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건 만델라가 했던 말 중에 도움이 될 만한 문구가 있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머리로 간다. 상대방의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가슴으로 간다." 어쩌면 만델라가 적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염두에 두었던 말일 수도 있다. 그는 도리에 맞게 말할 뿐만 아니라, 그들 마음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로 대화하길 원했다. - P183

놀랍게도 외국어로 된 욕은 정말 재빨리 배운다. 아이들은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것은 더 즐겁게 배우는것 같다. - P187

나는 비속어 사용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단, 그것을 언제 사용해야 하는지, 무엇보다도 의사소통 상황에서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이런 부분은 사회와 언어 및 정서적 맥락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제대로 배우기 어렵다. 단어 선택은 그와 관련된 감정 강도와 의사소통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 - P187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교실에서만 외국어를 배우는 게 아니라, 인터넷으로 오락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보면서도외국어를 배운다. 즉, 사회적 맥락 안에서 직접 언어를 사용하면서 배우는 중이다. - P188

우리 행동의 기대 가치를 극대화하고 문제의 여러 변수를 늘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위대한 경제 사상가들이 말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이고, 우리의 결정은 신중하고 합리적인 유형보다는 직관적 과정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 P195

사회적 범주화로 고정 관념은 발달한다. 같은 우산 아래로 사람들을 모으면, 각 집단이 믿는 속성(악하든 선하든)이 각자에게 전달되지 않을수 없다.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억양과 다른 언어(말)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지 않은 고정 관념이 생긴다. 그러나 다른 언어로 말하는 내용이 중요한 거지, 다른 악센트를 쓴다고 해서 문제 삼거나, 적어도 부정적인 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원어민과 다른 억양을 보이는 외국인 강사가 하는 말을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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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스캔들 - 누구의 그림일까?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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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10년대 중후반에 이슈가 된 '조영남 대작 사건'을 두고 저자가 펼친 주장과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루어져 있다. 해당 사건에 직접 관여한 저자의 심정은 다음의 인용 구절에서 잘 드러날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조영남은 (본의 아니게) 우리 미술계에 한 가지 중요한 의제를 던져주었다. 바로 미술의 ‘현대성‘modernity이라는 의제다. 대중은 이 사건에서 화가가 자기 그림을 남에게 대신 그리게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나는 외려 이미 수십 년 전에 창작의 정상적인 방법으로 확립된 그 관행을 여전히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나를 절망시킨 것은 현업에 종사하는 화가, 비평가, 이론가마저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대중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 P5


정작 나는 해당 사건이 공론화 되었을 당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은 이 사건에서 화가가 자기 그림을 남에게 대신 그리게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는 저자의 언급에 비춰보자면 나 역시 이 책을 펼칠 당시 이런 대중에 속했다고 볼 수 있겠다.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는 책의 구성을 크게 4부 14장으로 나누었다고 밝힌다. 1부(1-8장)에서는 중세 말 르네상스에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서양 미술사 속에서 '저자성'(간단히 말해 작품은 누구의 것인가?)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핀다. 2부(9-10장)에서는 조영남 사건 당시 저자가 매체에 기고한 기고문으로 저자성의 현대적 기준을 설명한다. 3부(11-13장)는 당시 저자에게 반론을 제기한 미술계 전문가들에게 저자가 펼친 재반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4부(14장)에서는 법적 측면에서 해당 사건을 검토한다. 


서양 미술사에 관해서는 중고교 시절에 배운 얄팍한 지식밖에 없기에, 다른 장에 비해 1부가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다. 저자는 1부를 열면서 '우리'가 그동안 서양 미술사를 바라본 관점이 대단히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한다.


역사와 관련해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가 있다. 바로 제 시대의 기준을 과거로 투사하는 것이다. 미술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르네상스 시대에도 예술문화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두 시대의 문화는 너무나 다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시대의 예술관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의 예술관념을 이해하지 못할 게다. 르네상스를 1250년과 1550년 사이로 잡는다면 우리의 예술제도는 18세기 이후에, 그리고 우리의 예술가상은 19세기 이후에 탄생한 것이다. 두 문화 사이에는 무려 수백 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이 엄청난 간극을 무시하고 우리의 예술관념을 그 시대로 투사하는 것은 엄청난 시대착오다. - P18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재단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의 미술 작품을 재단하려는 시대착오적 사례로는 렘브란트를 근대철학의 선구자로 바라보는 관점을 들 수 있다.


서구의 근대철학은 외부에서 내면으로 향하는 내성철학, 의식으로 의식 안을 들여다보는 반성철학, 자기의 속말을 자기가 듣는 s‘entendre parler 독백철학의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위의 여러 기술들은 렘브란트를 벌써 이 내성적 주체, 반성적 주체, 자기와 대화하는 고독한 존재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 시기는 데카르트의 《성찰》이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때다. 이것으로 보아 위의 여러 기술들은 데카르트 이후의 관념을 데카르트 이전의 화가에게 투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 P60


1부에서 저자는 이 같은 시대착오가 어떤 점에서 오류인지 드러내고 그러한 오류의 근원이 어디서 유래하는지 밝힌다. 이 과정에서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사는 누구나 알만한 화가들(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루벤스, 들라크루아, 고흐 등)의 '작품 제작 방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중심으로 재구성된다. (여기서 사족을 덧붙이자면, 본서는 유명 화가들의 명작들을 꽤 수록해놓았다.) 


중세 당시 '장인'에 가까웠던 '예술가'는 점차 장인에서 탈피해 독자적인 '예술가'로 거듭났다. 책의 내용에 의하면 대다수의 유명한 예술가들은 '친작', 즉 직접 그린 작품도 물론 있긴 했지만,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등 유명 화가들이 조수들에게 작품 제작을 맡기는 경우도 많았고 해당 관행이 문제로 불거지지도 않았다. 책에서 제시되는 사례 중 한 가지는 네덜란드의 화가들이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공장제 작품 제작 방식을 채택하였다.


사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시장을 위한 생산을 했다. 발달한 상업자본주의를 바탕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그림의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었고, 그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화가들의 워크숍에서는 거의 공장에 가까운 시스템으로 이른바 ‘어셈블리라인 회화‘를 찍어내고 있었다. 그 그림들을 구입하는 일반대중은 그림의 저자가 누구인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관심사가 주로 그림의 주제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가 제자의 그림에 자기 사인을 하거나 그마저 제자에게 시키는 관행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 시절에 사인은 브랜드, 즉 상표의 역할을 했다. - P77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예술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연히 떠올리는 이미지, '캔버스 앞에 앉아 매순간 고뇌하며 창작하는 화가'라는 이미지는 어디서 왔을까? 저자는 그 같은 이미지가 바로 낭만주의-인상주의를 거치며 형성된 결과물이라 말한다.


조금 상세히 설명해보자면, 낭만주의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정착된 예술관행이었다.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예술의 소비층이 귀족계급에서 시민계급으로 바뀌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사물의 생산방식이 주문제작에서 시장생산으로 바뀜에 따라 작가 역시 더 이상 '주문자'에게 의뢰를 받지 않고 '작품의 제작이 전적으로 작가에게'(P113) 맡겨지게 되었다. 이 두 가지 혁명은 낭만주의적 관념이 예술의 관행으로 자리잡는 데 일조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낭만주의적 예술은 어떤 특징을 지닐까?


예술의 낭만주의적 관념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미의 주관화다. (...) 이제 작가들은 작품에 담을 최고의 미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기 시작한다. 예술의 관념이 외부의 미를 ‘재현‘하는 것에서 내면의 미를 ‘표현‘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 결과 작품의 실행을 타인이 대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타인이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잖은가.

둘째, 예술의 신비화다. 고전주의자들은 예술을 이성적 활동으로 규정했다. 예술이란 합리적 규칙에 따른 제작활동이라는 것이다. 반면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을 초超이성적 활동으로 보았다. - P113

 

셋째, 예술가의 영웅화다. 고전적 예술가의 상은 ‘장인‘maestro이었다. 장인이란 오랜 훈련과 실전을 통해 창작의 모든 규칙과 기법을 자유로이 구사하는 경지에 이른 이를 가리킨다. 반면 낭만적 예술가의 모범은 ‘천재’genius였다. 천재란 창작에 필요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탁월하고 예외적인 개인을 가리킨다. 낭만주의 시대에 예술의 천재는 거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된다. 중세에 성인들의 자취가 담긴 성 유물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듯이 이 세속적 성인들의 손길이 스친 작품도 숭배의 대상이 된다. 바로 여기서 친작에 대한, 거의 종교적 열정에 가까운 집착이 생기는 것이다. - P114


이 같은 낭만주의의 대표 작가로 소환되는 이는 들라크루아다. 그러나 들라크루아 조차도 조수를 적극 활용한 점에서 낭만주의를 대표하지만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P125) 작가였다. 저자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로 인해 '낭만적 관념'이 자리잡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이 순간적으로 보여주는 인상을 포착하려 했고, 그 결과 창작은 조수가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외롭고 고독한 작업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1부에서 저자가 재구성한 미술사는 우리의 통념이 어디서 유래했는가를 밝혀내어 통념을 깨부순다. 저자의 주장을 달리 말하자면 우리 머리 속의 '손수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상상된' 신화다. 이 신화는 19세기 낭만주의와 인상주의를 거치며 등장하였으며, 그 정점에는 고흐가 위치한다.


오늘날 많은이들이 여전히 신화화한 고흐의 이미지를 화가의 전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허구와 뒤섞인 고흐의 이미지를 화가 일반에 투사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고흐는 화가의 전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예외에 가깝다. - P154

 

화가의 신화는 당연히 창작의 신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낭만주의적 관념에 따르면 창작은 미쳐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예술을 위해 작가는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며, 예술 작품이란 그 고통의 결정체이기에 관객은 거기서 작가의 정신적 고뇌와 신체적 고투의 자취를 읽는다. 이런 관념을 가진 이들에게는 화가가 자기 그림을 남에게 대신 그리게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런 행위를 "예술에 대한 모독" 혹은 "예술가들에 대한 모독"이라 부르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 관념이 너무 낡았다는 데에 있다. - P155


적어도 이 책의 미술사에서 고흐는 종래의 화가들에 비해 예외적 존재이다. 고흐는 생전에는 예외적 존재였으나 사후에는 화가의 전형으로 남게 되었다. 저자는 이 같은 사실을 들추면서 '상식'으로 주입된 '상상으로서의 역사' 혹은 '신화로서의 역사'를 무너뜨린다. (물론 역사 서술은 그 본질 상 저자의 주관이 항상 개입될 수 밖에 없고, 개입되어야만 하기에 늘 '상상된 신화'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한편 1부 7장 아우라의 파괴는 20세기 미술사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장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나 개념들을 쉽게 설명해준다. 발터 베냐민이 제시한 저 유명한 '아우라' 라던가, 아우라의 파괴가 지니는 의미라던가(간단히 말해 예술의 민주화라 할 수 있겠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듯한 현대 미술 작품들이 어째서 비평가들에게 극찬 받는가 등.


20세기 미술사에서 핵심은 역시 산업혁명과 기술이 가져다 준 변화일 것이다.


산업혁명은 사물의 세계를, 그리고 사진술은 영상의 세계를 각각 원작에서 복제로 바꾸어 놓았다. 사물과 영상의 세계가 달라지면 지각의 방식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예술의 성격도 변할 수밖에 없다. 워홀은 그 누구보다 철저히 창작 과정에 대량생산의 방식을 관철했다. 그에게는 작가의 아우라도, 작품의 아우라도, 창작의 아우라도 없다. 그에게 작가는 대중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존재이고, 작품은 범상한 것 중에서도 가장 범상한 대상이며, 창작은 공장의 대량생산을 닮은 기계적 과정일 뿐이다. 워홀에 이르러 뒤샹이 주장한 비미학의 상태가 객관적 현실이 된다. - P191


2부의 내용이긴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20세기 미술사에서 일어난 변화가 지니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발터 베냐민은 그 유명한 논문에서 복제기술로 인해 저자와 독자의 구별이 신분적인 것에서 기능적인 것으로 변하는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즉 과거에는 저자와 독자의 구별이 신분적이어서 저자는 쓰기만 하고 독자는 읽기만 했다. 하지만 복제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제 글을 복제·배포할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독자도 저자가 될 가능성이 열린다. 물론 이들의 과거 저자들이 읽을 수도 있다. 이로써 저자와 독자 사이를 갈라놓았던 신분제가 무너진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저자가 되느냐 독자가 되느냐는 이제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기능의 문제가 된 것이다.

베냐민은 바로 여기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본다. 과거에 ‘예술가‘는 특정한 이들만 가질 수 있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복제기술에 힘입어 누구나 원하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세기의 작가들은 작품만이 아니라 작가의 아우라마저 파괴함으로써 복제기술이 열어준 이 평등주의를 작업 속에 구현하려 했다. - P213

 

예술 창작에 공장제 대량생산을 도입함으로써 워홀은 대량생산의 시대에는 누구도 더 이상 (전통적 유형의) 예술가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 말에는 동시에 다른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이 시대에는 누구나 (새로운 유형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냐민은 사진이 전통적 예술(회화)이기를 포기하고 저 자신(기술)으로 머물 때 비로소 미학성을 띤다고 지적한다. 그 역설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머리에 아우라를 뒤집어쓴 과거의 예술가는 시대착오가 되었다. 스스로 아우라를 치우고 대중과 같아질 때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예술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 P215

 

복제기술이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진화하면서 삶과 예술의 경계를 없애려는 아방가르드의 기획은 대중의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독자는 웹툰을 통해 만화가가 되고, 오마이뉴스를 통해 기자가 되고, 허핑턴포스트를 통해 칼럼니스트가 된다. 나아가 유튜브를 통해 소형영화 감독이 되고, 팟캐스트를 통해 아예 방송국이 된다. 90년 전 베냐민의 비전이 실현된 것이다. - P215


부끄럽게나마 몇 번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니 '신분' 관계에서 '기능' 관계로의 변화가 특별히 체감되는 점이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의 글이라도 독자가 서평이나 리뷰를 쓰는 순간, 독자와 작가 사이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무너지고, 독자와 작가는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1부는 이어지는 2, 3, 4부에서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기능한다. 2, 3부에서 비판의 대상이나 설명하는 주안점이 다르긴 하지만 저자의 핵심적이고 일관된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볼 때 '친작'을 근거로 '대작'을 비난하는 행위는 시대착오적 행위라는 것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오히려 '친작'이야 말로 19세기 낭만주의, 인상주의를 거치면서 등장한 예외다. 19세기의 미술을 근거로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대작' 행위를 비난하는 바는 오히려 20세기 현대 미술이 성취한 바를 부정하고 19세기로 돌아가는 퇴행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4부는 '조영남 사건'을 미술계 내부의 논쟁으로 해결하지 않고(혹은 못하고) 사법부로 올려 보내 법이 현대 미술의 불문율과 관행을 침해한 상황을 비판하는 장이다. 


이 같은 사태의 전개를 두고 저자의 문제의식이 잘 드러난 부분을 하나 인용해보자.


내가 보기에 검찰이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와 오해 때문에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예를 들어 검찰에서 축구 경기장에 들어와 태클로 상대 팀 선수를 다치게 한 선수를 ‘과실치상‘으로, 혹은 고의성이 있다고 ‘폭행치상‘으로 기소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지금 검찰이 하는 일은 그와 다르지 않다. 스포츠에도 법이 건드릴 수 없는 규칙이 있듯이 예술에도 법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규칙이 있는 것이다. 검찰이 그 경계선을 침범했는데, 다들 이 심각한 문제를 아예 문제로 인식조차 못하니 나로서는 황당할 뿐이다. - P232


책에 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자. 뉴스를 검색해보면 '조영남 사건'은 이제 화젯거리로 보기 힘들다. 나조차도 이 글을 쓰면서 '조영남 사건'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할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였으니까. 오히려 이 책은 2020년대 들어 다른 측면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본다. 바로 AI의 등장 덕분이다. 


2018년 AI가 생성한 초상화가 앤디 워홀의 작품보다 비싸게 팔렸다는 뉴스가 나왔다. 단지 해당 사건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2022년 가을 미국에서 AI로 그림을 생성하여 수상한 사례는 2018년 시점에서 이미 예견된 일었다. 


AI가 등장하면서 이제 누구나 명령어를 입력하고 마우스 버튼 몇 번 클릭하는 것 만으로 그림을 생성할 수 있게 되었다. AI로 만들어낸 그림을 예술 작품으로 인정해야 하는 가를 두고 많은 말이 오갔다. 어떤 기사 제목에서는 '예술의 사망'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제시한, '저자성'에 바탕을 두고 재구성한 미술사의 흐름에 비추어보자면 미술에서 AI 문제를 달리볼 여지가 생긴다. 예를 들어, 종래에는 예술가가 아이디어를 내고 조수가 아이디어를 실행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이었다면, AI의 등장은 단지 '조수'가 AI로 대체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런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아울러 앞에서 언급된 '시대착오적인' 판단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미술사의 각 시기가 지니는 고유한 컨텍스트 및 21세기 현 시점의 컨텍스트를 따져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전문가가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은 (AI가 화두에 오르기 이전의 책이므로 AI에 관한 언급이 일절 없으나) AI가 등장한 작금의 상황을 파악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술의 사망'과 같은 식으로 호들갑을 떠는 것은 무의미하다. 반대로, 앞으로 미술에서, 그리고 다른 분야들에서 AI가 어떤 의미를 지닐 것인가를 따져보는 게 더 건설적이다. 이 책은 미술사를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 그 같은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있다. 


요약해보자. 한편으로는 중세 말 르네상스에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의 흐름을 다른 각도(예컨대 '저자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기존의 서양 미술사를 달리 볼 여지와 관점을 전해준다. 아울러 20세기 이후 복잡해지는 미술사를 아주 쉽게 설명해준다는 장점도 있다. 다른 한편, 이 책이 제시하는 관점은 AI의 등장과 같은 사례가 보여주듯 변화의 복판에 있는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할 때도 도움을 준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 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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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hat is gold does not glitter,
Not all those who wander are lost:
The old that is strong does not wither,
Deep roots are not reached by the frost.
From the ashes a fire shall be woken.
A light from the shadows shall spring;
Renewed shall be blade that was broken,
The crownless again shall be king.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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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여행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과연 두 언어에 노출된 아기들은 두 언어를 어떻게 구분할까? 이중언어와 단일언어를 사용하는 아기들의 언어 학습 과정은 어떤 점이 다를까? 이중언어자가 두 언어를 계속하게 해주는 뇌 영역은 어디일까? 이중언어 사용은 다른 인지 능력 발달에 어떤 영향을 줄까? 뇌 손상을 입으면 두 언어가 어떻게 손상될까? 제2언어(외국어) 사용은 의사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 P9

아이들은 피부색이 같지만 영어를 할 때 외국인 억양이 있는 아이보다는 피부색이 달라도 모국어처럼 영어를 하는 아이들과 더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즉 그들의 원하는 친구를 결정할 때 중요한 요소는 피부색보다 말하는 방식이었다.
지금까지는 아주 어린 시절의 언어 습득에 관한 여러 측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언어 구별과 통계적 규칙 파악, 음운 목록 형성, 단어 뜻 확립, 어휘 발달 등 아기 이중언어자에게 예상되는 특별한 도전을 집중해서 보았다. 그 결과, 일반적으로 이중언어 사용 경험 때문에 이런 속성을 파악하고 습득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니며, 노출된 언어의 수와는 상관없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언어 발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특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와 이중언어자가 언어 습득 과정을 ‘조율해 나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알아봐야 한다. - P54

뇌 손상을 입은 사람의 언어 행동 연구와 뇌 영상 기술을 통해 확보한 건강한 사람의 뇌 활동 평가로 이중언어자의 언어 사용이 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특히 뇌에서 언어 통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언어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사용(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다가왔길 바란다. - P102

우리가 배우는 새 단어의 양은 얼마나 풍부한 어휘 사용 환경에 노출되는지에 달려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경험이 스포츠 신문과 텔레비전 시청 정도에 머문다면 새 단어를 배우기는 어렵다. 다양한 여가활동은 언어 및 인지 수준을 높이는 데 더 큰 자극과 도전이 된다.
어휘 학습 능력이 평생 지속되는 게 사실이라면, 지금은 얼마나 많은 단어를 알고 있는 걸까? 2천, 1만 2만・・・ 아니, 훨씬 더 많다! 한 계산에 따르면 고등 교육을 받는 사람은 대개 3만 5천 단어 정도를 알고 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런 단어를 다 규칙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은 하루에 매일 천 단어 정도만 사용한다(실망하지 않길 바란다. 조사에 따르면, 세르반테스도 그의 전 작품에서 8천 단어 정도만사용했다). - P114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다른 사람도 우리처럼 생각이 있고, 그런 생각 중에 나눌 수 있는게 있고 그럴 수 없는 게 있음을 알고 있다. 어린 시절의 이런 발달을 ‘마음 이론‘(theory of mind: 마음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마음과 행동이 어떻게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해-옮긴이)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우리의 기본 능력으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이는 공감 능력을 키우고 사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거짓말하는 능력도 발휘하게 한다. 아는 선생 중 한 분은 ‘아들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때 기뻐하라, 그러나 단 처음에만‘ 하고 말했다.
이처럼 두 언어에 노출된 아동이 단일언어만 사용하는 아동보다 더일찍 마음 이론을 발달시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 P130

그렇다면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일이 어떻게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는능력의 발달로 이어지는 것일까? 아마도 아기 이중언어자가 엄마와 아빠가 하는 소리를 구별해야 하는 상황 때문일 것이다. 즉,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각각 다른 언어로 말하면 부모의 마음도 어느 정도는 다르다는 가설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아빠의 마음이 다르다면, 엄마의 마음도 다르다는 뜻이다. 이 능력의 발달을 돕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다. 물론 이건 단지 가설일 뿐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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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베냐민은 그 유명한 논문에서 복제기술로 인해 저자와 독자의 구별이 신분적인 것에서 기능적인 것으로 변하는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즉 과거에는 저자와 독자의 구별이 신분적이어서 저자는 쓰기만 하고 독자는 읽기만 했다. 하지만 복제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제 글을 복제·배포할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독자도 저자가 될 가능성이 열린다. 물론 이들의 과거 저자들이 읽을 수도 있다. 이로써 저자와 독자 사이를 갈라놓았던 신분제가 무너진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저자가 되느냐 독자가 되느냐는 이제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기능의 문제가 된 것이다.
베냐민은 바로 여기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본다. 과거에 ‘예술가‘는 특정한 이들만 가질 수 있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복제기술에 힘입어 누구나 원하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세기의 작가들은 작품만이 아니라 작가의 아우라마저 파괴함으로써 복제기술이 열어준 이 평등주의를 작업 속에 구현하려 했다. - P213

예술 창작에 공장제 대량생산을 도입함으로써 워홀은 대량생산의 시대에는 누구도 더 이상 (전통적 유형의) 예술가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던진다. 그 말에는 동시에 다른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이 시대에는 누구나 (새로운 유형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냐민은 사진이 전통적 예술(회화)이기를 포기하고 저 자신(기술)으로 머물 때 비로소 미학성을 띤다고 지적한다. 그 역설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머리에 아우라를 뒤집어쓴 과거의 예술가는 시대착오가 되었다. 스스로 아우라를 치우고 대중과 같아질 때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예술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 P215

복제기술이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진화하면서 삶과 예술의 경계를 없애려는 아방가르드의 기획은 대중의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독자는 웹툰을 통해 만화가가 되고, 오마이뉴스를 통해 기자가 되고, 허핑턴포스트를 통해 칼럼니스트가 된다. 나아가 유튜브를 통해 소형영화 감독이 되고, 팟캐스트를 통해 아예 방송국이 된다. 90년 전 베냐민의 비전이 실현된 것이다. - P215

현대미술의 규칙을 왜 대한민국에서는 검찰이 제정하려 드는가? - P221

내가 보기에 검찰이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와 오해 때문에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예를 들어 검찰에서 축구 경기장에 들어와 태클로 상대 팀 선수를 다치게 한 선수를 ‘과실치상‘으로, 혹은 고의성이 있다고 ‘폭행치상‘으로 기소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지금 검찰이 하는 일은 그와 다르지 않다. 스포츠에도 법이 건드릴 수 없는 규칙이 있듯이 예술에도 법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규칙이 있는 것이다. 검찰이 그 경계선을 침범했는데, 다들 이 심각한 문제를 아예 문제로 인식조차 못하니 나로서는 황당할 뿐이다. - P232

보수 언론의 기자는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는 없다"라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소름이 끼친다. 내가 우려하는 사태가 실은 이것이다. 모든 사안에 무차별적으로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검찰이 엉뚱한 데에 사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를 저질렀다. 그런데 그걸 바로잡아야 할 기자가 그것도 법이니 따르라고 강요를 한다. 기가 막힌 일이다. - P234

어느 신문사에서 설문을 돌렸다. 조영남의 작업이 ‘사기‘라는 데에 국민의 74퍼센트가 동의했단다. 이 나라는 워낙 민주적이라 예술의 규칙도 다수결로 정하는 모양이다. - P253

카멜레온이 제 몸에 환경의 색을 입히듯이 위대한 작가들은 제 작업속에 사회의 구조적 변동을 미메시스(모방)한다. 한 작가의 ‘독창성‘이란 천상의 추상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구체적 사회 상황과의 지시연관reference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 P352

전전戰前의 유럽 모더니즘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수공업이 공장제 대량생산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미적으로 전유했다. 마찬가지로 전후戰後의 팝아트는 산업자본주의가 소비자본주의를 거쳐 금융자본주의로 변모하는 과정을 미적으로 전유하려 했다. 예술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를 미메시스(닮기) 한다. 그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메시지는 없어도) 그 존재 자체로서 이미 사회적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마크 테일러에 따르면 이전유의 과정은 크게 상품화商品化, commodification, 상사화商社化, corporatization,
금융화金融化, financialization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 P357

오늘날 미술은 산업자본주의의 생산방식, 소비자본주의의 판매방식, 금융자본주의의 투자방식을 모방한다. 그로써 제 안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사회의 상태에 관한 메시지를 품는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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