를 미국과 동일시하고,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그의 딸 메리를 반미국적으로 대치시켰다. 그리고 그것이 로스의 생각과 어떤 이견이 있는지 어떤 일치가 있는지를 밝히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한 발 더 물러서기 위해 저크맨이라는 인물을 드러내고 자신은 그 뒤에 철저하게 숨었을 것이다.  

 

로스의 알레고리는 미국 = 스위디다. 강인하고 긍정적이고 이타적인 그의 뒤에 숨은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깨닫지 못할 것들. 영원히 알지 못할 것들이다. 그들이 흑인 노동자를 착취한 것이 아니라 '구해' 주고 베풀어 주었다는 근본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자신들이 선하다고 믿는 그 해맑은 미국적 정신이다. 선한 자신들이 과거 인디안에게 그랬듯 흑인 노예들에게 그랬듯 지금 앞으로도 계속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쭈욱 모른 채 선한 얼굴로 남게 될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이 비로 스위디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감추고 떨쳐내 온 미국 사회의 어두운 폭력과 광기로 대변되는 매리의 삶은 그래서 스위디의 기억과 상상으로만 재생된다. 그 재생이 로스의 손을 떠나 제리를 거쳐 스위디의 머리속으로  탄생되는 몇겹의 이중장치를 통해 실상은, 메리의 진짜 마음속, 메리가 품은 이상에 절대로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것과 그 잔인한 폭력의 이면에 갇힌 진짜 문제들을 덮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감추는 것이다. 

 

필립로스는 인물의 생각을 끝도 없이 파고, 파고 또 파서 생각하는 것의 디테일의 끝판을 보여준다. 가죽공장과 장갑을 만드는 공정, 지리적 위치, 대화의 상세한 기술과 묘사는 대단하다 대단하다가 결국 질리기에 이른다. 필립 로스의 소설은 잠시 이제 여기서 고만 보자. 최근 들어서만 <포트노이드의 불평>과 <에브리맨>까지 읽었다. 더 늙어서 쓴 에브리맨에서 작가로서의 원숙의 끝을 보이지만, 포트노이드의 불평은 젊지 않으면 결코 이를 수 없는 위트를, 미국의 목가는 또 그가 그 나이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소설적 완벽함을 보여주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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