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말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에게 인만큼 중요한 단어는 없었다. 인은 《논어》에 105번 등장하는데, 그 어떤 단어보다 많은 횟수다. 이 단어의 정확한 번역어는 존재하지 않으며(공자 자신도 이 단어를 정확히 정의 내리지 않는다), 그동안 연민, 이타주의, 사랑, 어짐, 진정한 선, 온전한 행동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번역은 ‘인간다운 마음‘이다.
인을 실천하는 사람은 공경과 아량, 신의, 민첩함, 친절이라는 다섯 가지 기본 덕목을 항상 실천한다. 물론 공자가 친절을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공자는 친절을 개인이 원할 때 베푸는 것에서 철학의 핵심 개념이자 훌륭한 통치의 근간으로 한 단계 승격시켰다. 공자는 친절과 사랑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려놓은 첫 번째 철학자였다. 공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보다 약 500년 일찍 황금률을 제시했다. 공자에게 친절은 무른 마음이 아니다. 약함도 아니다. 친절은 실용적인 덕목이다. 공자의 한 추종자는 모두에게 친절을 베풀면 "손바닥 위에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 P311

가족은 우리가 인을 계발하는 헬스장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 서로 간의 거리는 중요한 요소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에서 시작하라. 우리가 자기 자신에서 가족으로, 이웃으로, 국가로, 모든 지각 있는 존재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할 때 친절은 연못에 던진 돌멩이처럼 점점 커다란 원을 만들며 퍼져 나간다. 한 생명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으면 모든 생명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다. - P314

공자의 ‘공부‘는 기계적 암기를 뜻하지 않는다. 심지어 배움 그 자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공자에겐 더 깊은 뜻이 있다. 바로 도덕적 자기 수양이다. - P319

친절은 힘든 것이다. 친절에는 감정 이입이 필요하지만 그것만 으로는 충분치 않다. 유교 의례가 필요하다. 결혼과 졸업, 죽음처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의식을 치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너무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 의례는 우리를 하나로 모아준다. 의례는 우리의 감정을 담을 그릇을 제공한다. - P324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친절은 힘든 것이다.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 P325

공자가 격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다. 이 이유는 인과 친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친절은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것이 아니다. 친절은 담길 그릇이 필요하다. 공자에게는 그 그릇이 올바른 의례적 행위인 예다. 이런 예의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고 공자는 말한다. 그래도 마치 예의를 신경 쓰는 것처럼 자리를 정리하라. 마치 예의가 중요한 것처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식사를 하라. 이런 의례가 따분하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친절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 토대에서 나온다.
공자의 목표는 인성 개발, 즉 도덕적 역량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효도만큼 중요한 역량은 없었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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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창조적인 여성성과 분리되었다. 우리가 직관과 감정과 우리 몸의 심오한 앎을 거부하면 우리의 이성은 그것들을 무시하고 평가 절하한다. "에로스보다 로고스의 영역으로, 우뇌보다 좌뇌의 영역으로 더 가까이 갈수록 여성성, 여신, 성배라 부를 수 있는,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어떤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소외감이 더 커졌다." 우리는 소외되었다는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지만 이 감정이 우리 본성 내부의 불균형에서 생겨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 P298

남성성은 원형적 힘이다.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성처럼 모든 여성과 남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창조적인 힘이다. 남성성은 균형을 잃거나 삶과 유리될 때 전투적이거나 비판적이거나 파괴적으로 변한다. 이렇게 삶에서 유리된 원형적 남성은 차갑고 비인간적일 수 있으며, 인간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이 남자다움은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저 전진하라고 말한다. 완벽과 통제와 지배를 요구한다. 어떤 것도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의 남성적 본성은 어부 왕처럼 상처를 입었다. - P298

성배는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신성하고 창조적인 여성적 원리의 상징이다. - P298

파르시팔과 어부 왕처럼 우리도 우리 안의 성배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의식을 확장해야 한다. 상처 입고, 메마르고, 부서지기 쉽고, 지나치게 힘이 세진 남성성을 치유하려면 촉촉하고, 싱싱하고, 자상한 여성성이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황무지에서 살게 된다. 파르시팔은 성배의 성에서 성배를 경험했고 상처 입은 어부 왕을 만났다. 하지만 "무엇이 그대를 아프게 합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우리 자신을 치유하고 싶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 각자 안에서 통제 불가능한, 단절된 남성적 요소는 우리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균형을 잃게끔 몰아댄다. - P299

여성이 자기 내면의 이러한 불균형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식 세계의 빛을 암흑 세계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 안의 실체 없는 폭군을 대면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최면에 걸린 듯한 수동적인 삶과 경제적 이득과 자아 권력을 향한 분별없는 애착을 의식적으로 버려야 한다. 용기와 연민과 겸손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 P303

여성 영웅의 도전은 정복을 위한 도전이 아니라, 스스로 제어 - P303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군이 되어버린 자신의 이름 없고 사랑받지 못한 부분을 수용하기 위한 도전이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우리 내면에서 서로 충돌하는 부분들을 모두 세심하게 점검해야 한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용이 있다. - P304

여성 영웅은 자신의 본성을 인식하는 대로 숨쉬면서 우리 모두에게 지 - P320

식을 불어넣어 우리를 치유한다. 여성 영웅은 양쪽 세계의 여왕이 된다. 그녀는 일상이라는 삶의 바다를 항해하며 심오한 가르침에 귀 기울일 수 있다. 하늘과 땅의 여왕이면서 동시에 지하 세계의 여왕이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에서 지혜를 얻었다. 더는 다른 쪽을 비난할 필요가 없다. 그녀가 바로 그 다른 쪽이다. 여성 영웅은 세상과 지혜를 나누려고 자신이 얻은 지혜를 되가져 온다. 그녀의 경험이 세상의 여성들, 남성들, 아이들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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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폭력은 상상력의 실패를 나타낸다. 비폭력은 창조성을 요구한다. 간디는 언제나 새롭고 혁신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 P267

간디는 영국이 인도를 거세했다고 믿었다. 그는 인도의 "잃어버린 남성성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남성성은 좀 달랐다. 간디가 생각한 남성적 힘은 폭력이 아닌 그 반대에서 나왔다.
간디는 부당한 법에 복종하는 것을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여겼다. 그런 법에는 반드시 맹렬한 힘으로 저항해야만 한다. 비폭력적 힘으로 말이다. 간디는 그러려면 진정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P275

간디는 폭력을 혐오했지만 그가 폭력보다 더 싫어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비겁함이었다. 둘 사이에서 골라야 한다면 간디는 폭력을 선택했다. "비겁한 사람은 남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간디의 진정한 목표는 인도의 잃어버린 남성적 힘을, 인도만의 방식으로 되찾는 것이었다. 간디는 그렇게 하면 자유가 자연히 따라오리라 믿었다. - P275

간디는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기 생각을 바꾸길 겁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괴짜와 변덕쟁이, 미치광이"를 끌어 모아 그들을 전부 수용한 사람이었다. 지독한 수줍음과 자기 회의를 극복하고 한 국가를 이끈 사람이었다. 대의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되 다른 사람을 죽이려 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대제국과의 기싸움에서 이긴 사람이었다. 신이나 성인군자가 아닌, 피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서, 좋은 싸움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보여준 사람이었다. - P278

간디는 이 책을 다르게 읽었다. 그는 《바가바드기타》가 "오늘날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묘사한 하나의 비유라고 말했다. 진짜 전쟁터는 우리 마음속에 있다. 아르주나는 적이 아닌 자기 자신과 싸운다. 아르주나는 자신의 기초적인 본능에 굴복하는가, 아니면 더 높은 경지로 도약하는가? 간디는 《바가바드기타》가 사실은 비폭력을 향한 찬사라고 생각했다. - P279

《바가바드기타》는 노력과 결과를 분리하라고 가르친다. 모든 시도에는 100퍼센트의 노력을, 그 결과에는 정확히 0퍼센트의 노력만을 기울일 것. - P280

간디는 결과를 지향하지 않았다. 과정을 지향했다. 그는 인도의 독립이 아닌, 독립할 자격이 있는 인도를 추구했다. 일단 인도가 독립할 자격을 갖추면, 잘 익은 망고가 나무에서 떨어지듯 자유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간디는 이기기 위해 싸우지 않았다. 자신이 싸울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싸움을 싸우기 위해 싸웠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과정 중심적인 접근법이 결과 중심적 접근법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 P280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사람은 스스로를 집어삼킨다. 간디가 보기에 목적은 절대로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했다. 수단이 곧 목적이었다. "불순한 수단은 불순한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다." - P285

간디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설 것을 제안했다. 자신이 진실의 일부만을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고 자기 입장을 점검할 것.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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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우리 영혼의 본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우리는 돈독하게 결속되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소속감과 공동체를 갈망한다. 우리 문화가 잃어버린 여성성의 긍정적인 특질, 즉 강인하고 잘 보살피는 특질을 열망한다. "개인 또는 사회가 너무 한쪽에 치우쳐 있거나 인간 경험의 깊이와 진실로부터 지나치게 멀어질 때, 진실을 회복하기 위한 어떤 움직임이 내면에서 꿈틀거린다. 기존의 틀을 깨뜨리면 순식간에 일상의 현실이 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삶이 자유로워지고, 자기 치유와 더불어 내적 통과의례라는 심오한 영적 작용이 활성화된다." 우리는 강하고 힘 있는 어머니를 갈망한다. - P256

현실의 어머니가 자상하게 보살펴주는 어머니이건 냉정한 어머니이건, 아이에게 자율을 주건 조종하건, 곁에 있어주건 방치하건 간에 어머니와 내적으로 맺은 관계는 어머니 콤플렉스(mother complex)로 남아 우리의 정신에 흡수된다. - P260

우리의 집단 심리는 ‘어머니‘의 힘을 두려워하고 폄하한다. 또 그 힘을 파괴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우리는 어머니의 양육을 당연하게 여긴다. 기회가 되는 대로 어머니를 이용하고 학대하고 지배한다. - P262

교회는 신의 여성적 이미지를 파괴하고 남성 신들을 위해 여신의 힘을 찬탈하면서 오랜 세월 신의 여성적 얼굴을 지하로 밀어 넣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가 여성성을 잊어버리도록 온갖 짓을 다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여성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탐욕, 지배, 무지의 신들을 숭배하고 돌봄, 균형, 관용의 여성적 이미지를 조롱한다. 우리는 훼손하고 약탈하고 파괴하면서도 대지가 우리에게 끝없이 베풀어주기를 기대한다. 이 모녀 분리의 상처는 깊다. 이를 치유하려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 P262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깊은 상처를 경험한 여성들은 종종 평범한 경험 속에서 치유를 얻는다. 많은 이들이 신성한 일상에서 치유를 받는다. 설거지이든 화장실 청소든 정원에서 잡초 뽑기든 모든 일상의 행위에서 신성함을 보는 것이다. 여성은 자신을 평범한 일상에 내려놓으면서 보살핌을 받고 치유된다. 내면의 여성성을 회복하는 이 기간에 여성이 헤스티아 여신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내면의 현명한 여성‘을 발견하는 일은 아주 흔하다. - P269

헤스티아 여신은 따뜻한 마음, 안전, 인간관계 같은 가치들과 관련이 있다. 가족이나 조직에서 헤스티아는 세세한 부분까지 보살피고 모든 사람이 각자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아는 사람, 촘촘하게 관계의 그물망을 엮는 ‘거미‘ 같은 사람이다. - P269

신화 만들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신화는 삶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데 필요하다. 마크 쇼러(Mark Schorer)는 시의 맥락에서 신화의 개념을 논하면서 이렇게 썼다. "신화는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할 때 쓰는 도구이다. 신화는 평범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실들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거대하고 지배적인 이미지이다. 다시 말해 신화는 경험을 체계화한다는 데 가치가 있다. (집합적 의미의) 신화란 그러한 이미지들이 어느 정도 분명하게 구체화된 것, 판테온이다. 그런 이미지들이 없다면 경험은 그저 혼란스럽고 파편적이며 일회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 P274

여성들이 꾸는 꿈은 어둠에 관한 것이고 삶과 죽음의 가혹한 현실을 대면할 필요에 관한 것이며, 격변과 고통과 정신 이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꿈속에서 자신을 보살펴주고 새로이 창조해주는 거대하고 강한, 피부가 검은 여성을 만난다. - P280

동화는 대개 어린 소녀(또는 소년)의 관점에서 그녀가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부모, 형제자매, 마법적인 존재들과 그녀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동화 속 소녀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거나 못되게 굴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여정에서 겪는 시련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리하여 마침내 어떻게 성공이나 화해의 열매를 얻는지 듣게 된다.
동화 속에서 계모, 마녀, 미친 여자는 성장하는 아이들 앞에 장애물을 놓는 인물이면서 비열하고 몰인정한 데다가 아이를 굶기고 조종하고 시기하는 탐욕스러운 인물로 묘사된다. 그들의 사악한 행위는 대개 죽음으로써 벌을 받는다. - P283

동화는 계모나 사악한 마녀가 잔인해진 원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는 그저 그들은 원래부터 그랬을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아이, 징징거리고 말 안 듣고 영악한 아이에 관해 그녀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사악한 계모는 ‘완벽한 엄마‘를 갖지 못해 실망한 아이들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이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완벽한 엄마‘란 항상 집에 있으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이해해주고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이웃집 엄마‘의 환상에 불과하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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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의 당부는 더 단순하지만 결코 더 쉽진 않다. 베유는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아무 관심이나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베유가 생각한 관심은 그동안 내가 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르다. - P220

관심은 중요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더, 관심은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지금 당장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것만이 우리 앞에 존재한다. 이건 은유가 아니다. 사실이다. 많은 연구에서 나타나듯이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한다.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느냐,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준다.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어떤 기억이 표면 위로 떠오르는가? 어쩌면 결혼식처럼 커다란 사건일 수도 있고, 우체국의 말도 안 되게 긴 줄에서 뒤에 선 사람과 나눈 뜻밖의 다정한 대화처럼 작은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가장 주의를 기울인 순간일 확률이 높다. 우리의 삶은 가장 열중한 순간들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유는 "가장 큰 희열은 가장 온전하게 주의를 기울였을 때 찾아온다"라고 말했다. - P222

베유의 급진적 공감 능력은 관심에 대한 베유의 급진적 견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베유는 관심을 어떤 수단이나 기법으로 보지 않았다. 베유에게 관심은 용기나 정의와 다르지 않은, 똑같이 사심 없는 동기가 요구되는 미덕이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더 훌륭한 노동자나 부모가 되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지 말것.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이유에서 관심을 기울일 것.
가장 강렬하고 너그러운 형태의 관심에는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베유는말한다. 보답에 대한 기대 없이 타인에게 온전한 관심을 쏟을 때에만 우리는 이 "가장 희소하고 순수한 형태의 너그러움"을 베풀게 된다. - P227

결국 관심은 우리가 주어야 하는 전부다. 돈이나 칭찬, 조언을 포함한 나머지는 불충분한 대체재다. 시간도 불충분한 것은 마찬가지다. - P228

베유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진 않다고 말한다. 짧은 질문 한마디가 마음을 녹이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지금 무슨 일을 겪고 계신가요?" - P228

진정한 관심이라면 그저 타인의 존재를 인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인정하고 공경해야 한다. - P229

베유는 진정한 관심이란 일종의 기다림과 같다고 믿었다. 베유에게 이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 P234

베유는 내가 예루살렘에서 드러낸 일종의 계산적 조급함 외에 다른 종류의 조급함도 경계했다. 불안에서 나오는 지적 조급함이다. 지적 조급함은 물에 빠진 사람이 칼이라도 붙잡으려 하는 것처럼 나쁜 아이디어라도 붙잡으려고 한다. 베유는 우리의 모든 실수가 "생각이 아이디어를 너무 성급하게 붙잡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일찍 차단되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 P238

모든 부주의는 이기심의 한 형태다. 우리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자기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머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보다 더 흥미롭고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들이 그토록 부주의한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억눌려 있고, 정체되어 있다. 관심은 우리 삶의 피다. 피는 잘 돌아야 한다. 관심을 썩히는 것은 곧 삶을 죽이는 것이다. - P239

나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욕망은 관심과 양립할 수 없다. 무언가를 욕망하는것은 곧 거기에서 얻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뜻인데, 바로 그 상태가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향하는 대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문제인 것은 그 주체, 즉 ‘나‘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환상이다. 헤로인 중독자는 헤로인을 갈망하지 않는다. 헤로인을 하는 경험,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헤로인을 못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의 자유, 즉 아타락시아다. - P252

베유가 말을 이어나간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오로지 간접적인 방법만이 효과가 있다. 우선 한발짝 물러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P253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 P255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욱 기꺼이, 더욱 끈기 있게. 기다림은 그 자체가 보상이므로.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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