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의 윤리 - 칸트와 라캉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4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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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칸트를 사드와 더불어‘에 걸려있는 근본적인 내기는 또 다른 훨씬 더 섬뜩한 칸트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칸트와 관련하여 라캉은 관념들의 역사에서 칸트의 윤리적 혁명은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발견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었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쾌락원칙의 너머‘의 차원을 윤곽지은 최초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 P7

주체의 ‘탈중심성은‘은 기원적이며 구성적이다. ‘나‘는 바로 그 처음부터 ‘내 자신 바깥에‘있으며 외적 구성성분들의 브리콜라주이다.... 식물이랑 땅에 묻힌 뿌리라는 가장 속에서 내장을 몸체 외부에 가지고 있는 동물이라고 헤겔이 주장하는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 헤겔적 정식화는 또한 - 그리고 특히- 인간 동물의 자기바깥에 있는, 인간동물의 내장이라고 할 수 있는 상징계에도 적용된다. 내 존재의 정신적 실체, 내가 나의정신적 자양분을 이끌어내는 뿌리는 내 자신 바깝에 있으며, 탈중심화된 상징적 질서에 묻혀있다. - P9

동료 철학자로서 실재적 존경의 유일한 표시는 질투어린 증오감이다. - 어떻게 해서 그 저자가 말하는 바를 내가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말인가? - P15

철학적 윤리에 대한 ‘프로이트적 타격‘으느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철학이 도덕법칙이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더 정확히는 칸트가 정언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초자아에 다름 아니다. - P17

라캉적 타격 : 철학이 윤리의 이름으로 제공해야 하는 최선의 것은, 사드의 유명한 저술의 제목을 말바꿈해 본다면, 일종의 ‘규방 속의 실천철학‘이다.
... 라캉은 칸트에게 윤리의 실재적 중핵- 적실정을 유지하고 있으며 초자아의 논리로 환원될 수없는 핵심-의 발견자라는 명예를 부여한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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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코레오그라피(coreography)에 대해 알게되었다. 아이린 슬기 안무영상을 보다가 너무 놀라워서, 다른 것들도 찾아보니 그 춤의 장르가 아닌 안무를 뜻하는 단어였다. 앰비규어스의 안무영상도 즐겨보고 있다. 박자와 디테일한 움직임들.

춤을 잘 추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루브보다  락킹, 텃킹 같은 움직임들이 멋있다.

 

이 책은 저자가 썼듯이 '안무와 철학의 대화'이다. 아직 책의 도입부인데 읽기가 만만치 않다.

책의 부제는 '퍼포먼스와 움직임의 정치학' 이며,

저자는 안드레 레페기 미국 공연예술학 교수라고 한다.

안무에 대해 그냥 느끼면 되는 것이지 이것을 대해 뭔가 더 깊이 알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상투적이지 않은 이 문장들은 시간을 내어 천천히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아직 책의 도입부, 2번 읽었는데 줄을 긋느라 진도가 안나간다.

버릴 문장이 없는 책을 만나면 두근 거린다. 모든 문장에 줄을 긋고 싶은 책이 내 기준 좋은 책이다.

새로운 춤의 세계와 정치학, 철학을 저자가 어떻게 엮어낼까. 기대된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은  리뷰 전에 쓰는 글인데, 책에 대한 기대감같은 것도 가끔은 읽기 전에 쓰고 싶을 때가 많다.

 

 

멈췄다, 이어지기, 이것을 트렌드라 부르든 경련이라 부르든 딸꾹질하는 듯한 시퀀스가 안무에서 점점점 늘어나고 있는 점은 무시하기 어려워 보인다...... 오늘날 안무된 움직임을 딸꾹질로 여기는 것은 비평적인 불안감을 조성한다. 운동미학적 더듬거림의 분출때문에 춤의 미래가 위협받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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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과 승화사이

라깡의 인간학 리뷰

     

 

 

 

큰사물의 중력

 

라깡은 우리는 충동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언어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의 충동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부모, 가족, 사회를 관통하는 명령의 형식을 띤 규범의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큰 사물, 주이상스를 가두리치는 그 언어가 명령어, 현실원칙의 법과 같은 대타자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초과하는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고 말한다.

충동을 억압하는 언어는 왜 필연적으로 초과할 수 밖에 없는가?

충동의 차원이 어차피 언어로 번역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서로 다른 시스템이기 때문에 대타자의 명령어가 충동에 영역에서는 외국어이기 때문이지 않은가.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하다.

큰 사물의 영역이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악마로 간주하는 현실원칙은 억압하려고 하면 할수록 초자아는 비대해지고, 비대해진 초자아는 제 발에 걸려 큰 사물의 영역에 질질 끌려가게 된다.

이러한 사례로 저자의 강의에서 칸트와 안티고네의 사례를 들고 있다.

 

안티고네의 강박, 크레온의 히스테리

 

칸트의 정언명령 기표들은 그 자체로 물신화 되면서 주체의 안정을 위협하고 주이상스의 지역으로 세계를 밀어넣는 초과의 사건을 발생시킨다.”

쉽게 말하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면의 명령은 고통의 감정을 가져온다. 인간의 그 명령대로만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정언명령에 필연적으로 고통을 가져오고, 고통이라는 정념에 의해 실재와 조우할 수 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로 소포클래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사례로 든다.

안티고네는 오빠 폴뤼네이케스의 시체를 매장할 것을 크레온에게 요구하지만, 크레온은 국가를 반역한 자의 시체는 처리할 수 없다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게 된다. 크레온의 법과 질서에 대한 집착은 결국 몰락에 원인이 되고 만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경고를 무시하고 오빠를 매장하러 갔다가 결국 자살하고, 안티고네를 사랑한 크레온의 아들과 그 아들을 사랑한 아내 역시 모두 죽고, 국가는 몰락하게 된다.

안티고네의 주이상스를 향한 집착과 현실원칙을 고수한 크레온의 집착. 이 둘의 집착은 주체에게 몰락을 선사한다. 안티고네는 죽음을 욕망하는 강박으로 보이고, 크레온은 법과 질서에 집착하여 모든 것을 잃는 모습이 히스테리적으로 보인다.

 

자아. 이드, 초자아 - 쾌락, 현실원칙 - 무의식, 전의식

일대일 대응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주이상스의 영역인 충동의 영토와 현실원칙에 의해 보존되는 자아의 영토는 기이한 국경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의 형식을 한 국경선이며, “이것이 충동에 대한 억압의 장벽으로서의 법-기표연쇄의 본질라고 말한다.

 

목자의 차원과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위로

 

이러한 뫼비우스의 국경선을 따라서 정신분석의 실천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정신분석 실천에서 분석가는 목자의 차원에서 얘기해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난 10년간 인문학 언저리에서 내가 의지할 사상적 멘토를 찾아다니고, 실망한 궤적을 돌아보면,

목표는 한 가지 였다. 불안한 나를 규정해 달라는 외침.

큰사물은 불안을 야기한다.

 

불안과 내 영혼을 교환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떠한 사상과 이데올로기도 나를 해석하는데는 퍼즐 맞지 않았다. 심지어 그 모든 공부를 개인적 탐사에만 골몰하는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지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개인의 영역에서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이 삶이 이어진다는 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라깡정신분석을 공부하게 되면서, 상상계적 방식으로 삶의 틀을 바꾸는 짓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나를 규정해주지 않는 분석가 함께 정신을 분석하기도 하지만,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에는 내가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존재를 불안하게도 만들지만, 무한성의 개방은 자유의 맛을 느끼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정신분석실천이 목자와 스승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배우고 있지만,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배반의 실천학

 

그럼 목자의 차원이 아닌 정신분석임상에서의 실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라깡은 장치화된 위반의 실천으로 간주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임상을 장치화된 위반의 실천이라고 할 때, 여기서 위반은 주체의 무의식을 통제하는 상징적 법의 기능이 파생시키는 환상들을 거슬러 횡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신념처럼 매달려있는 무의식의 담화들을 해체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충동을 억압하여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억압되는 구조들을 횡단하여 충동의 가장자리까지 접근해 가는 것이 문제이다. ”

정신분석실은 환상의 소각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충동을 어떻게 방어하는가? 다시 묻는다.

 

충동, 주이상스가 출몰했을 때, 나는 충동을 어떻게 방어하는가? 충동을 그 자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질서, 다형성, 파편성이 그 특징이라고 할 때, 나는 그 것을 어떻게 알아보고 방어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초자아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충동, 큰사물의 영역 역시 초자아 만큼이나 그 명령어가 뚜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자신을 파괴할지라도 충동의 맨홀에 빠지는 방식으로 초자아의 명령을 무시하고 충동에 매번 한 표를 던지는 행위의 반복. 대상a(죽음충동)에 대한 집착은 강박증이 도덕의식에 집착하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강박증과 마찬가지로 히스테리 역시 충동의 수로에 갇힌 채 소외된 쾌락탐닉의 희생양이라는 분열적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충동과 손을 잡으면 잡을수록 억눌린 초자아는 윤리의식은 주체에게 고통을 가한다. 그러나 그것의 반복된 수동성임을 인지하였을 때,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반전은 가히 충격적이다.

결국 주체()는 자신을 벌 주는 변태적인 방식의 쾌락에 골몰하게 되는 것 같다.

충동을 효과적으로 방어 할 수 없을 바엔 수용하고 즐기고자 하지만, 아침의 후회 또는 이를 망각하는 기제의 발명은 이 충동과 손잡은 방식 역시 수동적 사태라는 굴욕감을 가져다 준다.

 

이와 관련하여 주체의 무의식에 자리한 충동과 그를 향한 덧없는 방어인 이 같은 억압의 대립구조를 라깡은 원초적 윤리라고 부른다.”

 

언어와 행위의 불일치. 언어로써 충동은 억압하지만, 행동으로 초자아에 방어하는 이상한 한 쌍의 코미디. 그런 의미에서 은밀히 한편을 맺었던 충동마저도 배반할 수 있는 배반의 실천이 나에게 필요하다.

프로이트의 승화와 라깡의 승화 개념의 차이

 

고정관념으로서의 승화

 

인간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반사회적 속성을 사회가 허용하는 형식, 예를 들자면 예술로서 승화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도 없다. 큰사물, 주이상스와 같은 개념과 달리 승화라는 개념은 이미 고정관념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에 대해 무슨 더 할 말이 있을까라는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지, ‘대상에 대한 관계의 문제(124P), 대상과 승화(126P)는 유독 어렵게 느껴진다.

 

프로이트 승화 : 허용된 대상으로 대체하는 승화

저자는 충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또는 충동이 자리한 장소의 중핵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면 충동을 둘러싼 대상의 관계 개념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충동의 본질은 언제나 쾌락의 향유이다. 그러나 충동의 거친 속성을 방어하기 위해 자아는 대상이 필요하며, 대상은 도구 언어/기표이다. 승화는 이와같은 대체가 적절히 일어났을 경우를 가리키는 개념이며, 이것이 프로이트가 규정한 승화라고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앞서 라깡은 충동을 억압하기 위해서 언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충동을 둘러싼 대상이 언어라는 것은 충동을 억압하기 위한 언어라는 도구는 규범적 언어이고, 여기서 충동을 둘러싼 대상 즉 언어는 앞선 시간에 언급되었던 충동을 대리한 기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충동을 대리한 기표가 사회가 허용하는 기표로서 대체된 것을 승화라고 보고 있는 것인가. (다른 차원인 것인지 혼란스럽다.)

 

저자가 인용한 라깡의 말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승화가 억압된 것이 회귀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없이 만족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으며,

성적 리비도는 대상들 속에서 만족을 찾는 것인데, 어떻게 그 만족의 대상을 구별해 낼 수 있을지 프로이트는 당혹스러워로 할 것이라고 모순을 지적한다.

 

억압 없이 만족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성충동을 의미하며, 이것은 충동이 증상의 형식으로 출현하여 무의식의 만족을 얻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승화가 억압 없는 만족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충동이 의식의 차원에서 만족될 수 있음을 뜻하며, 프로이트는 충동의 대상이 사회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대상으로 교체 되는 과정에서 만족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즉 충동을 만족할 만한 대상으로 교체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라깡의 승화: 큰사물의 영토의 개방

 

위와 같은 프로이트의 승화개념은 개인이 집단-공동체 내부에서 안정적이며, 직접적인 대상을 발견하여 성충동이 만족되는 구도를 상상하게 만든다. 개인은 성충동과 일탈의 장소이며, 공동체는 이에 대해서 만족의 길을 열어주는 이상적 체계라는 관념이 그것이다.

그동안 개인의 성충동에 방어적 문명시스템을 구축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방어의 개념은 억압없는 만족으로서의 승화는 사회적 승화의 개념과는 대립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개인의 성충동을 공동체가 만족을 길을 열어준다는 의미는 언뜻 이해가 어렵다.

가족시스템을 만들어 개인의 성충동을 해결한다는 의미일까?

개인은 성충동과 일탈의 장소이기 때문에 집단, 공동체 속에서 개인의 충동이 사회적 만족의 대상으로 교체되는 사회적 승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라깡은 인간은 충동에 대해서 주변을 맴도는 방식으로만 만족한다고 말하며, 이러한 우회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에는 억압의 속성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충동을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억압없이 직접 만족할 수가 없다.

히스테리 또는 강박증적인 증상으로 밖에 무의식은 만족을 느낄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무의식의 과정은 충동을 그 자체가 아닌 대상으로 매개로 할 때만 가능한데, 대상은 충동을 은폐하는 동시에 충동의 우회적 만족을 가능하게 하는 가상물(대리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 대상a가 나오는데, 충동을 은폐하거나 우회적 만족을 가져다 주는 대상은 대상a(소타자)이고 이것은 가상물이며, 자아의 모습을 결정하게 되며, 소위 인간은 욕망 그 자체라는 의미가 이것이라고 말한다. (충동에서 떨어져나온 대상a와 이 소타자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갑자기 혼란스럽다)

 

 

승화의 차원에서는 대상은 상상계적인 작업, 특히 문화적인 작업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상상계적이라는 표현은 자아의 동일시와 관련되며, 대상이 충동을 우회적으로 만족시키는 대체의 기능을 하는 동시에 상상계적 기능을 한다는 표현은 대상이 욕망의 만족과 관련이 있으며, 주체의 자아-이미지를 결정함을 의미한다.

주체는 자신의 충동을 우회적으로 만족시키려고 대상을 취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족과 동일시의 이 같은 과정은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이기도 하다.“ (인간은 욕망 그 자체라는 의미와 같은 내용인가?)

 

라깡은 승화의 대상-동일시적 차원을 환상의 도식으로 설명한다.

충동을 대상으로 매개한다는 의미는 욕망의 대상을 대체한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끝없는 욕망을 대상을 추구하면서 주체를 소외시키는 환상의 도식을 저자는 소개한다.

 

$a 이 수식은 주체가 상상계적 대상에 사로잡히면서 스스로 소외되는 과정을 표상한다. 주체는 그이 욕망의 대상인 a, 즉 작은 타자에 리비도를 투여하는 방식으로 상징계 내부에서 자신의 위치를 할당받는다.”

 

승화는 단지 주이상스의 만족이 아니라 주이상스적 주체가 사회공동체 내에서 자아를 실현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개념으로 대상의 속성상 억압이 없을 수 없다.

현대인이 충동의 대상에 사로잡혀 소외되는 현상이다. 충동의 대상은 욕망의 모습으로 우리는 끝없는 욕망의 대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으며, 그것이 가진 대체적 속성, 즉 허구적인 속성을 알아채지 못한채 압도당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진정한 승화란?

 

가장 이질적인 것으로서의 충동을 어떤 대상의 매개도 없이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네 이웃은 가장 낯선 자이며, 프로이트가 낯선 것Fremde"라고 했던 주이상스의 영역이다.

낯선 것, 큰사물, 외밀성이라고 불리던 내 안의 낯선 이웃에게 어떻게 환영할 것인가.

 

우리는 억압없이, 대상없이, 매개없이 충동이 현전한다면 카오스가 소환되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욕망에 대상에 속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백지가 아니라 이미 촘촘한 격자로 새겨진 몸이다. 이제 커서를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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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인간학 - <세미나 7> 강해: 윤리 그 자체인 인간 존재에 관하여
백상현 지음 / 위고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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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7의 의미

 

 

 

 

라깡의 숲

 

재작년 라깡세미나와 교육분석을 동시에 시작하면서 꿨던 꿈이 있다.

기억나는 대로 잠깐 옮기면 나는 나의 아들과 함께 째즈가 들리는 반지하 까페로 들어간다.

머리를 묶은 작곡가가 앉아있다. 나는 그와 음악이야기를 나눈다. 흰 가운 의사들과 함께 나는 수업을 듣는다. 그들은 가짜라고 작곡가에게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절벽에 70도의 각도로 뻗어있는 나무들과 화려한 바위를 가진 엄청난 규모의 절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너무 쉬운 클리셰로 범벅되어 해석도 쉽다.

작곡가는 분석가이고,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반지하 그리고 안다고 가정된 주체들인 가짜 의사들. 화려한 절벽은 이 라깡 학문이 나에게 화려한 지적 환상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지하세계가 아니라 집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어떤 이태원 같은 동네로 자꾸만 이사를 간다. 동네에서 내려다본 빽빽한 집들. 나는 능선을 걷고 동네에 있을 법한 숲으로 들어간다. 짙은 녹색이끼가 가득한 주름진 산. 나는 작은 동네의 이런 산이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이 산의 질감이 얼마나 무겁고 진한지 마치 예술작품 같다고 생각한다.

밑으로 내려와 나는 다시 숲속을 탐닉하기 위해 나의 집으로 올라가는 것을 반복한다.

밑에서 올려다 본 화려한 절벽이 위에서 내려다는 시점으로 변화하고 이제는 주이상스의 산맥을 따라 나는 그 숲에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다.

빽빽한 집들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곳에 자꾸 이사를 간다는 것은 집 하나하나가 어떤 기표들, 그 것을 조망하고 싶다는 소망과 라깡의 숲에 들어가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망들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잠시 시들했던 공부가 꺅텔의 시작으로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음소거와 공백

 

퇴근 무렵, 이미 나는 너무나 지쳐있다.

마치 고막이 부식된 것 같다.

하루종일 쉬지 않고 지저분하게 그 또는 그녀들의 목소리는 마침내 쟁쟁거리는 울림으로만 들린다.

더 이상 내용은 들리지 않고 음성만 남아, 그저 목소리의 양태만이 뾰족하게 신경에 거슬린다.

거의 토할 것 같은 기분이다. 한 낮의 가위눌림, 악몽 같은 이 목소리들은 나를 흔든다.

 

어느 아침 출근길에 나는 불어버린 한강을 보다가 불현듯 그 쟁쟁거리는 목소리들을 듣는다. 분명 나는 불어난 한강 수위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왜 그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드는가?

멍하니 한강을 바라보다 세계의 언어가 난립하는 순간, 기분은 불쾌해진다.

만약 세상의 말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과 동시에 리모컨의 음소거 버튼을 누르듯 을 지워 본다. 찰나의 고요에서 일순간 세계의 소음이 들어온다. 말을 제거한 그 자리에는 세계의 소음이 가득 찬다. 흔들리는 버스의 소음. 내가 탄 버스 밖 지나가는 자동차소리, 빗소리, 사람들의 움직임 소리... 눈 앞에 내 손, 내 발. 신체가 감각되는 순간. 곧 나는 다시 상징계로 돌아와서 몇 일째 언어의 효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아까의 불쾌감은 사라졌다.

타자로 가득찬 언어들을 지우면, 홀연히 존재는 공백을 가진 물체가 되어버린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그냥 물체, 에너지원으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느껴진다.

 

언어의 효과를 지운 세계의 공백

 

그동안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모든 것은 언어의 효과라는 저자의 말이 떠올랐다. 단순하게 말을 지우기만 해도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쟁쟁거리는 목소리며, 그에 따른 불쾌든, 유쾌든 그 너머이든.

모든 것이 언어의 효과라면, 모든 욕망의 시작과 끝이 언어로 인한 효과이며, 인간의 존재가 가진 고통과 쾌락의 원천이 언어의 효과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불현 듯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공백과 잠시 조우한 것이 아닐까. 잠시나마, 팔루스세계의 합에서 이탈한 것일까. 이것 역시 언어의 효과에 불과한 것일까..

공백을 순간이 아닌 공백에 압살당하는 것이 우울증이 아닐까 싶다.

이 과정은 목소리들의 양태가 기표로 대상a로 작용을 하고, 대상a가 데려간 자리는 공백을 보유한 신체를 드러나게 한다. 사실 큰 사물의 그림자만 밟은 것일지 모른다.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지만, 또 나의 오독인지도 모른다. 라깡은 잘못된 환원이 아닌 창조적 오독은 관대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심각하게 산으로 간다면 말려주시기 바란다.

 

그동안 언어의 효과라는 말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영혼, 무의식 같은 것을 실체로 규정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심지어 나는 정신분석을 영혼의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감정노동을 넘어 이것은 영혼의 노동이다 또는 사랑의 노동이라고 말이다. 저자는 존재를 내어준다는 표현을 쓴다. 왜 그런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지 이제 이해가 간다. (영혼마저도 언어의 효과라고 언젠가 저자가 쓴 적도 있다) 실체를 가정하는 낭만주의. 라깡이론에서 나의 고정관념이 부서진 자리가 바로 이 낭만주의적 실체의 자리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낭만주의적 실체를 가정했던 것 같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고 있지 않았나. 막연하지만 어떤 확신 같은 것에 기대어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운명론자, 라깡을 공부하게 된 이것 조차 운명에 의한 것일지 모른다는 환상 같은 것이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신경증자인 우리에게 공백이란 세계를 떠도는 유령이며, 바로 이 유령을 따라서 세계의 유한성을 빠져나가는 궁극의 윤리가 된다. 이러한 무한성의 윤리가 세미나7을 통해 명백히 정의되고 있다. 욕망의 대상이 법과 초자아의 수로들에 의해 통제되는 유한성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윤리학, 그런 다음 큰 사물의 위상으로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윤리학. 그런 다음 그것을 큰사물의 위상으로 전화시키는 윤리학. 달리 말해서 의미로 봉합된 사물의 외관이 아닌 사물의 존재를 공백인 그것을 사유하는 승화의 절차. 공백을 사유함으로써 주체 스스로도 공백과 동일시 되는 그런 다음 엑스 니힐로의 사건적 장소가 되는 그러한 절차의 윤리학이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후에 자끄 알랭밀레는 이것을 장치화된 위반의 임상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무의식을 또는 문명의 무의식을 고착시키면 통제하고 있는 법- 환상의 거대한 기둥들을 무너뜨리는 위반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11P -

 

이 작은 사건이 공백의 유령이 잠시 머문 순간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초자아의 붕괴 : 위반의 장치화된 임상 절차와 공백의 사유

 

세미나7을 정신분석의 윤리라는 명명한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정신분석임상에서 무의식이 어떻게 윤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밝힌다. 각각의 개인에게는 각자의 타자의 남긴 흔적으로서의 초자아가 있다.”

인간은 언어가 도입되면서 첫 번째 거세를 당하게 되고, 이러한 거세는 윤리적 구조를 심어놓는다. 인간으로서 살기위해 필연적으로 심어진 언어라는 도구는 그렇게 초자아와 함께 우리에게 새겨진다. 첫 번째 거세에 의한 흔적으로서의 우리의 무한반복의 궤도를 탐구하는 것이 정신분석 임상의 우선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자의 길트임에 의한 궤도는 원래 있었던 어떤 실체가 아니라,

 

앞서 얘기했던 불쑥 끼어든 목소리, 비난과 칭찬을 번갈아 연기하는 초자아의 목소리는 예고 없이 들어 왔다 나간다. 이같은 초자아로서 군림하는 무의식의 발화는 예전보다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초자아의 환영에 지배받는 것은 비윤리적이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는 주체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아직 선생님께 혼나거나 칭찬받는 초등학교에 교실에 앉아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할까.

초자아의 목소리는 대타자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타자의 목소리는 주로 명령과 금지의 목소리이다. 하루에도 수십번 이러면 안되고 저러면 안되고, 이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고, 끊임없이 초자아의 목소리는 마치 충동의 목소리와 싸우는 듯 주체를 지배한다. 그럼 초자아의 주인은 누구인가?

목소리는 주인이 없다. 대타자의 주인이 있던가? 없다.

초자아로서 등장하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응시도 마찬가지다. 마치 신체 곳곳 내부에도 CCTV를 달아놓은 듯 너무나 익숙하게 그것은 내 안에 있다.

어느 날, 나는 화장실에서 울고 있다. 울고 있는 나, 그걸 응시하고 있는 나, 응시하는 나를 지켜보는 나, 응시를 지켜보는 나를 다시 지켜보는 끝없는 거울에 갇힌 것만 같은 순간들, 초자아의 응시를 비웃듯 묘하게 삐져나오던 그 웃음은? 하지만 그 웃음마저 가짜로 느껴졌던 순간이 있었다. 다분히 증상적 순간이다.

응시하는 나와 응시당하는 나는 같은 것 같지만 그것은 타자의 응시가 아니였을까? 나의 신체가 타자들의 전쟁터처럼 느껴진다. 만약 그 응시와 목소리가 신이라는 타자로 가정된다면 보다 안정될 것이다. 그러나, ‘응시하는 나를 보고있는 나를 진짜 실물타자로 대체하는 순간 정신병적 망상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라깡세미나 7의 정신분석의 두 번째 윤리는 매 순간 출몰하는 초자아의 환영적 기둥 역시 무너뜨리는 위반의 장치화를 일상화를 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윤리이며, 삶을 고정시키는 환영적 욕망의 기둥들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며, 새로운 삶은 시작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윤리라고 말한다. 또한, 그러기 위해 우리는 죽음을 욕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큰 사물을 방어하기 위한 욕망의 죽음을 욕망하고, 임상에서 일상에서 초자아의 죽음을 욕망하는 것. 팔루스의 장례식을 각자의 방법으로 치러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새로운 기표의 유입 : 큰 사물과 같은.

 

라깡세미나 71959년에서 1960년 사이 24회에 거친 구술 세미나를 엮은 세미나7 : 정신분석의 윤리의 강해서이다. 1960년이면 우리 부모님들은 한창 젊을 때였고, 내가 태어나기 10여 년 전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그는 이미 라깡이라는 기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 세미나는 우리나라에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백상현 저자가 번역된 세미나 1과 세미나 11사이에 번역되지 않은 세미나를 강해하는 이유는 라깡 정신분석의 핵심 사유를 고스란히 담고있으며, “세미나7을 읽는 것은 곧 라깡의 새로운 인간학을 읽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고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라깡은 프로이트의 큰사물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주이상스가 상징계와 상상계 모두로부터 독립된 독자적 공간에 위치한다고 가정한다. ”고 프롤로그에서 말하고 있다.

지금은 이 말이 이해가 가지만, 아마 처음에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정말 난감했다. 다른 철학적 지식도 없고, 심지어 프로이트의 이론도 일부 고정관념으로만 갖고 있는 그러한 상태에서 라깡수업 들었을 때 너무나 난해했다. 나는 라깡이론과 대치되는 고정관념(지식)이 별로 없었기에, 처음에는 그냥 수업을 들었고, 머릿속에 의문만 가득 찬 채로 한 해, 두 해 보내왔다. 기존의 내가 아는 지식으로 환원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부족했다고 할까.

지식은 없고 오로지 경험과 상상으로 그 간극을 메워보려고 꿈을 동원하고, 상상력을 동원하고 이미지를 동원하려고 했다.

 

특히나 라깡세미나7에서 다루고 있는 큰사물 같은 경우에는 속된 말로 내 사전에 없던 말이였다. 아직도 명확하게 설명은 되지 않는다. 기존에 없던 기표의 도입이 내 인생의 사건이라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팔루스, 큰사물, 주이상스, 대상a , 죽음충동 등이다.

그리고 기존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인 무의식, 쾌락, 성욕 등이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인 무의식, 쾌락, 성욕의 의미는 너무나 기의와 기표가 밀착되어 있기에 새로운 개념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기존에 내가 가진 의미를 아무리 제거하려고 해도 어느새 의미들은 달라붙어 나를 혼미하게 만들었다. 무의식하면 떠오르는 의미들과 라깡이 세미나에서 다루었던 무의식은 달랐다. 성욕도 너무나 강하게 일상적 의미와 달라붙어 있는 기표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흔들어 기의를 털어내는데 많은 애를 먹었다. 아마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로서 경험과 상상계적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무의식적 노력은 계속될지 모르겠다.

이미 저자에게는 해독된 기표지만 나에게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외계어로서 큰 사물은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것만큼이나, 기존에 내가 아는 개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새로운 지식을 도입한다는 것은 공백을 도입하는 기표를 심는 것이 아닐까.

큰 사물이라는 기표의 효과는 내게 무엇이었을까?

큰 사물과 공백, 죽음충동의 뒤섞어 혼란스러웠다. 큰 사물이 거세가 일어나기 전의 장소라면 이 장소가 실재의 장소가 될 것이다. 큰 사물의 그림자가 대상a이며, 죽음충동의 미끼라고 이해했다.

그럼 주이상스의 자리는 어디인가? 큰사물과 함께 있는 있는가? 정리되지 않은 개념들이 숲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을 들게 만든다.

추상적 개념이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도식화하게 되고, 다른 개념들과 차이를 통해 이해하려는 무의식적 노력하게 된다. 공부란 이런 것인가?

어쨌든 새로운 기표의 도입은 존재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행위이다.

 

세미나 7을 관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라깡을 공부하기 전 인문학 쇼핑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그 공부들이 고정관념을 될 정도로 뼈아프게 공부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서 시작한 공부는 삶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러 인문학 아카데미에서 여러 선생님에게 강의를 들었지만, 그 어느 것도 일시적으로 삶의 잠언으로서만 작용을 했던 것 같다.

모든 공부 한가지 공통점은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양철학이던, 서양철학이던 공통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다. 라깡도 매 순간 죽음을 욕망하면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윤리도 삼는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를 각자가 발명하는 실천을 하는 것이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나는 고정관념을 주입하지 않고 아이를 키운다면, 그는 창의적 인간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되도록 고전은 읽히지 않고, 인문학에 가까운 창작동화만 던져줬다. 그리고 세상에서 같은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되라는 주문을 걸었다.

(나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방법들이 어떤 효과를 거둘지 아직은 모르겠다.)

고정관념이 없으면 보다 자유로운 인간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언어의 도입되는 것 자체가 고정관념과 타자의 유입으로 소외된 주체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을 그땐 생각지도 못했다. 고작 창작동화 몇 권 읽힌다고 고정관념에서 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무언가를 흘려 넣을 수 없는 나이가 되어, 그저 내가 사는 삶의 모습으로서 밖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기표를 세탁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도 있을까? 세탁해야 한다는 것은 알려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후의 과정은 각자가 발명해야 한다는 그 막막함을 함께 가르쳐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앞서 얘기했듯이 저자는 세미나7새로운 인간학을 읽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인간의 유한성이 아닌 무한성에 방점을 찍는 관점을 갖게 된다면 삶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윤리적이라는 것. 이를 위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낱낱이 횡단해야 한다는 것이 공부를 하는 이유라고 나는 이해했다.

저자는 라깡이 우리에게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절차를 각자의 영역에서 재발명해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며, 몰락의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무한 반복의 시지프스적 윤리를 실천하자는 의미라고 말한다. 일종의 공백의 해석학으로서..

기의를 털고난 그물망에 남은 기표들을 가지고 나는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이 될수 있을까.

 

책장을 넘길때마다 책에 베이기를 원한다. 따갑고 더러 피를 흘릴 것이다.

내가 가진 세계의 잠언들이 벌어진 상처에서 쏟아져 나오고, 새로운 피가  돌도록 열심히 책을 먹는 것이 나의 윤리적 실천이  라깡의 인간학을 읽는 다는 것의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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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추방자들 - 개정판
히토 슈타이얼 지음, 김실비 옮김, 김지훈 감수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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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끌려서 샀는데, 5페이지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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