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린 머독의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를 읽었다. 리뷰를 쓰는 데 책의 내용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 떠올라서 따로 잡다한 글을 하나 써보기로 했다. 


이 책 앞표지, 뒷표지 날개에는 저자 모린 머독이 미국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을 만난 에피소드가 나온다. 저자는 캠벨의 말에 충격을 받고 여성을 위한 영웅의 여정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의구심이 드는 지점이긴 했다. 내가 여태 읽은 캠벨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기 때문에. 특히 캠벨은 『여신들』(1972-1986년까지 캠벨의 강연을 엮은 책이다)이라는 저작에서 지금까지의 신화가 아닌, 앞으로 여성이 창조해나갈 신화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신화 속에는 독자적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여성을 위한 모델은 없다. 또한 이런 여성들과 결혼하려는 남성을 위한 모델도 없다. 우리는 이를 흔한 동정심이 아니라 공감 속에서 서로 성장을 끈기 있게 격려하면서 함께 풀어 나가야만 한다. - P12

 

없는 미래 속으로 아무런 대책 없이 휩쓸려 빠져들게 되는 시대이기에 개인은 모두 자기만의 방식을 만들어야만 한다. 낡은 모델은 이미 역할을 다했으며, 새로운 모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우리의 삶을 재미있게 만들고, 가운데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있는 것은 우리 (p. 13)신이다. 그것이 오늘날 도전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선조'이며, 부지불식간에 미래의 삶에 영감을 불어넣을 신화 모델과 그것을 지켜 신화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아주 실제적 의미에서 지금은 창조의 시대다. - PP12-13.


수세기에 걸쳐 남성들이 해방되었듯이, 여성들 역시 해방되어 독자적, 개인적인 발전을 이루어 있게 되었다. 남자들을 지배적 지위로 올려놓은 것은 근육의 힘이나 이러저러한 것들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해방이었다. 남자들은 과거 자연이 부여한 역할들로 이상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 P443

 

나는 여학생들에게, 신화에 대해 내가 말할 있는 모든 이야기란 남자들이 오래전부터 말해 왔고 경험해 왔던 바에 불과하니, 이제부터는 여자의 관점에서 여성들의 장래의 가능성에 대해 남자들에게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전했다. 그렇다. 그것이 미래일 것이다. - P444


그렇긴 한데 캠벨이 머독에게 한 말은 캠벨이 다른 저작에서 비슷하게 말한 점이기도 하다. 어느 책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자 아이는 신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히 정신적으로 성숙해지지만 남자 아이는 그렇지 못하므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한다 였던가? 저자 모린 머독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쨌든 모린 머독은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에서『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캠벨이 제시한 (남성을 위한) 영웅의 여정과는 다른 (여성을 위한) 영웅의 여정의 구조를 제시하였다. 다만 『여신들』에서 캠벨이 말한 바를 실천하는 데 앞장선 것일까? 다른 학문에서 흔히 보이는, 후속 세대가 선구자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학문을 발달시키는 것과 유사한 과정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모린 머독의 책을 읽으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캠벨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캠벨의 저작과 만난 날은 2020년의 어느 날이다. 지금 구매리스트를 체크해보니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신화의 힘』 중고를 산게 2020년 4월 18일이다. 캠벨과 만나기까지의 여정은 개연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여정이었다. 그 시작은 2010년대 중반의 어느 날까지 거슬러간다, 그 무렵 헤이든 화이트의『메타 역사』라는 책과 만났다. 




화이트의 책은 그 어떤 역사책이나, 역사에 관한 역사책과도 다르다. 화이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역사는 역사가들이 세계관, 장르, 은유 기법으로 '플롯화'한 것이며, 역사는 과학보다는 문학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런 화이트의 주장을 접하면서 이 책에 언급된 역사가와 역사철학자들의 책을 찾아보기도 했다. 가끔 화이트의 주장이 언급되는 책(ex: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보면 내심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화이트의 책을 읽은 후 마음 한켠에는 엉뚱하게도 이야기,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화이트의 책 자체가 역사가/역사철학자의 역사 서술에서 플롯을 읽으려는 시도이니,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은 꺼지지 않고 오래 갔지만 그렇다고 확 타오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2019년에 영화를 하나 보고나서 뒤늦게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에 확 꽂혔다. 그 결과 알라딘 중고서점을 기웃거리며 이책 저책 사서 읽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시학을 구매하던 시절이었다.



읽으면서 학부 수업 때 교수님이 인용한 문구를 그대로 봤다. 시는 진리를 말하지만 역사는 일어난 일만 말하므로 시가 역사보다 위랬던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던 주장을 원전(번역본이기는 하지만)으로 직접 접해보니 느낌이 상당히 묘했다.


이야기를 창조하는 대표자하면 역시 작가. 그래서 운좋게 중고서점으로 『작가란 무엇인가?』를 구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한건 막상 구해놓고 아직도 안 읽었다는 점.


 


그러다 2022년 헤밍웨이 탄생 123주년 리커버판이 새로 출간되었다. 




아무튼 2020년 초 무렵 관심사가 과학으로 점차 옮겨갔다. 이유는 모르겠다. 개연성이랄 만한 것도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굳이 개연성을 따지자면 개인적으로 꾸준히 관심을 가진 저자가 사회, 경제학적 서술을 할 때 과학 지식(그것도 생물학) 지식을 잔뜩 끌어왔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과학자 중에서 다윈은 사회과학 서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서 예전부터 과학 중에 생물학 책은 가끔 챙겨보곤 했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자주 챙겨봤다. 


무슨 책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어떤 생물학자가 쓴 책에서는 인문학도들에게 당부하기를 "생물학은 다른 과학처럼 수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니 "생물학도 같이 공부해라!" 이랬던 것 같기도 하고. 분명 어느 카페에 앉아 그 책을 읽었는데, 카페의 위치와 카페에서 책을 읽은 장소까지도 정확히 기억난다. 그런데 막상 책 제목과 저자 이름만 기억나지 않는다. 내 뇌가 용량을 확보하기 위해 망각해버렸나보다.


코로나 팬데믹 초창기 시절, 정부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및 마스크 쓰기 실천을 당부하던 시절,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마이클 액셀로드의 『협력의 진화』를 읽고 난 후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게 된 순서는 오래전 다른 도킨스의 책들과 함께 사 놓고 책장에 고이 모셔만 둔 『이기적 유전자』를 먼저 꺼내 읽고, 『이기적 유전자』에서 언급된 『협력의 진화』라는 책에 흥미가 가 중고로 구매해 읽은 후, 도서관인지 집안의 서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 눈에 띄여 읽었다.


  


윌슨의 『통섭』에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영웅의 여정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기억에 의거해 내용을 추리자면 인간의 두뇌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하나가 아닐까? 이런 뉘앙스 였던 걸로.


그렇지만 바로 캠벨과 연결되진 않았다. 『통섭』을 읽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중간 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마침내 캠벨의 책을 알라딘 중고로 주문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힘』을 같이 주문했다.


 


나중에 이 두 책의 최신 판본이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가격이 높아진 탓에 출판사를 향한 비판이 자주 보였다.




어쨌든 두 책을 읽으면서 캠벨에 빠졌다. 책을 읽기 전에 아는 신화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만한 단군 신화와 가나출판사에서 2000년대 초에 출판, 한창 신드롬을 일으키며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된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시리즈 뿐이었다. 이집트 신화, 북유럽 신화는 건너 들은 수준. 북유럽 신화 같은 경우는 토르가 워낙 유명하니 상세한 내용은 몰라도 오딘, 토르, 로키 정도만 알고 있었다. 이집트 신화는 오시리스가 세트에게 죽은 후 이시스에 의해 부활, 저승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점 정도. 그정도로 특별히 신화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다.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얕았는지 알게 되었다. 신화가 허무맹랑한 옛날 이야기, 혹은 재미를 전달하는 데 그치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 인간의 가치관, 세계관, 무엇보다도 삶을 바라보는 태도, 삶을 어떻게 이어나가야하는 가에 대해 알려준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지점은 캠벨이 제시한 영웅의 여정을 삶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다는 점일까. 혹은 삶에 구조를 부여한다는 점일까. 거창한 사례를 들 필요 없이 잠에서 깨어나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잠들기까지의 과정도 영웅의 여정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삶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캠벨은 순식간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 목록에 들어가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지금까지의 인문학 공부도 돌이켜볼 수 있었고, 뭔가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어려운 책도 한층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기도 했다(그래도 읽기 어려운 책은 여전히 읽기 어렵다).


그 후 지금까지 중고, 새 책 통틀어 캠벨의 책 중에서 구할 수 있는 캠벨 책은 다 구한 듯 하다. 앞에서 언급한 『여신들』만은 못구해서 도서관에서 빌려봤다. 『여신들』은 밑에 나열한 책들에 비해 읽기 쉬운 편이긴 했다.


    



때마침 캠벨의 저작이 새로 출간되기도 했다.



다만 이쯤 오니 캠벨이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해서 한다는 느낌도 조금 들었다. 캠벨의 여러 저작들을 읽으면 같은 사례를 드는 경우를 몇 번씩 보게 된다. 연구서에 가까운『신의 가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도판집에 가까운 『신화의 이미지』를  제외한 나머지 저작들은 대중 강연을 엮은 책들이다 보니  이런 경향이 더하다. 


그렇긴 하지만 내가 캠벨에 관해 완벽히 이해했느냐 하면 그건 아닌 듯 하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캠벨에 관해 설명하시오'라고 하면, 제대로 설명할 자신은 없다. 한창 캠벨의 책을 읽을 당시에는 지금처럼 책을 읽고 글을 남긴다는 생각도 없었고,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지도 않았고, 기껏해야 인상적인 구절 몇 개 인용해서 기록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 시절 캠벨을 읽으면서 담은 지식은 뇌가 거의 다 망각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읽으면서 느꼈던 느낌만 잔재처럼 남아있다. 캠벨의 책들을 접하면서 이전에는 보지 못한 것들, 알지 못한 것들이 다가온 점도 있고, 어떤 점은 허무맹랑하다 싶었던 점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캠벨이 '벼룩 조차 생명의 신비를 품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보고 이 세상에 나쁜 책은 없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점도 있다. 내가 무슨 책을 읽든, 내용이 좋든 나쁘든, 번역이 좋든 나쁘든 간에 '책'은 '책'이고, 나의 지적 여정을 이루는 과정의 일부분을 이룰테니까. 


지금 다시 캠벨의 책들을 읽으라면 읽기는 하겠는데 읽고 나서 생각을 정리해 리뷰로 쓰려면 한참 걸릴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머독의 책은 캠벨에 비해 생각도 금방 정리되고, 글도 빨리 써진 것 같다. 아니면 그동안 캠벨에 관해 읽은 것들이 머리 속에 정리가 안된 채로 널부러져 있다가 머독의 책을 계기로 다시 정리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참 정신없는 지적 여정이었다. 시작도 뜬금없지만, 중간과정도 뜬금없고, 캠벨에 도착하는 지점에서는 중간 과정도 생각이 안 날 정도. 


마지막으로 머독의 책을 만난 계기는 캠벨에 비하면 다소 간단하다. 2022년 어느 날 도서관에서 무심코 '영웅의 여정'으로 검색하다 『여성 영웅의 여정』을 발견했다. 때마침 SNS에서 개정판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가 발간된다는 광고를 보고 바로 주문했다. 다만 읽은 것은 책을 사두고 1년이 지난 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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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 - 융 심리학으로 읽는 자기 발견의 여정
모린 머독 지음, 고연수 옮김 / 교양인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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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마이어의 문명"이라는 게임 시리즈가 있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게임사가 선별한 유명 문명의 지도자가 되어 문명을 이끌어나간다. 게임 제작자들이 만든 룰을 따라 게임을 하다 보면 처음에는 무척 재밌다. 게임 초반, 미지의 세계 속에 내던져진 약소한 문명을 거대 제국으로 일구는 재미는 그 어떤 게임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뒤로 갈수록 재미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약소한 문명이 거대 제국이 되어 갈수록 플레이어는 문명을 이끄는 영웅이자 리더에서, 단순히 마우스 버튼이나 딸깍이며 거대 제국의 잡무를 처리하는 공무원, 마우스 클릭 손가락 노동자가 된다. 이 시점에서 플레이어는 "내가 왜 이 게임을 붙들고 있지?" 라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품을 수 있다. 이 시점에서 플레이어는 억지로 게임을 이어나가 승리를 이룰지, 메뉴를 켜서 게임을 종료하고 바탕화면으로 나가기를 누를지 선택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많다. 다른 장르의 게임들을 즐기다 지겹다, 혹은 나와 맞지 않다 싶으면 접속을 종료하거나, 게임을 끄면 된다. 음악을 듣다가 지루하거나 내 취향이 아니다 싶으면 음악을 끄면 된다. 독서를 하다가 졸리다, 이 책이 아니다 싶으면 책을 덮고 다른 일을 하거나 자면 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다가 이 영화는 나와 안 맞다, 혹은 영화가 별로다 싶으면 극장에서 나가거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끄면 된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인생에는 게임처럼 로그아웃, 접속종료, 바탕화면 나가기, 프로그램 종료하기 같은 선택지가 없다. 누군가는 우리가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다거나, 시뮬레이션 속 가상 인물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게임에서와 달리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메뉴버튼도, 플레이/중단 버튼도 없다. '매트릭스를 나간다' 혹은 '시뮬레이션을 종료한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다.


한창 인생에서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달려왔는데, 어느 시점에서 공허함과 허무함을 마주할 때, 내가 걸어온 길이 부정당한다고 느낄 때, 사실 우리는 삶에서 새로운 여정의 시작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삶에서 바로 그런 순간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지침이 되어준다. 


들어가기에 앞서 책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이 책을 쓴 모린 머독은 융 심리학 치료사이다. 이 책은 1990년에 출간되고 2020년에 개정판이 나온 "The Herione's Journey"의 번역서다. 2014년 같은 역자를 통해 『여성 영웅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 번역되었다. 개인적으로 기존 번역인 『여성 영웅의 탄생』보다는 개정판의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원래 제목이 책의 내용 전반을 포괄하긴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미국의 비교종교학자이자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과의 만남에 있다고 말한다. 책 표지의 앞날개와 뒷날개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저자는 캠벨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캠벨과 만나기 전, 저자는 여성 영웅의 여정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 했다. 그런데 캠벨은 남성과 달리 여성은 여정이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이에 실망한 머독이 내놓은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기 전 한 가지 기대한 지점이 있었다. 내심 캠벨의 글처럼 여러 신화를 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로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신화학자여서 세계 각지의 다양한 신화를 예시로 들고 오는 캠벨과 달리, 머독은 융 심리학에 기반한 심리 치료사여서 몇몇 여신들이 등장하는 신화(아테나,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인안나, 칼리 등)를 언급하기는 하되 신화보다는 자신에게 내담한 내담자들, 그리고 머독 자신이 겪은 사례를 자주 든다. 


책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 책은 여성 영웅의 여정과 실제 여성들이 겪은 여성 영웅의 여정의 사례들을 다룬다. 여기서 알 수 있겠지만, 책에서 말하는 여성 영웅은 '초인'이 아니라 평범한 여성이다. 먼저 머리말에서는 여성 영웅의 여정이 제시된다. 머독이 제시하는 이 여정은 여성이 현실에서 거치는 여정이며, 외롭고 힘든 길이다.


오늘날 여성들은 탐색의 여행을 하고 있다. 이 여행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지 그리고 여성성에 난 깊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지를 배움으로써 자신의 여성적 본성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온전하게 통합되고 균형 잡힌 전인(全人)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내면으로의 여정이다. 대부분의 여행처럼 여성 영웅의 행로도 쉬운 길이 아니다.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고 알아보기 쉽게 설명한 여행 책자나 지도도 없다. 몇 살에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지도 정해져 있지 않다. 또 이 여정은 절대로 곧게 뻗은 일직선 도로를 따라가지도 않는다. 외부 세계는 이 여정을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방해하거나 간섭한다. - P26


총 10단계로 구성되는 여성 영웅의 여정은 1. 여성성 분리 2. 남성성과 동일시, 그리고 조력자를 만남 3. 시련의 길: 괴물과 용을 만남. 4. 성공이라는 허황된 열매를 찾음 5. 정신적 메마름 자각: 죽음 6. 여신으로 입문과 하강 7. 여성성과 재결합을 갈망함 8. 모녀 분리 치료 9. 상처 받은 남성성 치유 10.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으로 이루어진다. 캠벨의 영웅의 여정처럼 머독이 제시하는 여성 영웅의 여정 역시 원형의 구조를 띤다. 


책의 본문 구성은 이 여성 영웅의 여정을 그대로 따라간다.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본문은 해당 여정의 단계에 맞춰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은 여성 영웅이 거치는 각 단계의 여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여정의 기본적인 흐름은 딸들이 어머니 대신 아버지를 롤모델로 삼고 자라난 끝에 사회적 성공을 이루지만 그 대가로 자신을 희생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내면으로 하강하여 잃어버린 자신의 본 모습을 포용하고 되돌아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기본 전제로 깔고 있는 것은 가부장적 문화가 여성의 본모습을 가려왔으며, 여성은 이 가려진 모습을 되찾아야한다는 점이다. 여정의 1단계부터 4단계까지는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자라난 여성이 가부장적 문화를 내면화하려는 헛된 시도다. 5단계부터 마지막 단계까지는 가부장적 문화 속에 가려진 여성 내면의 본모습을 되찾고 가부장적 문화가 여성에게 덮어씌운 베일을 벗는 과정이다. 저자의 고민은 여성들이 가부장 사회가 여태 가려온 자신의 본모습을 어떻게 일깨울 것 인가이다. 


오늘날 여성적 영성이 중요한 관심사가 된 이유는 아주 많은 여성들이 남성 영웅의 여정을 따랐지만 결국 개인적으로도 공허하고 인류에게도 위험하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 따를 만한 다른 모델이 없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 영웅의 여정을 모방했다. 여성의 삶은 남성중심적인 문화에서 여성으로서 ‘성공‘하거나 남성에게 지배당하고 의존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오늘날 서구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변화시키려면 새로운 신화와 여성 영웅을 찾아야만 한다. - P39
우리 사회는 남성 중심적이다. 남성 중심적이라는 말은 남성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남성들은 자신의 지성, 추진력, 신뢰성을 지위, 권위, 경제적 이익이라는 결과물로 보상받는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비슷한 수준의 보상을 받지만 평등하지는 않다. 만일 여성이 남성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남성들이 규정한 문화의 잣대로 끊임없이 자기를 평가한다면, 자신에게 결함이 있거나 남성들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여성은 결코 남성이 아니다. ‘남성처럼 훌륭해지려고‘ 애쓰는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여성성을 훼손한다. 여성들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과 자신이 지니고 있지 않거나 성취하지 못한 것들의 측면에서 스스로를 규정하면서부터 여성으로서 자신을 평가 절하하고 감추기 시작한다. 여성들의 이러한 평가 절하는 어머니에 대한 평가절하에서부터 시작한다. - P48

자신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딸‘로서 살아왔음을 깨달을 때, 우리에겐 몇 가지 캐내야 할 것이 있다. 문화라는 의복으로 덮어 감추기 전에 우리들 것이었던 우리의 일부를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 P203


여성 영웅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책의 대상 독자는 여성이다. 이 책에서 특히 경계하는 것은 끊임없이 목표를 이루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변질된(혹은 상처받은) 남성성'이다. 저자는 '변질된 남성성'을 탐욕스러운 폭군에 비유한다. 이 폭군은 만족할 줄을 모르며 (여태 지속된 가부장제) 사회가 정의한 성공을 이루라고 여성을 채찍질하고, 혹시 여성이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기미를 보이는 순간 '네가 지금껏 이루어 놓은 것들이 모두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조금만 더하면 성공할 수 있는데?'라면서 협박과 유혹을 해온다. 저자는 여성이 이 변질된 남성성 혹은 폭군에 가려진 진짜 자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때부터 진정한 여성 영웅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떤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생각하고, 남성들과 경쟁하고, 남성들의 게임에서 남성을 이기는 방법을 배우는 것에 크나큰 자부심을 느낀다. 이런 여성들은 영웅적인 성취를 이룬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결코 ‘충분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 신경을 갉아먹히는 듯한 괴로움을 느낀다. 그들은 남성들과 같아지고 싶어 점점 더 많은 일을 한다. - P97

무의식의 남성에 붙들려 있을 때 여성은 자신이 무엇을 하건, 어떻게 하건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그가 계속해서 또 다른 것을 추구하도록 몰아대기 때문에 한 가지 과업을 완성(p. 143) 하는 것으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가치가 없다. 무의식 속의 남성은 미래를 생각하라고 다그친다. 여성은 비난받았다고 느끼지만 내면의 결핍된 부분에서 이런 반응이 나온다. "맞아. 어떤 걸 좀 더 해야 해. 이걸로 충분하지 않아." - PP.142-143.

겉도는 내면의 남성성에 자신의 인생을 맡긴 여성은 남성들이 세운 기준에 맞추어 성공하려는 욕구에 휘둘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건강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려면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영웅적 여정의 보상에 관한 여성 영웅의 예상은 틀렸다. 물론 그녀는 성공과 독립과 자율 따위의 보상을 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이나 영혼의 한 조각을 잃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성은, 목표 지향적인 남성적 사고를 신뢰하면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문화적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개인적 사고방식에도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착한‘ 딸이 되어라, 그러면 ‘아버지‘가 널 돌봐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위로받지 못하고 철저히 혼자라고 느낀다. 그녀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녀의 질서정연한 세계에 금이 간다. - P154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들, 저자인 모린 머독과 머독을 내담한 내담자들은 스스로 남성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혹은 남성처럼 사회에서 성공을 거두고자) 스스로를 채찍질한 결과, 오히려 허무함과 마주했다. 


남성성은 원형적 힘이다.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성처럼 모든 여성과 남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창조적인 힘이다. 남성성은 균형을 잃거나 삶과 유리될 때 전투적이거나 비판적이거나 파괴적으로 변한다. 이렇게 삶에서 유리된 원형적 남성은 차갑고 비인간적일 수 있으며, 인간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이 남자다움은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저 전진하라고 말한다. 완벽과 통제와 지배를 요구한다. 어떤 것도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의 남성적 본성은 어부 왕처럼 상처를 입었다. - P298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 극복 대상으로 제시되는 '변질된 남성성,' 혹은 '상처입은 남성성'은 사실 개인에게 덧씌워진 '가짜 자아'라고 생각한다. 이 가짜 자아는 진짜 자아인 것처럼 위장해 개인의 멱살을 잡아 끌고 간다. 그 목적지는 남들에게 인정받는/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회적/경제적 성공이다. 그 자리에 멱살 잡혀 끌려온 개인 스스로를 위한 자리는 없다. 말하자면 기계처럼 돌아가는 사회 속에 개인을 톱니바퀴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과정이고, 고장나거나 마모될 경우 그 즉시 폐기처분 해버리는 것이다. 이 가짜 자아 이야기는 에리히 프롬의 책에서 본 내용이 내 머리 속에서 적당히 걸러지고 혼합된 것인데,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머지 전부를 제쳐두고 달리기만 해온 여성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을 멈추고 그동안 돌보지 않은 자기 자신, 가부장적 문화 속에 가려진 자신, 상처받은 자신의 내면 속으로 '하강'한다. 


가부장제를 거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남성성과 새로운 관계를 발달시키기 위한 새로운 공간을 우리 내면에 창조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새롭게 관계를 맺을 남성은, 우리 문화에서 많은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세기에 걸쳐 여성성과 분리되어 있던 남성적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를 위대한 어머니에게 데려다 줄 창조적인 남성이다. 위대한 어머니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여성적 본성에서 분리된 상태를 치유할 수 있다. 가부장제를 거부하면서 우리는 "5천 년 동안 추방된 여성성의 힘과 열정이 잠들어 있는 땅속 깊숙한 곳, 여신의 정신을 향해 하강"을 시작한다. - P172

하강은 영혼의 어두운 밤, 고래의 뱃속, 암흑의 여신과의 만남, 지하 세계로 가는 여정으로 여겨지거나 또는 그저 우울증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강은 대개 삶을 통째로 바꿔놓는 상실에서 비롯된다. - P177

지하 세계에는 시간 감각이 없다. 시간은 무한하고 그곳을 서둘러 떠날 수도 없다. 아침도 없고 낮도 없으며, 또는 밤도 없다. 칠흑같이 어둡고 혹독하다. 온통 암흑뿐인 지하 세계는 축축하고 차갑고 뼈가 시리다. 지하 세계에는 쉬운 해결책이 없다. 빠져나가는 지름길도 없다. 울부짖음이 그친 그곳엔 침묵뿐이다. 여성은 벌거벗은 채 죽은 자들의 뼈 위를 걷는다. - P178

어머니를 거부하면서 여성성의 거울이 산산조각 난 여성은 분리된 자신의 부분들을 되찾기 위해 땅속 깊이 내려간다. 이 여행중에 여성은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몸, 자신의 감정, 자신의 성적 취향, 자신의 직관, 자신의 이미지, 자신의 가치,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될 수 있다. 이것들이 그녀가 그 깊은 곳에서 찾는 것들이다. - P181


그 과정을 거치면서 잃어버린, 혹은 망각당한 자신의 본모습을 만난다(이는 폭군과는 거리가 먼 내면의 창조적 남성성의 인도를 받아 위대한 어머니, 지모신과의 만남을 이루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여성은 그 전부를 포용하면서 하강을 끝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이 단계를 거친 여성은 자신을 돌볼 줄 알게 되고 더 이상 '탐욕스러운 폭군'에게 휘둘리지 않게 된다. 


하강을 끝내고 돌아올 때 여성은 자신의 몸을 되찾는다. 그 결과로 그녀는 자신의 건강한 몸 상태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여성성의 신성함을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한다. 그녀는 이 표현의 필요성을 분명히 의식하기 시작한다. 의식적인 영양 섭취, 운동, 목욕, 휴식, 치유, 섹스, 출산, 죽음을 거치며 그녀는 우리에게 여성성의 신성함을 일깨워준다. - P230
하강을 한 여성은 여성성의 탐욕스러운 파괴자 양상을 경험한다. ‘지상의‘ 삶에서 분리된 이 기간 중에 자신이 쓸모없다거나 자기 삶이 메말라버린 느낌을 경험하고 나서 여성은 창조적인 여성성의 촉촉하고 푸르고 물기 많은 측면을 갈망한다. 자신의 여성성과 단절되었다고 느끼는 여성은 창조성이 솟아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낄 때 천천히 자기 정체성을 되찾기 시작할 것이다. 정원에서, 주방에서, 집을 꾸미면서, 인간관계 속에서, 뜨개질을 하면서, 글을 쓰면서, 춤을 추면서 재생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여성의 심미적이고 관능적인 감각은 색깔, 냄새, 맛, 촉각, 소리로 새로운 활력을 얻으면서 되살아날 것이다. - P245
여성 영웅은 자신의 본성을 인식하는 대로 숨쉬면서 우리 모두에게 지(p. 321)식을 불어넣어 우리를 치유한다. 여성 영웅은 양쪽 세계의 여왕이 된다. 그녀는 일상이라는 삶의 바다를 항해하며 심오한 가르침에 귀 기울일 수 있다. 하늘과 땅의 여왕이면서 동시에 지하 세계의 여왕이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에서 지혜를 얻었다. 더는 다른 쪽을 비난할 필요가 없다. 그녀가 바로 그 다른 쪽이다. 여성 영웅은 세상과 지혜를 나누려고 자신이 얻은 지혜를 되가져 온다. 그녀의 경험이 세상의 여성들, 남성들, 아이들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 PP 320-321.


여기서 개인적으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지점이 있다. 이렇게 여성 영웅이 본 모습을 깨닫고 변신하게 될 때, 성장한 것일까? 본모습을 되찾은 것일까? 정답은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난 수천 년 동안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신화가 전해져 왔다. 남성 중심의 신화 속에서 남신은 그 이전부터 존재한 여성적 신화 속 여신의 지위를 강탈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우라노스-크로노스를 거쳐 제우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신이 되었다. 바빌론 신화에서는 마르두크가 티아마트를 살해했다. 


역사적으로 육체와 영혼의 연결은 지모신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파괴되었다. ‘어머니 대지‘가 대대적인 파괴의 위협을 느끼는 지금에 와서야 관계가 회복되고 있다. 인류가 대지의 신성함을 잊고 숲이나 언덕이 아닌 교회나 성당에서 신에게 예배하기 시작했을 때 자연과 맺은 신성한 ‘나와 너(I-Thou)‘의 관계는 잊혀졌다. 우리는 어머니 대지의 모든 종(種)과 서로 연결된 대지의 자손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모든 생명체, 나무, 바위, 대양, 짐승, 조류, 아이들, 남자, 여자로 구현된 신성함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자연의 성스러움을 무시하는 것이 육체의 신성함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 P221

20세기 후반 들어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 신화가 가려버린 여성적 신화를 발굴하고 복원하려는 시도, 새로운 여성 신화를 창조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인류 역사에 협력 관계가 중심인 사회들이 존재한 시기가 많았다. 그런 사회에서는 생명을 잉태하고 보살피는 신성성의 양상이 일상적 삶의 한 부분으로 숭배되었고, 종교적이거나 일상적인 일들을 수행하는 데에 성차별이 없었다. 서유럽의 구석기 시대 동굴과 차탈회위크와 하실라르의 무덤뿐만 아니라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 영지주의 기독교, 초기 켈트족, 아메리카 원주민들, 발리섬의 원주민들, 그밖에 많은 곳에서 이런 사회가 존재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 P336

낡은 이야기는 끝났다. 영웅적 탐색의 신화는 진화의 나선 위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일시적인 명예에 불과한 직함이나 성취, 갈채, 부의 추구 같은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한 탐색은 더는 타당하지 않다. 그 엉뚱한 탐색은 여성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어머니 대지에 너무 비싼 통행세를 치르게 했다.

오늘날 여성 영웅은 자신을 과거에 묶어놓았던 자아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신의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찾기 위한 분별의 칼을 들어야 한다. 어머니를 향한 분노를 놓아버리고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우상화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한다. 자신의 어둠을 대면할 용기를 찾아야 한다. 그녀의 그림자는 이름 지어주고 껴안아줘야 할 바로 자신의 것이다. 여성은 자신 안의 이 어둡고 그림자 진 공간에 명상, 미술, 시, 연극, 의식, 관계 맺기, 흙을 만지는 일을 함으로써 빛을 비춘다. - P347

한 가지 더, 저자 모린 머독은 자신을 두고 1950년대 스푸트니크 쇼크 속에서 자란 "포스트 스푸트니크" 세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린 머독은 캠벨의 영웅의 여정을 보완/대체할 새로운 여정의 구조를 제시했다. 마찬가지로 지금 세대에게도 (남녀 가릴 것 없이) 지금 세대를 위한 새로운 신화 구조와 여정이 필요 하지 않을까? 민음사 세계 문학전집 아무 책이나 집어서 뒷표지 날개를 펼쳐보자. 세대마다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하고, 번역 문학 역시 세대마다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신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신화는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신화는 인간이 삶에서 얻은 경험에 구조를 부여한 것이다. 각 세대 마다 새로운 신화가 필요하다. 


신화 만들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신화는 삶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데 필요하다. 마크 쇼러(Mark Schorer)는 시의 맥락에서 신화의 개념을 논하면서 이렇게 썼다. "신화는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할 때 쓰는 도구이다. 신화는 평범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실들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거대하고 지배적인 이미지이다. 다시 말해 신화는 경험을 체계화한다는 데 가치가 있다. (집합적 의미의) 신화란 그러한 이미지들이 어느 정도 분명하게 구체화된 것, 판테온이다. 그런 이미지들이 없다면 경험은 그저 혼란스럽고 파편적이며 일회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 P274


이 책은 여성에게도 유용하지만 남성에게도 유용하다.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남성 역시 사회적/경제적 성공을 거둬야한다고 끊임없이 주입당하지 않는가? 그런데 눈부신 성공을 거두거나 누구도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뤄 남들에게 과시하는데 성공한다면, 과연 그 개인의 인생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아가 아닌 외부의 목소리만을 따라간 끝에, 남성 역시 이 책의 여성들처럼 자신은 전혀 돌보지 못하고 중요한 것을 상실하지는 않았는가? 성공만을 위해 내달리다가, 자신이 지금껏 걸어온 길을 뒤늦게 돌이켜보고 '내가 지금 뭘 한거지?' 라고 의문을 품지 않는가? 


그런데 '성공하라,' '경쟁하라'며 들려오는 목소리, 내면에서 개인을 채찍질하는 목소리는 원래부터 인간 내면에 당연하게 존재한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 언급한 문명이라는 '게임'처럼, 인간 스스로가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상상하고 만들어 내면화한, '게임의 룰'들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함께 여행하는 순례자들이다. 모든 생명의 존엄성—보이는 것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건—을 존중하고 보존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여행 중이다. 그 안에 우리의 영웅적 힘이 있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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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화질] 전원 옥쇄하라! 02 전원 옥쇄하라! 2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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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전쟁의 참상과 광기, 부조리를 보여주는 만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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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화질] 전원 옥쇄하라! 02 전원 옥쇄하라! 2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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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쇄(玉碎). 국어사전에 검색해보면 '부서져 옥이 된다는 뜻으로,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개끗이 죽음을 이르는 말'로 나온다. 실로 무시무시한 단어다. 무엇을 위한 명예인가? 무엇을 위한 충절인가?


『전원 옥쇄하라!』는 일본의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자전적 만화다. 제목에서 이미 이 만화가 어떤 만화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종이책은 한 권으로 출간된 데 비해 ebook판은 1권을 2권으로 분권해놓았다.


태평양 전쟁이 한참인 뉴브리튼섬의 코코포라는 곳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위안소'를 들르는 일본군들. 그들 앞에 새롭게 부임한 타도코로 소좌는 미나토와강에서 다이난 공과 함께 전사한 500명을 언급하며 "우리 지대의 인원도 정확하게 500명이다. 제군들이 용감하게 싸울 것을 기대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바이엔에 상륙한다. 이어서 화자 마루야마의 암울한 언급이 이어진다. "그렇다.... 여기는 모두가 천국으로 갈 곳이었다...."


바이엔에서 일본군 병사들은 하나씩 쓰러진다. 물고기를 잡다가, 강을 건너다가, 적과 교전하다가. 부사관들은 '이래야 정신차린다'며 구타와 가혹행위를 일삼는다. 미군의 폭격이 이어진다. 미군이 상륙하고 교전이 일어난다. 후퇴한 미군 진지에는 초콜릿과 통조림이 가득하다. 반면 일본군은 부족한 식량과 전염병에 시달린다. 미군은 시시각각 일본군을 압도하며 바이엔의 일본군을 몰아붙인다. 타도코로 소좌는 불리해지는 전황을 앞에 두고 다이난 공을 들먹이며 항상 '돌격하라,' '옥쇄하라' 같은 말만 내린다. 이 비극을 전하는 화자 마루야마는 늘상 사역에 나서고, 초년병이라는 이유로 늘 구타에 시달린다. 부사관과 장교들이 내리는 명령은 앞뒤가 안맞고 서로 충돌하기 일쑤다. 


후방의 라바울에선 십만 장병이 무위도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째서 음식도 변변히 못 먹고 있는 우리가 이런 육지의 외딴 섬 같은 곳에서 죽어야 합니까? 이 고지가 그렇게까지 하며 지킬 필요가 있는 곳입니까? 그 자체가 엄청난 희극 아닙니까?

- P197.

중대장, 말조심하게. 이 고지를 지키는 것은 병단장 각하의 명령일세. 자네는 잠자코 나와 함께 죽으면 되네. - P197.

입에 옥쇄하라, 돌격하라를 말버릇처럼 내뱉는 타도코로 소좌는 부하 장교의 합리적인 반박 앞에 "병사를 개죽음으로 모는 일을, 대장으로써 어찌 명령할 수 있겠나." 라는 궤변을 늘어 놓는다. 병사들은 대체 왜 이곳에서 싸우는지 의문을 품는다.


소대장님, 내지는 매일 폭격당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내지가 엉망이 되도록 당하고 있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런 곳에서 싸우고 있는 겁니까? 

- P207

그건 나도 몰라. - P207

이 만화의 장교들 중에서 정상인을 찾자면 군의관이다. 군의관은 후방 라바울의 사령부를 찾아가 키도 참모에게 따진다. 군의관은 이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 독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후방의 방비를 위해서 굳이, 굳이 옥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옥쇄시키지 않고 그 방법을 찾는 게 작전 아닙니까? 옥쇄로 전도유망한 인재를 잃고, 어찌 전력을 높입니까? - P278

당신들은 의미도 없이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고 싶어합니다. 일종의 미친 사람입니다. 더 냉정하게 대국적으로 생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P278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 P278

참모님. 일본 이외의 군대에서는 싸우다 포로가 되는 걸 허용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 군만 이를 허용하지 않습니까? 이를 허용하지 않으니 옥쇄 같은 짓이나 벌이는 겁니다. - P280

군의관의 의문에 대해 키도 참모는 아주 간단히 대답할 뿐이다.


네놈 그러고도 일본인이냐? - P280

이 만화는 아트 슈피겔만의 『쥐』와 비교해볼 수 있는 만화다. 두 만화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전쟁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 두 나라가 당시 얼마나 광기에 차있었는지 들춰낸다. 


차이점도 있다. 『쥐』는 전쟁 당시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를 겪는 과거의 아버지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두고 고민에 빠진 현재의 화자, 둘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반면 『전원 옥쇄하라!』는 전쟁터에서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병사들을 그려내면서 전쟁의 참상을 비추는 만화다.


'병사들을 개죽음 당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돌격시켜야하니까'라는 공통된 궤변을 늘어놓는 타도코로 소좌와 키도 참모의 모습은, 전쟁이 얼마나 부조리에 찬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가 어디까지 '전쟁하는 기계'로 전락하여 국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쟁터로 내몰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덧붙여, 이 만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현재에도 여전히 경종을 울리는 만화다. 전쟁이라는 유령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배회해왔고 지금도 전 세계를 배회하기 때문이다.



벌레든 뭐든 모든 생명체가 살고자 하는 것은 우주의 의지입니다. 인위적으로 이를 막는 것은 악입니다. - P270

군대라는 게 애당초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병적인 존재입니다. 인류 본래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에요. 맑게 갠 하늘이나, 지저귀는 새나, 섬사람들 같은 건전함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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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화질세트] 히스토리에 (총11권/미완결)
Hitoshi Iwaaki / 서울미디어코믹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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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와 동지중해 세계를 다룬 역사서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대 그리스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만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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