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에 대한 고찰 2, 나 스스로 만드는 존재 또는 개념들

싱클레어는 우연히 지나친 한 사람을 대상으로 베아트리체라는 자신의 생각속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을 만든다.
자신의 생각속에서 스스로 만든 존재이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이상적인 개념이 도입된 자신만의 우상화된 존재이다.
내가 살면서 그런 경우가 있다. 나 스스로 만들어내는 베아트리체같은 존재들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든다.
가상의 존재는 아니더라도 나스스로 부여하는 가치들이나 의미에의 해 원래의 사람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짝사랑이라는 것도 그렇다. 짝사랑은 특정한 대상에 대해서 나 스스로 부여한 의미가 너무나 많이 작용한 개념이 크다.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선입견들도 내가 만들어내고 부여한 의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타인이 부여한 의미가 전달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에서 베르테르의 짝사랑이나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의 오해와 같은 이런 경우들 말이다.
자신이 부여한 의미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그렇게 쉽지 않다. 때로는 그 과정이 절망이나 실망 때로는 삶의 극단으로 치닫기도 한다.
엘리자베스의 오해는 풀리면서 서로 좋게좋게 끝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베르테르처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기도 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나 스스로 선입견이나 편견을 없애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없애는 경우는 객관적으로 다가가려 노력하는 나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이 쉬운 일이지만...

      2006년 12월 19일 ~ 27일 읽고 2007년 1월 3일 씀

 

삶에 대한 고찰 3, 자아실현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나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시스. (123쪽)]

      2006년 12월 19일 ~ 27일 읽고 2007년 1월 3일 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에 대한 고찰 1, 우상과 멘토

예전에 내 친구를 따라다닌 것이 있었다. 스토커라는 말은 아니고..
대학교 1학년때의 친구인데(지금도 친구, 그때와의 느낌은은 다르지만) 난 그 친구의 모습을 본받을려고 했었다.
뭐 내가 특별히 부족하다거나 행동이 이상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에 대해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그친구를 따라다닌 이유는 내가 봐서는 그 친구가 행동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본받을만하고
나에게는 없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따라다녔는지 모르겠다. 특별하게 배운거는 없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그 친구를 따라하려고 노력했던 모습에서 지금의 나를 만들게한 어떤 자극제와 같은 역할은 아니었을까 한다.
예전에는 내성적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예전보다는 좀 나아진 모습이다. 그 친구를 만나면서 변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에서는 그 친구에게 특별히 무언가를 본받아야 겠다는 생각은 없다. 지금의 나의 모습이 완벽하다거나 썩 마음에 든다는 것은 아니다.
그건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본받고 나아진다는 개념보다는 나 스스로 나를 만들어간다는 개념으로 바뀐 것일 것이다.

책의 데미안도 어쩌면 그런 역할을 하는 내 친구의 모습이라고 본다.
나에게는 없는 그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그 누군가를 따라하고 본받으려 하는 싱클레어는 예전의 나의 모습을 아니었을까?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떠나면서 데미안을 우상화 생각하는 것으로 그리고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 고민하고 고찰하면서 나의 자아실현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끝에 신처럼 우상화되어서 넘아가는 부분은 마음에 안든다. 신처럼 우상화되어질 대상은 아닐라고 생각된다.
데미안이 하는 행동들은 그냥 본받고 따라하는 우상의로서의 행동이기 보다는 타인에게 조언을 하는 멘토의 역할에 더 치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싱클레어가 사랑하는 에바부인도 멘토에 가깝다.

지금에서는 예전의 그 친구는 우상이었다. 하지만 멘토의 역할이 더 강하지는 않았을까?

      2006년 12월 19일 ~ 27일 읽고 2007년 1월 3일 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갈매기의 꿈
리처드 바크 지음, 류시화 옮김 / 현문미디어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s Story)

                                        리처드 바크

 

꿈과 이상이라는 것에 대한 의지는 언제나 현실의 벽이라는 것과 맞물려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 벽이 높든 낮든 강하든 약하든 우리는 의례적으로 회피하거나 겁을 먹고 쉽게 대적하려 하지 않는다. 책 속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스스로의 꿈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며 이루려는 이상과 목표에 한 단계 한 단계 접근한다. 스스로 다음단계 다음의 일을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한다. 남들과 사회의 가치를 따르지 않는다고 현실은 그를 외면하지만 주인공은 이를 개의치 않는다. 그 자신의 의지와 꿈을 행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결국 끝에 가서는 자신의 노력과 이상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우리는 어떠한가? 그 벽을 넘으려 노력하는가? 그 벽을 깨려고 시도하는가?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지나치거나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냥 흐르듯이 그 삶에 뭍혀가기를 희망한다. 그런 것이 보통의 삶이고 제대로 된 삶이라고 여겨진다. 나 또한 그런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을 보면서 스스로 이상을 갈구하고 열망하며 이상을 위해 실천하고 노력한다. 스스로 나 자신의 주인으로 자신을 만들며 살아간다. 우체부 프레드처럼 스스로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한다. 그리고 보다 자신의 삶에 가치를 높이도록 부단히 노력하며 생활한다.

 

하지만, 난 생각해본다. 혼자서 갈구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상은 혼자만의 것으로는 그것이 이상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건 그 사상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이해되어지고 희망하는 것이 되었을 때 아니면 다른 이와는 다른 가치 상대적인 의미를 품었을 때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책 처음의 주인공이 보여준 행동들은 객기 또는 반항이다. 사회에 대한 조직에 대한 배신이다. 하지만, 중반에는 자신만이 혼자가 아니고 다른 이들도 같은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며 마지막에서 그 행동을 예전 조직에 이상으로 비치게 한다. 어떤 꿈이든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며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물론, 자기만족이라는 것도 있다. 남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게 아닌 그저 자기만을 위한 노력도 있다. 그런데 이것도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현실, 조직,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되고 상대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 아닌가?

 

이상은 이상으로 남아서는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이상을 현실로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이상을 위해 노력하고 발전적으로 행동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물이 나왔을 때 그 이상의 가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떤 이상과 목표를 위해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무슨 가치를 만들고 있는 것인가?

 

                                        2006년 7월 4 후배부친의 장례에 다녀오는 길에 읽음

                                        2006년 7월 6 학원 마치고 돌아가는 전철에서 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이라는 것이 사는동안에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가슴을 설레이게 해주고 두근거리며 보다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준다.
나에게 있어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이런 것이 사랑이라고 느낀 적도 연애를 해본 경험이 없기때문은 아닐까? 그저 마음이 설레이고 그 사람 앞에서는 잘 보이고 싶은 게 사랑일까? 하지만 그런 느낌과 설레임의 결론은 사랑이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드라마, 영화, 책에서처럼 그 사랑이 절실해여 미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버리거나 때로는 집착과 증오로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 물론 그런 것들이 조금은 급박하고 절실한 느낌을 위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인기를 위해서, 그리고 돈을 위해서.
물론 드라마, 영화의 사아황은 어느정도 필터링해서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해보고싶은 것도 욕심은 아니겠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유부녀를 좋아하고 스스로의 감정을 키우며 결국에는 자살이라는 결론을 짓는다. 책을 읽으면서 난 왠지 모르게 베르테르가 정신병자, 집착증 환자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옛 사람에 대한 나의 기억들이 베르테르를 보면서 투영되었다. 그러면 나도 베르테르처럼 정신병자는 아닐까?
베르테르의 고민과 아름다운 낱말들은 감미롭고도 달콤했다. 하지만 그런 낱말들의 주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것이라면 그게 유의미한 말들일까? 물론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일지라도 그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 스스로의 행복과 만족감을 가지는 것도 나쁘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물론 이루어지지 불가능하지 않은 사랑을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가능성이 적을 뿐이다.)
우리의 사랑은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많은 갈들을 만들어낸다. 사랑은 이상을 쫓아가지만 그 사랑의 현실의 벽에서 많은 부분을 바꾸에 만들고 때로는 실?와 절망감을 남긴다. 현실에 있어 그 상황을 극복해나간다면 좋겠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못하다.  또한 그 현실에 반응하는 것도 상당히 극박하고 빠르게 때로는 단순하게 때로는 미치거나 죽거나 하는 행봉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사랑이 현실의 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만큼 상대방이 원하는 만큼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는 그게 사랑이 아니었다고 일반화시키거나 합리화시킨다.
"사랑이 밥먹여주니?"하는 말을 듣는다. 말하는 사람은 현실이라는 벽에 순응하고 적응한 결과일 것이다. 많은 혼란이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는 것도 이것이라라고 정의하고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행동들이 올바르고 가치있는 일이었는지도 평가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 때 그 사람은 잊지 못하겠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사랑이다. 기억은 그때보다 많이 희미해지고 흐려졌지만 그렇게 표현하고 싶은 것이 사랑이다.

붙임글.
자신 사랑의 결론으로 자살이라는 것을 선택한 베르테르는 내가 보기에는 바보짓을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자기자신이 키운 감정에 자신이 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스스로 책임을 지지못하고 회비하는 것은 패배자이고 실패자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제대로 통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랑도 나 스스로 통제하고 책음을 져야한다.
그런데, 나 스스로 키운 감정들로 인해 더 이상 책임지기 싫어 새로운 사랑을 찾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더 무책임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스스로 자책하며 자책한다.

   2006년 6월 5일 출근 전철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괴짜경제학 - 상식과 통념을 깨는 천재 경제학자의 세상 읽기
스티븐 레빗 외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가지고 경제학적으로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모한 도전일지 모른다. 범죄율에 관한 분석이나 서로의 유지관계를 위해서 이루어지는 묵시적인 약속에 대한 분석들도 흥미롭다. 일반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별로 연관성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들을 사건에 대한 이유이고 원인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점은 사회 현상에 대한 폭넓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가 보다는 연관성이 없을 듯한 생각 - 일반사람들과는 다른 시각 - 으로 문제를 풀이한다는 점이 생각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또한 살아가면서 이해에 의해 타협하거나 서로에게 윈윈(?)하기 위한 묵시적인 계약관계도 보여준다.

이책은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사회학이라는 면이 강하다고 본다. 글쓴이가 제시하고 보여주고 있는 인과관계는 특별하게 경제학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경제의 원리도 물론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는 사람의 성향과 심리, 특성들도 많이 작용한다. (그렇다고 구지 따진다면 경제학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도 없겠지만)

작가의 특이한 시각이 이 책에서의 중요한 흥미 요소이다. 어떤 단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새롭다", "특이하군"하는 느낌이 든다. 남들이 다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는 작가는 재미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도 가지게 된다. 사는 삶이 바로 시트콤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작가는 아닐까?

현상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은 [에밀뒤르켐]의 [자살론]이라는 책에서 잘 드러난다. 자살론은 이 책에서와 아주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자살론]은 자살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또한 다양하고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통계를 내고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특이한 인과관계에 재미를 가지고 싶다면 [자살론]도 추천하고 싶다.

붙임글.
개인적으로 [자살론]이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어떤 내용일지 하는 궁금증이 많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읽는 것을 보면서 "너 요즘에 고민있니?"라고 말하는 것들도 보았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자살론]이라는 책이 흥미로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