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위로 떠오른 슬픔의 정체







    사랑하는 이의 죽음 뒤에 슬픔이라는 것은 꼭 그렇게 즉발하는 것이 아니라 뒤늦게 찾아올 수도 있다. 슬픔이 왜 뒤늦게 찾아오는 지 알 수는 없다.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실감나지 않아서 이거나 그 슬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자신도 모르게 회피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프루스트는 발베크를 다시 여행하면서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게 되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에 대한 단상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글은 뒤늦게 찾아온 할머니의 죽음을 실감하면서 느끼게 되는 프루스트의 추억과 고통에 대한 세밀한 이야기이다.

 프루스트는 발베크에서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 등을  몽상하다가 불현듯 마들렌을 입에 물면서 출현했던 비슷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나의 전인간적인 전복. 초저녁부터, 피로 때문에 심장이 뚝딱거려 괴로운 것을 꾹 참으면서, 나는 구부려 천천히 신중히 신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나 편상화의 첫 단추에 손을 대자마자, 뭔지 모를 신성한 것의 출현으로 가득 차 나의 가슴은 부풀어, 흐느낌에 몸이 흔들리고, 눈물이 눈에서 주르르 흘러나왔다. 지금 막 나를 도우러 와서 영혼의 메마름을 구해준 것은 몇 해 전, 비슷한 슬픔과 외로움의 한순간에, 자아를 하나도 갖지 않았던 한순간에,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자신에게 돌려 준 것과 같은 것, 나이자 나 이상의 것(알맹이를 담고 있으면서 알맹이 보다 더 큰 그릇, 그리고 그 알맹이를 내게 가져다 주는 그릇)이었다’

 프루스트는 밀려드는 슬픔의 실체를 그 영혼의 메마름을 구원해 준 것이라고 해석하고 슬픔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충만히 느꼈던 것 같다. 막연히 떠오른 슬픔의 이유는 바로 할머니에 죽음이 대한 상기였다. 프루스트를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내 주변의 일어났던 죽음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는데, 특히 나의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눈물 대신 하염없는 폭식을 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이유없이 터트리던 눈물들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가장 슬퍼해야 할 순간에 슬퍼할 수 없음이 너무도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프루스트도 할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슬픔이 느껴질 때 온전히 자기자신으로 들어가 슬퍼할 수 있음에 나를 나자신에게 돌려준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가 발작을 일으켰던 그 샹 젤리제 이후 처음으로 나는 무의식적인, 따라서 완전한 추억 속에서 할머니의 산 실재를 이렇듯, 매장한지 1년 이상이 지난 이제야 할머니의 팔 안에 뛰어들고 싶은 격한 욕망의 사로잡혀-사실의 달력을 감정의 달력과 일치시키는 걸 자주 방해하는 그 날짜의 틀림 때문에-처음으로 할머니의 죽음을 알았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고 할머니의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푸르스트는 그 상태를 가상상태로 표현하고 가상상태에서 벗어나, 이제 그는 할머니의 죽음을 이제 막 알았다는 듯이 비통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할머니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던 그 순간에 내가 들러붙은 것은 그 자아가 모르는 오늘 낮 동안의 하루라는 것의 뒤에가 아니라 시간의 연속을 중단하지 않은 채 극히 자연스럽게 , 지난날의  발베크 도착 첫 저녁 후에 곧바로 이어져 있었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기억속으로 들어가면서 프루스트는 할머니의 진정한 산 실재를 느끼는 동시에 영영 만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다음과 같은 모순의 고통을 감내하려고 하였을 뿐, 만사가 내 중심이였던 그 애정.... 허무가 그 애정을 사모하는 나의 심상을 지우며, 그 헌신적인 존재를 부수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 둘의 상호 인연을 없애고, 그 허무 속에서 확실성을 관통한 할머니의 죽음의 실감이, 되풀이 되는 육체적 고통처럼 욱신거리고, 그것이 거울 속에 보듯이 할머니의 모습을 되찾은 순간에 할머니를 마치 남의 곁에서처럼 우연히 내 곁에서 몇 해를 지낸 사람과 같은 나와 아무 관계없는 한갓 낯선 여인이 만드는 모순의 고통을 감내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그는 할머니의 그 지극한 애정을 허무가 만들어내는 모순의 고통을 감내하려고 했을 뿐 할머니의 죽음을 인정하려고 하지않았음을 고백한다.

  

 이제 그는 할머니와의 과거, 그때에 느꼈던 할머니의 고통을 덜어 드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되뇌인다. 망자에게 더 잘하지 못한 후회가 프루스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지난날 그 얼굴에 무모하게도 아무리 작은 기쁨의 그림자마저 뿌리째 뽑으려고 지랄한 적이 있었으나, 예컨대 생 루가 사진 찍어 주던 날 그랬는데, 그날 할머니의 교태가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마음을 상케하는 말을 건네 할머니가 얼굴을 찌뿌렸던 기억. 나의 가슴아픔이 영영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을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지 괴로워하고 싶었을 뿐이 아니라, 내가 받은 고뇌의 정직한 발생을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서 교차하는 생존자의 허무 그같이 이상한 모순이 다시 일어날 적마다, 나는 내 고뇌가 갖는 법도에 좇아 계속해서 그 고뇌를 받고자 하였다. 지금 이해되지 않는 이 고통스러운 인상에서, 약간의 참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성을 통해 그려지지도 무기력에 의해 경감되지도 않는 특이한, 우발적인, 이 고뇌밖에서 있을 수 없을리라는 것, 아무튼 죽음 자체가 죽음의 돌연한 계시가, 벼락처럼, 초자연적이 비인간적인 기호에 따라 둘로 갈라진 신비한 고랑을 내 몸 속에 파 놓았음을 알았다.’

  그가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  죽음에 관하여 통찰하게 만들었다고 나는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프로이트식 애도의 과정 중 수용의 단계를 거치면서 애도가 완성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프루스트에게는 뒤늦게 찾아온 슬픔이였지만 엄마에게는 할머니의 죽음이 전과 다른 모습, 할머니같이 탈바꿈을 시키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저 죽음이 허무로만 끝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아마도 엄마의 경우처럼, 생모의 죽음이 딸에게 남기는 큰 슬픔이고 보면 그 슬픔을 한시바삐 제 속에 품은 번데기를 부수고, 도 한 존재의 탈바꿈과 출현을 촉진하다보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죽자 우리는 남이 될까봐 꺼리고, 망자의 생시모습이 그립고, 기왕의 성격에 섞여 있던 다른 것을 배척하고, 차후론 오로지 망자의 사람됨을 이어받아 간다. 그런 뜻에서 비로서 말할 수 있다, 죽음은 헛되지 않다, 망자는 우리의 위에 계속에서 활동한다고,. ’  어쨌든 이러한 슬픔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어머니의 슬픔도 더 깊게 이해하게 되고 망자가 남기고간 사람됨이 죽음의 헛됨을 극복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며칠 후 그는 할머니사진을 보아도 이제는 그렇게 아련하고 가슴아프지는 않다. 그것은 추억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그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병환을 숨기고 사진을 남긴 할머니의 사랑을 앞에서 프루스트는 할머니가 덜 불행한 할머니를 상상한다. 하지만 그 뺨아래 숨겨져있던 슬픔, 무의식적인 비참한 모양을 프루스트 저 자신은 간파하지 못했으나, 엄마에게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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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정치철학 수업.. 장장 9주간의 수업을 마치고, 이제 에세이만 남았다. 아직 많이 모자란 나의 실력에 추장은 쉬운숙제로 돌려주었다. 언제 실력쌓아서 부끄럽지 않은 발표도 하고 그럴수 있을까나. 일단 이해가 안가는 텍스트. 수업만 가지고 절대 되지 않는데.. 그나마도 열심히 못들었다. 읽기 숙제는 하지도 못하고,,, 밤을 새서라고 해야되는데 그런 열정은 벌써 식은건가.. 아니 공부하는 싫은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다만.. 확빠져들지 못할 뿐이다.. 쉽게 몰입을 못할 뿐이다. 그냥 두려워할 것없이 느낀 바를 쓰고, 요약도 하고 그러면 되는데 좀 두려워??  

처음에 데리다의 마르크스 유령들.. 환대에 대하여.. 등을 읽으면서 뭥미?? 철학을 문학처럼 온통 은유와 알 수없는 암호들로 메워진 것 같은 느낌.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도 짧은 데다.. 뭔가 알수 없다는 두려움은 감히 데리다를 어떻게 읽어야 할 지 도대체 감이 오지 않았다. 데리다로부터 점점 텍스트들은 쉬워져 갔으나, 어렵게만 느껴지던 첫인상때문인지, 나머지 책들도 잘 읽혀지지 않았다... 소화하지 못하고 넘어가... 항상 답답하고 찜찜하다. 언제 시간내서 다시 읽어봐야지 하는데 그 시간은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선생님의 강의는 명쾌하다. 경직된 사유의 틈이 벌어지면서 빛이 쏟아지는 느낌이라고 해야되나. 그 틈을 비짓고 껍데기를 벗으면 새로운 세상이 보이지는 않을까... 다른 차원의 정신적인 세계. 철학자들은 그런 세계에 산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준비물을 챙기는 중이고,, 신발끈을 묶는 시간이 너무 길다... 그렇게 하다가는 출발도 못하고 지칠텐데.. 그럼 안되. 신발끈을 묶었으면 얼른 길을 떠나야 한다...   

길을 떠나면서 나는 카메라를 준비하지 않으니,, 머리속에 이미지만 남는다.  

카메라와 일기장.. 그리고 여행하면서 읽을 책들도 잊지말자... 인제 준비다 되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길을 나서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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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기 위해 등록한 곳인데.. 아직도 나의 몸은 공부하는 몸으로 탈피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내 생활의 패턴은 무너짐과 불규칙속에서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책도 읽지 못하고, 자꾸만 반대로 가려고 한다. 내가 반대로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의지하고자 하는 바에 반하는 반대의지.. 노는게 즐거워? 그런것도 아니고,,, 그냥 익숙하지가 않아서 인가? 자극이 필요하다. 내 주변에는 우리 대중에서는 정말 다들 열심히 하고 몰입하는데 나 아직도 겉도는 느낌이다. 어떻게 하면 공부하는 신체를 만들수 있을까... 몸과 마음. 정신이 집중. 또 집중할 수 있도록 가다듬고 가다듬어 할 필요를 느낀다. 정말 다음주부터는 열심히 해야겠다.. 술도 좀 끊고, 집안일도 좀 하고,,, 심기일전 하자. 무엇에 집중을 하려면 시간을 어느정도 투자해야되는데. 난 아직도 엄한데다 시간을 쏟기 일수다.. 새어나가는 시간 내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간.. 정말 지나가는 시간을 잡기위해.. 나는 긴장이 필요하다.  

일단 만남을 대폭 줄일것. 만나려면 점심 때 이용해서 만나야겠다. 하루에 3시간 이상은 공부할 것.  9:30-11:30 2시간이랑 아침6:00-6:30 점심때 30분을 이용해서 공부할 것. 점심때는 한문숙제 하고. 아침에는 프루스트 읽기. 지하철에서도 읽기 그럼 하루 1시간 밖에 못읽네... 아 시간이 너무 없는데...  

이번주는 완전 포기하고 주3회 술마셨네. 이런 젠장. 결국 한문수업도 못듣고,, 속이 체해서 막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겠다. 단식. 오늘 저녁도 단식하고.  

공부하는 신체를 위해서 익숙해지기 위해서 좀 참아야겠다. 인내심을 가지고, 그리고,,, 특히 인터넷 하지 말기. 누누히 내가 말하지만 업무시간에 인터넷하지 말것. 괜히 쇼핑몰 보다가 돈만 날리고. 업무시간 집중해서 해야 할것은 좀 하고 살도록 하자. 나의 능력을 테스트 해볼수 있는 장이라고 생각하고... 인간관계도 정리하고... 그야말로 공부에 좀 집중해야겠다.. 쓸데없는 잡념들이 자꾸만 끼어드는 요즘. 잡념을 없애고 텍스트에 집중하자. 사유의 꼬리를 놓치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 집중하는 길밖에 없다.  

한가지를 집중적으로 생각하기. 그리고 쓰기. 쓰지않으면 정리가 안된다. 정리하기 위해 열심히 쓸 것 노트북도 샀으니, 이제 열심히 쓰면 된다.  

읽어야 할 책.  

꼬뮌주의 선언. 읽고 요약하고 자기코멘트 달기.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푸르스트와 기호들. 벤야민의 아케이드. 다른 정치철학책도 읽고 싶은데.. 배웠던것 다시 하나씩 읽어봐야 겠다...  

떡이 꽉막혀있다.. 목구멍이 답답하다. 삼실에 나가야 되는데 일도 정리하고 그냥 집에 있을까.. 쉬고 싶었자너. 그럼 오늘은 좀 쉬면서 책도 읽고 정리도 좀 하고 밀린 빨래. 밀린 아들의 대한 사랑.공부 해야겠다. 남편 생일이라 저녁수업도 못듣게 되었다... 누가 온다고 하는데 마누라도 없음 안되니까.  

하여간 핑계낌에 있는다 집에. 아들녀석은 게임하고 있네.. 아 정말 저놈의 게임. 진짜 싫다. 그게 뭐야.. 중독. 이런 녀석은...  

공부하는 것도 눈치 봐가며 해야하고.. 이런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야되... 그래야 자유로와져. 예전의 나는 아니다. 분명 하지만 다시 탈피가 필요하다... 정식으로. 그러기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나머지 쓸데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접고. 사유를 진전시키기 위해 일상을 단순하게 변화시키고, 몸도 건강하게 만들자. 피곤을 유도하지 말것. 만남을 만들지 말것. 업무시간에 업무만 하면서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로고 할것. 일주일에 1회 약속을 만드는 것도 안되고, 한달에 1회정도만 약속 만들것.  

정필요하다면 노트북가지고 다니면서 글쓸것. 그리고 집중해서 책읽을 시간을 확보할 것.  

나에대한 너무 많은 지시사항인가... 이런 결심도 없다면 도대체 뭐가 되겠는가.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고, 일체의 어둠은 몰아내자. 짜증난다.  

오래만에 쓰는 페이퍼가 고작 이거지만, 할 수 없다... 그동안 읽은 책 리뷰도 해야되는데 오래 되어 그냥 느낌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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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과의 만남. 낯설었지만 그는 너무 매력적이다.  

 

    벤야민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독일바로크 비애극의 원천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 하면서 그에게 대학교수자리가 기꺼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시대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는 그의 텍스트를 두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기존의 글쓰기 어법에서 벗어난 그의 텍스트들은 논리와 체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 였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그들이 놓치고 있는 사유의 틈, 같은 별을 두고 다른 성좌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레고리적으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 논문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논문은 바로크시대의 독일 비애극이 가졌던 시대의 알레고리적인 측면과 이 논문을 통한 글쓰기의 새로운 방식을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이중의 목적을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바로크 비애극의 독해가 어려웠던 것은 전후의 연결이 안되는 나열.  파노라마적인 글쓰기 방식 때문인데 벤야민은 기존의 귀납적이고, 연역적인 방법을 과감히 버리고 전개가 아닌 각각의 퍼즐조각을 독자들에게 흩뿌린다. 하지만 이것은 퍼즐이 아니다.  연관성 없어 보이는 산만한 텍스트 속에서 핵심부터 찾으려고 하는 수많은 독자들을  적잖이 당황시켰을 것이다.  이 끝없는 전환의 과정이 바로 베냐민이 독자에게 숨고르기, 관조적 글읽기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반짝거리는 모래알을 볼 수 있기 위함 이였다. 각각의 별들이 가치가 있고 그 별들이 모여 별자리를 만들 때 보는 사람마다 다른 별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벤야민의 글을 읽어내는 방식은 수잔손택이 투명하게 읽기(해석에 반대한다)가 적합하지 않은가 싶다. 예술작품을 해석하기 보다는 그 자체로 들어가 반짝거림을 경험하는 것이다. 벤야민 텍스트는 수많은 메모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것은 전체로서의 부분이 아닌 그 자체로 전체가 될 수 있으면서 또 모였을 때는 그 자체가 말을 하는 식. 그 말은 듣는 사람이 각자의 버전으로 다시 재현하게 되는 말이 될 것이다. 어쩌면 벤야민의 텍스트는 통찰의 텍스트라고 불리울 수도 있을 것같다.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어느날 툭 터지는. 물론 다른 해석자의 해석없이 벤야민의 이러한 방식을 혼자서 이해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벤야민이 어떤 의도로 어떤 실험을 했는지 통으로 이해하면 그 때 별들도 잘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다른 텍스트들 역시 기존의 자신이 가져왔던 고정관념들과 과감히 접어놓고 보는 백지의 미덕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숨한번 쉬고 넘어가고, 넘어가고 그렇게 그자체로 경험하면 되었던 것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별자리가 매직아이처럼 떠오를 것이고 떠오른 별자리가 주는 의미는 벤야민이 말하고 싶었던 알레고리의 기원일 것이다. 




    알레고리란, 어떤 한 주제를 말하기 위하여 다른 주제 비를 사용하여 그 유사성을 적절히 암시하면서 주제를 나타내는 수사법, 은우와 유사한 표현 기교라고 할 수있는데 은유가 하나의 단어나 하나의 문장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표현기교인 반면, 알레고리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로 관철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브리태니카 백과사전)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 일방통행로 등에서 세계를 보는 눈이 매우 알레고리화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유사성을 찾는 예리함. 그의 그 예리함은 바로크 비애극에서 역시 바로크시대를 읽어내는 시대적 코드로서도 비애극 자체가 알레고리이면서, 비애극의 형식 자체 역시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도 알레고리 일 수 있다는 벤야민의 신선한 발상. 궁정정치극이라는 특징과 고정된 배역과 배역의 역할, 무대장치 소재 등은 그 시대의 무엇인가를 우의적으로 표현했으며, 그것은 피안의 세계를 두려워하지는 그러면서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덜어주는 활동성 즉, 비애극의 덕성인 초연함이(아파테이아) 있었다. 벤야민은 그 시대사람들이 사용한 알레고리를 비애극에서 찾았으며, 알레고리의 원천 그시대의 역사관은 아파테이아가 아니였나 싶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그 시대의 알레고리를 가진 비애극을 알레고리적 형식으로 써내려갔으며, 또한 사유의 실험으로서의 알레고리를 보여주는 글쓰기이다. 세계를 우의적으로 여겼던 벤야민의 독특한 시각을 다른 무엇인가로 은유하고픈 욕망을 접어야겠다. 모든 것을 언어로 반듯하게 설명해야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투명하게 바라보다 그림이 그려질 때를 기다려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다림에 따른 인내심과 지구력, 그 별자리를 제대로 보기 위한 창조적인 시각도 필요함을 느낀다.  그것은 비단 벤야민뿐만 아니라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접하면서 해석자의 해석을 의지했던 나약함에서 벗어나 일단은 관조와 명상이 베어있는 독해에 힘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계와 분류, 의미의 규정하려던 나의 습관과 편견을 버려야 함을 느낀 것이 이번 벤야민강좌를 통한 가장 소중한 경험이였다. 이제는 벤야민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슬쩍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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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선생님의 호모 에로스를 읽었다. 

사랑과 삶에 대한 기술. 지금 현대인의 사랑에 대한 일침.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가에 대한 제시가 있었다.사랑은 삶과 즉, 일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우리는 사랑에 대한 열정과 달콤함을 불멸의 것이라고 규정하고, 그 사랑이 마치 전부이거나 하는 순정파와 넘쳐나는 자의식을 파고드는 사랑의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는,두려운 나머지 냉소파가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무엇인가? 열정과 쾌락 끝에 오는 권태를 이기못하는 사랑중독주의자와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냉소주의자,, 이 양극에 많은 연애관계가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순정파라고 볼수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사랑을 택하다가 권태라는 순간에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참는 것은 없다. 시간의 간격을 두고 언젠가는 폭발하기 마련이고, 댓가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환상인것을... 그럼 댓가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불가능한가? 글쎄 부모자식간에도 무조건적인 사랑이 어느새 댓가를 바라고 서운함을 느끼는데 남녀간의 사랑이야 더하지 않을까.  

사랑은 둘이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와 개별자가 서로를 너라 나처럼 나를 너처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그리하여 나의세계는 너로 인해 더 확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도 불멸의 판타지가 아닌 타이밍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 사랑의 망상기제를 벗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세계에서 한걸음 나가기 위한 공부는 그놈의 사랑도 변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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