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총총 시리즈
이슬아.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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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문장이 하나의 제목이 되었을 때, 그것이 ‘진통’이 되는 경우가 있다. 오해속에서 이 책을 사기가 주저되었지만, 다 읽고 나서는 겸손한 쥐가 되어 구멍속으로 숨고 싶었다.

 남궁인작가의 무해한 사람이 되지 않고자 하는 강박,, 으깨진 생명에 대한 인간의 무서움과 잔혹성은 잊고 있던 생명에 대한 실체성이 느껴졌다. 이슬아 작가의 생존을 넘는 글쓰기는 내 통점을 압박하였다.
 타자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의 이슬아 작가. 고통전문가인 낭궁인 작가. 이 둘사이에는 진정한 오해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폭력이 아닌 '오해'라는 교집합으로 그들은 서로의 세계를 탐사하고, 미지의 영역은 보존하려는 합의 도달한 것 처럼 보인다. 
한껏 달아오른 우정의 장이 왠지 설레임의 진통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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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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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왔지만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삶의 억척을 절단내는 것은 '휴식'이였다. 물론 이책에서는 죽음과 휴식은 같은 말이다. 타자적 삶을 반복을 눈치챈 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물리적 자살만 있겠는가. 그것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자살 역시 타자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소설의 역설이다. 이 소설의 여러인물들은 죽음충동에 이끌리는 자들이다. 주체에게서 타자를 감산하기 위해 자살을 택한다. 살아있으면서 죽어 있는 삶보다 죽음으로 완성되는 주체를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만 이들은 증상의 출몰을 환대하지 못한 자들이다. 내가 보기엔 그들은 이 세계에 대한 환상이 소멸하자, 죽음이라는 환상을 구성한다. 죽음은 죽음일뿐 별거 없는 거 아닌가? 츄파춥스를 빨면서 길고 지루한 섹스를 하는 것도, 예술을 창조하는 것도 그 어떤 것도 쾌락을 주지 못한다는 것에 절망한 사람들. 삶의 역겨움 속에서 그들은 그저 삶을 반복하면 알게되는 것이다. 멀리 왔지만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는 사실을. 욕망의 대상이 변화하는 것은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나의 결여를 두드려지게 만드는 마이너스의 상실이다. 

결여을 보상해주는 다른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 그것이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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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경제학 - 경제를 움직이는 입소문의 힘
로버트 J. 실러 지음, 박슬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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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탄생과 함께 읽고 있다. 인간이란 서사없이 기억의 문제를 다루기가 어렵다. 아무리 파편적이고 이질적인 것도 연결하여 이야기를 무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같은 언어라는 동일한 프로그램에 속해 있기 때문에 가능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만드는가는 우리가 가진 문법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내러티브의 경제학은 이야기가 어떻게 경제전반, 정치적 영역에 까지 접근해 들어가고 있는가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책인듯 싶다. 아직 첫부분에 머물고 있으나, 흥미롭다. 이것 역시 인가의 무의식에 기반한 우리의 마음의 논리를 탐구한 책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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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꼴리의 검은 우물

멜랑꼴리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대상을 상실하였을 때 일어나는 작용이다. 흔히 우리는 누군가 죽음. 또는 실연을 통해 욕망의 대상 즉 리비도의 대상을 잃어버렸을 우울감으로 추락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상실에 관하여 애도의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정신병적 멜랑꼴리는 나르시시즘으로 퇴행하게 된다. 리비도의 흐름은 대상에서 자아로 옮겨가게 되며, 그렇게 자아로 향한 리비도는 무거워진 존재감에 짓눌리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신체의 이물감으로 비롯된 역겨움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현시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껍데기 뿐인데, 나의 신체에 흐르는 감각들은 이물감으로 인해 절단해야할 그 무엇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속에서 자존감은 추락하게 되어 자기비난과 파괴로 이어 질 수 있다. 자존감의 추락은 세계에서 자신을 도려냄으로 해서 고통을 중지 시킬 수 있다고 믿게된다. 일반적인 자살이 타자와의 관계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정신병적 멜랑꼴리는 환상이 사라진 핍집성, 피부를 걷어낸 자기살을 봐야하는 고통으로 짓눌리게 된다. 우울증은 그런의미에서 환상을 잃어버린 세계의 공허 속에서 존재감에 침식당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패한 환상

부패한 환상의 냄새는 연기처럼 소멸하고 싶다는 환상을 갖게 만드는것 같다
환상은 대상을 상정하고 있으며, 대상은 전이관계속에서 동일시를 통해 환상을 양산하게 된다. 그러한 환상이 지속되면서 그것을 확신하게 되면 망상이 되고, 환상에서 벗어서 주체의 핍진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되면 한없이 남루한 현실은 마치 욕망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울증으로 곤두박질 치게 된다.

대상을 상실하였을 때 적절한 애도과정을 통해 다시금 새로운 환상을 만든다면 주체는 리비도는 복원될 것이지만, 대상을 잃어버리고, 욕망이 감소된 상태는 리비도는 자아에게 투자된다.

애도로 나타나는 경우 는 상황이 지나면 그러한 상실감이 극복될 수 있지만, 멜랑꼴리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멜랑꼴리의 메커니즘

반면에 멜랑꼴리의 특징은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자기비하감을 느끼면서 급기야는 누가 처벌해 주었으면 하는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를 갖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멜랑꼴리의 상황은 우리가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특징들이 다 애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는정도 이해가능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 한가지 예외란 바로 애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자존감의 추락이다.” < 에도와 멜랑꼴리 > 244-245

철회된 리비도의 처리

대상에게 낙심을 하여 대상을 사랑하고 세계에 관심을 표하는데 제한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멜랑꼴리의 자아는 분열되어 있지 않으며, 자신에 대한 이중적 잣대 없이 쓰레기라고 언표화 했을 때 그 자신을 잔여, 불순물로 간주한다. 언어의 이면이 없는 것이 멜랑꼴리의 특징이라고 한다.

사랑은 대상에게 리비도를 투자하면서 일어나지만, 대상을 상실한 리비도는 길을 잃고 자아에 복귀되면 멜랑꼴리, 슬픈노동이라고 불리는 애도를 겪지않으면 그대로 고여있게 되어 주체를 짓누르게 될 것이다.

애도는 결국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떼어내는 일이다. “죽은 대상을 다시 죽이는 일이며 당연히 고통스러운 일일 수 밖에 없다.

애도는 옛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대상에게 리비도를 투자해야 하는 현실적 요구를 기억을 통해서 타협한다.

그리고 울어야 한다.

그렇다면 애도없이 상실감을 처리할 요량으로 리비도의 이동이 일어나면 어떤일이 일어날까. 대상의 상실없이 또 다른 대상으로 봉합한다는 것은 상처위에 또 다른 상처를 얹어 놓는 것과 다름이 없으면 그것은 언제가 상처뿐만 아니라 상처주변까지 썩게 만들 수 있다. 그러한 부패로 인한 갑작스러운 붕괴는 멜랑꼴리를 가속화하게 된다.

멜랑꼴리에서는 애도와는 달리 무엇을 상실했는지가 분명치 않음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애도는 대상을 상실을 전제로 한 감정이다. 즉 애도에는 대상이 분명하지만, 멜랑꼴리는 슬픈데,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

무의식적인 상실은 어떤 내적인 작업을 통하여 자기를 비난하고 자기를 처벌하는 망상으로 귀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완만하게 서서히 자신을 집어삼킨다. 아주 조용하게

나르시시즘의 퇴행이라고도 부른다.

멜랑꼴리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멜랑꼴리는 주체의 의식적 노력으로 벗어나기는 힘이 든 것 같다.

주체를 지탱해주는 새로운 환상의 가능성의 공간이라는 측면에서는 공백의 장소에서 머물며 무한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0도의 자리이기도 하다. 꼭 정신분석을 받지 않아도 분석담화를 통해서 시적실천을 통해 멜랑꼴리에서 빠져나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분석담화란 우울증의 담화로도 불 수 있을 것이다. 대상a로서의 주체를 0도로 이끌고 나아가 새로운 기표를 창안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의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0도가 된 김에 0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것.

신경증자의 멜랑꼴리는 이런 면에서 주체에게 주어진 사건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사랑이라는 사건은 주체의 한계를 넘는 기회의 장이다. 사랑이 이루어지건 이루지지 않건 간에 자아의 문턱을 넘게 해주는 사건적 장이라는 의미이다. 환상이 없어진 드문 상태를 유지하는 힘. 리비도를 거기에 투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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