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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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일은 책머리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은 중도라는 것에 맞추어간다. 우리의 판단은 항상 중도의 입장에서 선택되어진다.
그런데 그 중도라는 것은 자신이 아는 지식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지식(?)이 1~100까지 라면 중도는 50이나
자신이 아는 지식이 10~20 사이의 지식만 가진다면 15밖에는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실제 중도는 50이어야 하는데 자신이 아는 지식은 편중되거나 적어서 50과는 상대적으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자신은 공부를 한다고 한다.
 
나는 이말에서 정말로 내가 아는 지식이 얼마나 되는 것인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진정한 중도의 길인지?
나의 생각이나 판단들은 편협되거나 편중되어지지는 않았는지?
 
이 책은 책의 내용보다는  계속 공부를 해야해야 하고 생각해야한다 점을 일깨워준다.
 
TV의 토론회를 보면 특히나 정치적 이슈에 관련된 토론을 보면 각자 이야기하는 것이
각자의 지식내에서 판단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입장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토론이라는 것은 서로 상충된 의견에서 보다 나은 어떤 하나의 의견을 도출해내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서로의 입장에 대해서 알려고 하고 배우고 자신의 지식을 서로 공유해야 한다.
대부분의 정치적 이슈와 관련된 내용에서는 그런 과정들이 많이 결여된다.
그리고 도출되는 의견이 없이 서로의 입장만을 확인한 체  끝나고 만다.
(결론이 없이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 토론이기는 하지만, 회의가 아니니까?) 

결론이 없이 끝나는 점에 대해서 특별한 불만은 없다.
그런 토론에서의 내 불만은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서 수용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아는 지식이 얼마나  되길래 그런게 고집스러운 것인지?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한다.
아는 것이 힘이고 그 힘이 나의 가치를 올려준다는 것이다.
책에서 말하는 사회학은 아니더라도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한 지식들 말이다.
그리고 그 지식에 대해서 생각 하고 고찰하는 과정을 통해 내 것으로 습득되어야 한다.
 
                2007년 02월 12일 ~ 03월 02일 읽음
                2007년 03월 21일 리뷰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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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의 또 다른 리뷰
전형적인 좌파 지식인의 책이다.
그의 사상은 좀체 내가 받아들일수 있는게 아니다
더구나, 이사람은 좌파아닌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 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리뷰에 대한 나의 코멘트
저자가 말하고 있는 시각은 어떤 사건이나 문제에 대한 특정한 시각 자체가 편협된 생각이지는 않을까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비판에 대한 해결과정은 공부라고 이야기합니다. 저자 자체가 좌파적 성향이라서 쓴 글이기보다는 사건에 대해서 공부를 통해서 중도적인 시각으로 보려고 했다는 점이지요.물론 장정일의 생각이나 시각이 반영된 그 글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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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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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책은 삶에 대한 고찰이나 나에 대해서 생각하게 보다는
좋은 부모의 모습으로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다.
물론 현재의 입시위주의 교육에 대한 교육정책이라든지 학부모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현재의 우리의 아이들은 어떤 모습인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진지하게는 아니어도 현재 나의 모습에 대해서 성찰하거나 반성하고 생각을 삶에 반영하고 있는가? 부모의 힘에 의해 혹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지금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저런 많은 생각에 휩싸인다. 물론 자신의 삶을 뒤돌아
나에 대해서 고찰하거나 반성할 기회가 없었다.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그런 생각을 겨를,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배부른 소리고 일단은 공부와 같은 일들을 잘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예전의 나의 모습에 대해서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쉬워도 그렇게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건 이제는 삶을 뒤돌아본다고 하여도
되돌릴 없다는 것이요, 과거의 삶은 미래를 위한 삶을 위해서 참고 되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속의 한스 기벤라트는 아버지에 의해 교장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
자신의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한스의 삶을 이미 정해진 길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
현재의 우리 부모들 그리고 선생님들 외의 다른 사람들.. 사람들은 우리의 아이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자신을 위해서 아이들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수도원에 들어간 한스의 삶은 어쩌면 당연히 해야 하는 생각일 있다.
다만 생각이 너무나도 깊었기에 마음에 병이 생긴 것을 아닌지 한다.
나는 아이들이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은 나에 대한 모습에 대해 돌아보기를 원한다. 

대학에 들어가 자유라는 이름의 방종은
우리의 현재의 우리아이들의 삶에 대해서 뒤돌아봐야 사항으로 본다..
아이들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물음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물론, 대학에서 취업이 안되 공부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가 아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있는 여유를 가질 없다는 .. 그것은 참으로 아타깝다.)

책에서 끝의 결말이 약간 애매하게 나온다.
한스가 자살 것인지아니면 그냥 술에 취해서 사고사로 일어난 일인지 불문명하다.
다른 사람들은 한스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한스가 자살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아직은 그에게 희망은 있을 것으로 본다. 적어도 목사가 되는 수도원 생활은 아니더라도
기계공으로서의 새로운 삶에 아직까지 미적응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부모가 되거나 그런 비슷한 입장이 된다면 나는 아이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것인가?
이미 정해진 순서나 방법으로 아이들을 이끌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
아니면 아이들이 원하는 삶의 위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하는가? (그렇다.)
질문에 대해서 어떤 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 아이가 원하는 그리고 바라는 것에 대해서
무작정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2006 12 27 ~ 2007 1 6 읽음
                         2007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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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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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고찰 2, 나 스스로 만드는 존재 또는 개념들

싱클레어는 우연히 지나친 한 사람을 대상으로 베아트리체라는 자신의 생각속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을 만든다.
자신의 생각속에서 스스로 만든 존재이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이상적인 개념이 도입된 자신만의 우상화된 존재이다.
내가 살면서 그런 경우가 있다. 나 스스로 만들어내는 베아트리체같은 존재들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든다.
가상의 존재는 아니더라도 나스스로 부여하는 가치들이나 의미에의 해 원래의 사람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짝사랑이라는 것도 그렇다. 짝사랑은 특정한 대상에 대해서 나 스스로 부여한 의미가 너무나 많이 작용한 개념이 크다.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선입견들도 내가 만들어내고 부여한 의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타인이 부여한 의미가 전달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에서 베르테르의 짝사랑이나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의 오해와 같은 이런 경우들 말이다.
자신이 부여한 의미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그렇게 쉽지 않다. 때로는 그 과정이 절망이나 실망 때로는 삶의 극단으로 치닫기도 한다.
엘리자베스의 오해는 풀리면서 서로 좋게좋게 끝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베르테르처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기도 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나 스스로 선입견이나 편견을 없애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없애는 경우는 객관적으로 다가가려 노력하는 나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이 쉬운 일이지만...

      2006년 12월 19일 ~ 27일 읽고 2007년 1월 3일 씀

 

삶에 대한 고찰 3, 자아실현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나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시스. (123쪽)]

      2006년 12월 19일 ~ 27일 읽고 2007년 1월 3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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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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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고찰 1, 우상과 멘토

예전에 내 친구를 따라다닌 것이 있었다. 스토커라는 말은 아니고..
대학교 1학년때의 친구인데(지금도 친구, 그때와의 느낌은은 다르지만) 난 그 친구의 모습을 본받을려고 했었다.
뭐 내가 특별히 부족하다거나 행동이 이상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에 대해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그친구를 따라다닌 이유는 내가 봐서는 그 친구가 행동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본받을만하고
나에게는 없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따라다녔는지 모르겠다. 특별하게 배운거는 없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그 친구를 따라하려고 노력했던 모습에서 지금의 나를 만들게한 어떤 자극제와 같은 역할은 아니었을까 한다.
예전에는 내성적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예전보다는 좀 나아진 모습이다. 그 친구를 만나면서 변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에서는 그 친구에게 특별히 무언가를 본받아야 겠다는 생각은 없다. 지금의 나의 모습이 완벽하다거나 썩 마음에 든다는 것은 아니다.
그건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본받고 나아진다는 개념보다는 나 스스로 나를 만들어간다는 개념으로 바뀐 것일 것이다.

책의 데미안도 어쩌면 그런 역할을 하는 내 친구의 모습이라고 본다.
나에게는 없는 그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그 누군가를 따라하고 본받으려 하는 싱클레어는 예전의 나의 모습을 아니었을까?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떠나면서 데미안을 우상화 생각하는 것으로 그리고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 고민하고 고찰하면서 나의 자아실현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끝에 신처럼 우상화되어서 넘아가는 부분은 마음에 안든다. 신처럼 우상화되어질 대상은 아닐라고 생각된다.
데미안이 하는 행동들은 그냥 본받고 따라하는 우상의로서의 행동이기 보다는 타인에게 조언을 하는 멘토의 역할에 더 치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싱클레어가 사랑하는 에바부인도 멘토에 가깝다.

지금에서는 예전의 그 친구는 우상이었다. 하지만 멘토의 역할이 더 강하지는 않았을까?

      2006년 12월 19일 ~ 27일 읽고 2007년 1월 3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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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꿈
리처드 바크 지음, 류시화 옮김 / 현문미디어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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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s Story)

                                        리처드 바크

 

꿈과 이상이라는 것에 대한 의지는 언제나 현실의 벽이라는 것과 맞물려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 벽이 높든 낮든 강하든 약하든 우리는 의례적으로 회피하거나 겁을 먹고 쉽게 대적하려 하지 않는다. 책 속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스스로의 꿈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며 이루려는 이상과 목표에 한 단계 한 단계 접근한다. 스스로 다음단계 다음의 일을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한다. 남들과 사회의 가치를 따르지 않는다고 현실은 그를 외면하지만 주인공은 이를 개의치 않는다. 그 자신의 의지와 꿈을 행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결국 끝에 가서는 자신의 노력과 이상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우리는 어떠한가? 그 벽을 넘으려 노력하는가? 그 벽을 깨려고 시도하는가?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지나치거나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냥 흐르듯이 그 삶에 뭍혀가기를 희망한다. 그런 것이 보통의 삶이고 제대로 된 삶이라고 여겨진다. 나 또한 그런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을 보면서 스스로 이상을 갈구하고 열망하며 이상을 위해 실천하고 노력한다. 스스로 나 자신의 주인으로 자신을 만들며 살아간다. 우체부 프레드처럼 스스로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한다. 그리고 보다 자신의 삶에 가치를 높이도록 부단히 노력하며 생활한다.

 

하지만, 난 생각해본다. 혼자서 갈구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상은 혼자만의 것으로는 그것이 이상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건 그 사상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이해되어지고 희망하는 것이 되었을 때 아니면 다른 이와는 다른 가치 상대적인 의미를 품었을 때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책 처음의 주인공이 보여준 행동들은 객기 또는 반항이다. 사회에 대한 조직에 대한 배신이다. 하지만, 중반에는 자신만이 혼자가 아니고 다른 이들도 같은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며 마지막에서 그 행동을 예전 조직에 이상으로 비치게 한다. 어떤 꿈이든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며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물론, 자기만족이라는 것도 있다. 남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게 아닌 그저 자기만을 위한 노력도 있다. 그런데 이것도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현실, 조직,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되고 상대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 아닌가?

 

이상은 이상으로 남아서는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이상을 현실로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이상을 위해 노력하고 발전적으로 행동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물이 나왔을 때 그 이상의 가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떤 이상과 목표를 위해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무슨 가치를 만들고 있는 것인가?

 

                                        2006년 7월 4 후배부친의 장례에 다녀오는 길에 읽음

                                        2006년 7월 6 학원 마치고 돌아가는 전철에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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