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 상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2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연경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보통 소설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 혹은 기분전환을 위해 가볍게 읽는 경우가 많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은 왠만한 사회과학 서적보다 읽기 힘들다. 일단 양이 장난이 아니고 ^^ 러시아 이름들은 어찌나 길고 어려운지. 하긴 이건 모든 러시아 소설 ㅡ 또 인물들 이름이 긴 다른 외국 소설에도 해당되는 사안이니 넘어가고. 등장인물 한명한명이 하나같이 비범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대화를 가만 보고 있으면 도무지 무슨말인지 알아먹기가 힘들다. 대화가 아니라 각자의 만담에 가까운. 인물들이 대개 상궤를 벗어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것 같은 개성의 소유자라는게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장애물이자 가장 큰 매력이다. 인물들의 대화며 행동들은 나같은 빈곤한 상상력의 소유자에겐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하여 애초에 '몰입' 혹은 '분석'따위는 꿈도 꾸지 않고 그저 읽어나갈 뿐이었다. 그로테스크한 유머를 즐기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지독히도 그를 괴롭혔던 간질이다. 간질발작의 의학적 정의는 "대뇌 신경세포에서 유래하는 비정상적이고, 갑작스럽고, 과도하면서 빠른 전기적 신호의 방출에서 유래하는 의식, 행동, 감정, 운동 기능이나 감각의 간헐적이고 상동적인 이상발작"이다. 스스로가 간질 환자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간질발작의 묘사가 종종 등장한다. ("세계와 인간의 모든 비밀이 찰나적인 섬광처럼 환하게 밝혀지는 5초"에 대한 묘사는 [백치]에 아주 상세하게 그려진다.)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 <우주적인 조화의 순간>에 대한 인식이 그의 독특한 인물들을 만들어내는데 상당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무신론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하는 끼릴로프의 인신사상과 직결된다. 그에게는 모든것이 그 5,6초에 의해 해명되고 결정되므로 시계로서 측정되는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의 시계는 오래전부터 고정되어 있고 그는 종종 밤새도록 사색에 잠긴다. 샤또프가 갑자기 들이닥친 만삭의 아내를 위해 물건들을 빌리러 찾아가자, 자지 않고 있던 그는 뜬금없이 출산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곧 나올 아이 때문에 눈이 뒤집힌 샤또프에게) 씨알도 안먹힐 연설을 늘어놓는다.

"...몇 초의 순간이죠. 그것들은 다 합쳐도 고작해야 5초 내지 6초밖에 안 되지만, 당신은 갑자기 완전히 성취된 영원한 조화의 존재를 느낍니다. 이건 지상의 것이 아닙니다. 내 말은 그것이 천상의 것이란 얘기가 아니라, 인간이 지상의 모습으로는 견뎌 낼 수 없는 어떤 것이란 얘기입니다. 물리적으로 변화를 하든지, 아니면 죽어야 합니다. 이건 선명하고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감각입니다.....무엇보다고 끔찍한 것은 이러한 기쁨이 너무도, 끔찍할 정도로 선명하다는 점입니다. 만약 5초 이상 지속된다면, 그러면 영혼은 더 이상 참지 못해서 사라져 버릴 것이 분명합니다. 이 5초간 나는 삶을 사는것이고 이 5초를 위해서라면 내 삶 전체를 내줄 겁니다. 왜냐하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10초를 참아내기 위해선 물리적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난 인간이 출산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표가 성취되엇다면 아이가 무슨 소용입니까, 발전이 무슨 소용입니까? 복음서에는 부활때에는 출산을 하지 않고 신의 천사처럼 될 것이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암시죠. 당신의 아내가 출산을 하고 있다고요?(p.913)"

이 소설은 '1869년 네차예프의 동료살해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어 쓰여진 것이다.처음에는 죽은 동료 이바노프는 샤또프로, 네차예프는 표드르 베르호벤스키로 구상되었으나 일순간 도스토예프스키를 사로잡은 캐릭터 스따브로긴에 밀려 표드르는 약간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얼치기 혁명가 또는 망나니정도에 그치고 만다. 스따브로긴은 누구인가?  허무주의의 극단이자 순수한 악에 가까운, 어머니마저 섬뜩하게 만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가면 같은자. 좀처럼 자신의 작품에 대해 개작은 물론 퇴고조차도 하지 않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처음부터 [악령]을 다시쓰게 만든 살아있는 캐릭터. 이에 대한 베르자예프의 평을 들어보자.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주인공에게 낭만적으로 홀딱 빠졌으며 그에게 사로잡혔고 매혹당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이토록 홀딱 빠진 적이 없었으며, 그 누구도 이렇게 낭만적으로 묘사한 적이 없었다. 니꼴라이 스따브로긴, 그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맹점이요, 매혹이요, 원죄인 것이다.(p.1113. 역자해설 중)"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악령-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자신을 집어삼킨 관념"들과 함께 자살하거나 살해당한다. 처음 그들을 홀린 장본인이 바로 스따브로긴인데, 그는 아무것에도 홀려있지 않은 듯 모두의 상상밖에 있으나 돌연히 본인의 의지대로 자살한다. 역자 해설에 보면 스따브로긴이야 말로 "실상은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홀린 자이며 '부정성'의 극단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ㅡ 하여 결국 파멸할 수 밖에 없는 골수 허무주의자의 수장"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우리 주인공은 끝까지 그에게 홀리지 않았던 다리야에게, 자신은 스위스 우리(Uri)주의 시민으로 등록했다며 자신과 같이 살자고 편지를 쓰고선, 돌연히 자살하며 소설의 결말을 장식한다. 마지막 대사와 화자의 설명을 보자.

"우리(Uri) 주의 시민이 바로 그 곳, 문 뒤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조그만 탁자 위에는 연필로 몇 마디를 적어 놓은 종이 쪽찌가 놓여있었다.  "아무도 탓하지 말라. 나 스스로 한 일이다" 바로 그 곳, 조그만 탁자 위에는 망치며, 비누 조각이며, 필경 예비로 미리 마련해 둔 듯 싶은 커다란 못이 놓여있었다. 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가 자신의 목을 매다는 데 사용한 아주 튼튼한 비단 끄나풀은 필경 미리 잘 골라서 마련해 둔 것인 듯싶엇는데, 비누가 아주 잔뜩 문질러져 있었다. 이 모든것이, 미리 계획했던 일이라는 것과 최후의 순간까지도 의식이 있었음을 말해주었다. 우리 의료진은 시체를 해부한 뒤, 광기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완강하게 부인했다."

* 이 책은 별 하는일 없는 인물의 관찰자의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다른 인물을 설명할때는 종종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자세한 심리묘사가 덧붙여지나 스따브로긴에 대해서는 줄곧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의 카리스마 때문인지 별 설명이 없다. [악령]전체 내용으로는 각 인물들이 스따브로긴에게 얽혀 들어가지만 정작 그의 행동이나 심리에 대한 묘사는 아주 적은 부분뿐이다. 초판본에는 편집장의 강요로 상당수 삭제되었다던 "찌혼의 암자에서"가 말미에 덧붙여있다. 이 부분은 스따브로긴의 고백록으로, 본문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여러 정황들이 밝혀지면서 냉혈한 스따브로긴이 조금은 희화화 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의 개똥철학들, 아무렇지 않게 혁명 운운하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그 당시 러시아의 어수선한 정황이 그려진다. 최근 이백여년동안의 세계사를 되짚어보면 러시아만큼 골때리는 곳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변화가 극심했던 곳이 아니던가. 급변하는 정세, 홍수처럼 마구 유입되는 유럽의 최신 철학사상들. 너나할 것 없이 모두 '혁명'을 말하고 '종교' 또는 '삶'의 본질을 논하던 사회. 1900년대 일제치하 조선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뭔가 한다 하는 사람이라면 너나할 것 없이 독립군 행세를 하던. 얼마전 상영했던 영화 '모던보이'처럼ㅡ 별 생각없이 어쩌다 보니 독립군이 되어버린 그들. 표드르가 만들고 파멸시킨 5인조. 러시아 전역에 거미줄처럼 퍼져서 외국 수뇌부의 지령을 받아 과업을 수행하는ㅡ 과업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고귀한 단체! 허나 다섯명의 고귀한 믿음을 저버리고 끝끝내 "유일했던"단체...

소설 맨 앞장은 성서 구절로 시작한다.  

"마침 그곳 산기슭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 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악령)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나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마귀(악령)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 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읍내와 촌락으로 도망쳐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러 나왔다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마귀(악령)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이 일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마귀(악령)들렸던 사람이 낫게 된 경위를 알려 주었다.....(루가의 복음서 8장 32~36절)"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기대와 달리, 이 책에선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유난히 무신론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죽어가는 순간에 성서를 읇조리며 마음의 평안을 얻는 구세대 지식인 스쩨판 뜨로피모비치도 있다. (참고로 그의 삶과 죽음은 비극보다는 희극에 가깝다.) 가장 강력히 무신론을 주장하고 인간이 곧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자살을 택하는 끼릴로프도, 그의 죽음은 단지 망나니 뾰드르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뿐이고, 그마저도 우아하지 못한 기이한 소극을 연출하며 어리버리 죽는다.. 그럼 신이 있다는 건가? 글쎄 소설의 전개는 그렇게 순탄하지 않다. 어리버리한 사람들은 스따브로긴에 얽혀 어찌어찌 죽고, 남은 사람들도 거의 파탄에 이른다. 다른 이들을 파멸로 몰아넣은 비열한 뾰드르 - 가장 저열하고 더러운 악령에 홀린 - 가 거의 유일하고도 뻔뻔한 생존자다. 고귀함이니, 러시아의 본질이니,  순수한 열정을 떠들어 대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천박함, 비열함, 혹은 우스꽝스러움의 연속이다. 줄거리만 보면 뭐 하나 아름다운게 없다. 이런 부조리함 속에서 작가가 보여주려는 것은 결국 인간, 인간다움이다. 우리의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작가의 목적이 다 다르듯 독자의 목적도 모두 다르다. 삶의 지혜를 얻는 이도 있고, 감동 또는 지극한 공감을 얻는 이도 있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또는 판타지적 재미 또는 내면의 성찰...모든것이 목적이 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모르겠다. 현재로서는 그저 감탄할 뿐이다. 그가 만들어 낸 인물들의 매력에 푹 빠지기에도 아직은 내공이 모자란 탓에..

나보다 도 선생에 일찍 빠져든 어느 서재지기님이, 도 선생의 다른 작품들이 "제주 패키지 여행"이라면, [악령]은 '제주올레'라는 비유를 드셨다. 제주올레를 걸어보지 못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비유다만...이 작품, 특히 '스따브로긴'이라는 캐릭터가 뿜어내는 매력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본다. 단, '악'이 주는 매력에 빠질 용의가 있다면.... 나는 굉장히 재미없고 고지식한, 한마디로 "착한척 하고 싶은" 인간이다만, 스따브로긴 만큼은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똑같이 악한 이미지라도 표드르는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하긴 그게 그 캐릭터의 매력이자 운명이겠다만.) [백치]의 미쉬낀 공작이 주는 - 너무 순진하고 가식없는, 날것 그대로인 -  매력과는 다른. 악하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캐릭터.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하나씩 읽어가고 있고, 별 일 없는 한 전집을 다 읽을 계획인데, 까라마조프만은 대단원을 장식하려 꾹꾹 참고 남겨두고 있다. 대심문관의 이야기는....어쩐지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인간의 심리를 공부하려는 내게, 도스토예프스키는 필수 코스가 되어버렸다. 충분히 홀릴만한 가치가 있는, 아니, 홀려버리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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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2-09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악령, 나는 아직 넘지 못한 산이에요.
초등독서회에서 방학이면 '고전읽기'에 몰입해서 4년전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열린책들)'을 읽고 어찌나 스스로 대견스러웠던지~~ 대심문관 부분은 다시 또 읽으며 감동 먹었죠.

순오기 2008-12-09 00:11   좋아요 0 | URL
아래글을 읽어보니 패키지와 제주올레로 정의하신 분이 '승주나무'님이군요.^^
죄와 벌은 거의 30년 전에 교회 고등부 학생들과 독서모임할 때 토론했던 기억이 스멀거리네요.ㅋㅋ

Jade 2008-12-09 11:01   좋아요 0 | URL
ㅋㅋ 네 승주님도 도 아저씨에게 빠지셨더라구요~

전 대학 1학년때 까라마조프 읽긴 했는데 기억나는게 없어서....-_-;;
이번엔 경건한 마음으로! ㅎㅎ

승주나무 2008-12-09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예전에 읽었던 느낌들이 확 살아나는 느낌. 낯이 붉어지네요~
이런 제이드의 재현술이 극에 달했도다. 뾰뜨르의 '콩 뿌리듯' 말하는 모습이 엉뚱하게 떠오르네요.

제주올레와 패키지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지만,
악령을 쓰면서 도 선생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C8, 그냥 끝까지 가불자..."

Jade 2008-12-10 01:36   좋아요 0 | URL
ㅋㅋ 한번에 필 꽂혀서 좌르륵 쏟아냈을 도 아저씨의 광기(!)에 그저 감탄할뿐..

Alicia 2008-12-1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져있어요? ^^
전 부끄럽게도 아직 도스토예프스키는 못읽어봤어요. 전작주의로 나간건 몇명안되구요. 중3하고 고등학교때 삘받아서 톨스토이하고 투르게네프,헤세의 장편들을 몰아서 많이 읽었고.(그래서 그동안 삶이 가볍지 않고 너무 무거웠나봐요.)
문학전공하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었서 다른전공 택했고.. ^^
근데 요즘은 책고르는데 들이는 시간이 아까워서 검증된 책을 찾게 돼요 저 너무 게으르죠~~ ^^

제이드님 요즘 편안해보여요. :)

Jade 2008-12-10 21:29   좋아요 0 | URL
헉 중고등학생때 알리샤님 문학소녀셨군요! 전 생각없는 중고딩이었는데...ㅋㅋ

저도 대학와서 가끔 수능 다시봐서 인문대 갈까 생각 했었어요. 나이 들어서 여유가 좀 생기면 학교 다시 다니고 싶기도 하고...^^

알리샤님 요즘 바쁘신가봐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하실정도면..저는 이것저것 꽂히는대로 읽어요. 요즘은 할일이 너무 없어서요..ㅋㅋ

집착을 내려놓으니 편해요 ^^

2008-12-10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0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3 0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3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