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위로 떠오른 슬픔의 정체







    사랑하는 이의 죽음 뒤에 슬픔이라는 것은 꼭 그렇게 즉발하는 것이 아니라 뒤늦게 찾아올 수도 있다. 슬픔이 왜 뒤늦게 찾아오는 지 알 수는 없다.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실감나지 않아서 이거나 그 슬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자신도 모르게 회피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프루스트는 발베크를 다시 여행하면서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게 되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에 대한 단상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글은 뒤늦게 찾아온 할머니의 죽음을 실감하면서 느끼게 되는 프루스트의 추억과 고통에 대한 세밀한 이야기이다.

 프루스트는 발베크에서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 등을  몽상하다가 불현듯 마들렌을 입에 물면서 출현했던 비슷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나의 전인간적인 전복. 초저녁부터, 피로 때문에 심장이 뚝딱거려 괴로운 것을 꾹 참으면서, 나는 구부려 천천히 신중히 신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나 편상화의 첫 단추에 손을 대자마자, 뭔지 모를 신성한 것의 출현으로 가득 차 나의 가슴은 부풀어, 흐느낌에 몸이 흔들리고, 눈물이 눈에서 주르르 흘러나왔다. 지금 막 나를 도우러 와서 영혼의 메마름을 구해준 것은 몇 해 전, 비슷한 슬픔과 외로움의 한순간에, 자아를 하나도 갖지 않았던 한순간에,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자신에게 돌려 준 것과 같은 것, 나이자 나 이상의 것(알맹이를 담고 있으면서 알맹이 보다 더 큰 그릇, 그리고 그 알맹이를 내게 가져다 주는 그릇)이었다’

 프루스트는 밀려드는 슬픔의 실체를 그 영혼의 메마름을 구원해 준 것이라고 해석하고 슬픔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충만히 느꼈던 것 같다. 막연히 떠오른 슬픔의 이유는 바로 할머니에 죽음이 대한 상기였다. 프루스트를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내 주변의 일어났던 죽음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는데, 특히 나의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눈물 대신 하염없는 폭식을 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이유없이 터트리던 눈물들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가장 슬퍼해야 할 순간에 슬퍼할 수 없음이 너무도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프루스트도 할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슬픔이 느껴질 때 온전히 자기자신으로 들어가 슬퍼할 수 있음에 나를 나자신에게 돌려준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가 발작을 일으켰던 그 샹 젤리제 이후 처음으로 나는 무의식적인, 따라서 완전한 추억 속에서 할머니의 산 실재를 이렇듯, 매장한지 1년 이상이 지난 이제야 할머니의 팔 안에 뛰어들고 싶은 격한 욕망의 사로잡혀-사실의 달력을 감정의 달력과 일치시키는 걸 자주 방해하는 그 날짜의 틀림 때문에-처음으로 할머니의 죽음을 알았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고 할머니의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푸르스트는 그 상태를 가상상태로 표현하고 가상상태에서 벗어나, 이제 그는 할머니의 죽음을 이제 막 알았다는 듯이 비통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할머니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던 그 순간에 내가 들러붙은 것은 그 자아가 모르는 오늘 낮 동안의 하루라는 것의 뒤에가 아니라 시간의 연속을 중단하지 않은 채 극히 자연스럽게 , 지난날의  발베크 도착 첫 저녁 후에 곧바로 이어져 있었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기억속으로 들어가면서 프루스트는 할머니의 진정한 산 실재를 느끼는 동시에 영영 만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다음과 같은 모순의 고통을 감내하려고 하였을 뿐, 만사가 내 중심이였던 그 애정.... 허무가 그 애정을 사모하는 나의 심상을 지우며, 그 헌신적인 존재를 부수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 둘의 상호 인연을 없애고, 그 허무 속에서 확실성을 관통한 할머니의 죽음의 실감이, 되풀이 되는 육체적 고통처럼 욱신거리고, 그것이 거울 속에 보듯이 할머니의 모습을 되찾은 순간에 할머니를 마치 남의 곁에서처럼 우연히 내 곁에서 몇 해를 지낸 사람과 같은 나와 아무 관계없는 한갓 낯선 여인이 만드는 모순의 고통을 감내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그는 할머니의 그 지극한 애정을 허무가 만들어내는 모순의 고통을 감내하려고 했을 뿐 할머니의 죽음을 인정하려고 하지않았음을 고백한다.

  

 이제 그는 할머니와의 과거, 그때에 느꼈던 할머니의 고통을 덜어 드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되뇌인다. 망자에게 더 잘하지 못한 후회가 프루스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지난날 그 얼굴에 무모하게도 아무리 작은 기쁨의 그림자마저 뿌리째 뽑으려고 지랄한 적이 있었으나, 예컨대 생 루가 사진 찍어 주던 날 그랬는데, 그날 할머니의 교태가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마음을 상케하는 말을 건네 할머니가 얼굴을 찌뿌렸던 기억. 나의 가슴아픔이 영영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을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지 괴로워하고 싶었을 뿐이 아니라, 내가 받은 고뇌의 정직한 발생을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서 교차하는 생존자의 허무 그같이 이상한 모순이 다시 일어날 적마다, 나는 내 고뇌가 갖는 법도에 좇아 계속해서 그 고뇌를 받고자 하였다. 지금 이해되지 않는 이 고통스러운 인상에서, 약간의 참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성을 통해 그려지지도 무기력에 의해 경감되지도 않는 특이한, 우발적인, 이 고뇌밖에서 있을 수 없을리라는 것, 아무튼 죽음 자체가 죽음의 돌연한 계시가, 벼락처럼, 초자연적이 비인간적인 기호에 따라 둘로 갈라진 신비한 고랑을 내 몸 속에 파 놓았음을 알았다.’

  그가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  죽음에 관하여 통찰하게 만들었다고 나는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프로이트식 애도의 과정 중 수용의 단계를 거치면서 애도가 완성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프루스트에게는 뒤늦게 찾아온 슬픔이였지만 엄마에게는 할머니의 죽음이 전과 다른 모습, 할머니같이 탈바꿈을 시키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저 죽음이 허무로만 끝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아마도 엄마의 경우처럼, 생모의 죽음이 딸에게 남기는 큰 슬픔이고 보면 그 슬픔을 한시바삐 제 속에 품은 번데기를 부수고, 도 한 존재의 탈바꿈과 출현을 촉진하다보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죽자 우리는 남이 될까봐 꺼리고, 망자의 생시모습이 그립고, 기왕의 성격에 섞여 있던 다른 것을 배척하고, 차후론 오로지 망자의 사람됨을 이어받아 간다. 그런 뜻에서 비로서 말할 수 있다, 죽음은 헛되지 않다, 망자는 우리의 위에 계속에서 활동한다고,. ’  어쨌든 이러한 슬픔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어머니의 슬픔도 더 깊게 이해하게 되고 망자가 남기고간 사람됨이 죽음의 헛됨을 극복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며칠 후 그는 할머니사진을 보아도 이제는 그렇게 아련하고 가슴아프지는 않다. 그것은 추억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그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병환을 숨기고 사진을 남긴 할머니의 사랑을 앞에서 프루스트는 할머니가 덜 불행한 할머니를 상상한다. 하지만 그 뺨아래 숨겨져있던 슬픔, 무의식적인 비참한 모양을 프루스트 저 자신은 간파하지 못했으나, 엄마에게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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