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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이었을까? 어릴 적 《어린 왕자》는 결코 쉬운 책이 아니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이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알쏭달쏭한​ 말들 때문에 꽤 따분하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번만 읽은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뒤 중고등학교 시절 다시 읽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남아있는 기억이라고는 끝까지 읽기 지겹다는 것 정도. 물론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 이를테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나 길들여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여우 이야기는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나 어린 왕자가 다른 별에서 만난 여러 사람에 얽힌 이야기는 도통 재미없었다.

 

토요서당에서 이 책을 읽기로 정한 것은 매우 우연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여섯 살배기 아들은 팟캐스트에서 책을 읽어주는 채널을 좋아한다. 아빠가 잠자기 전 동화책을 읽어주는 이 팟캐스트는 한동안 아들의 잠자리 친구였다. 그 덕분에 아빠는 책을 못 읽어주는 아빠라는 낙인을 얻고 말았지만. 아들의 취향 덕분에 나도 모르던 이야기를 제법 많이 알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폭풍우 치는 밤에》였다. 과연 직접 읽었을 때도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읽기가 가지는 어떤 힘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들을 따라 팟케스트를 듣다 보니 그 중엔 어린 왕자도 있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내가 그렇게 재미없어한 부분을 읽어주고 있더라. 그걸 아들은 재미있게 듣고. 열중해서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가며 흘려 들었지만 제법 재미있더라. 여섯 살 아이도 재미있어 하는 이야기이니 함께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결국 토요서당에서 이 책을 두 달간 읽었다. 사실 두 달이란 시간도 좀 부족하긴 했다. 매주 약 30분 정도 돌아가며 소리 내 읽는데 약 2/3 정도 읽었을까? 그래도 소리 내 읽으며 만나는 이야기는 제법 다른 경험을 심어주었다.

 

저마다 다르게 읽었겠지만 이번에 읽으면서 어린 왕자가 얼마나 약하고 섬세한 인물인지를 알 수 있었다. 솔직함을 더하면 못나 보이는 구석도 있더라.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는 저자의 상투적인 접근이 별로기도 했고. 그러나 멈추게 되는 그 부분,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는 잠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소중함'이라는 자체를 생각하기 힘든 날들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그 말이 가진 조그만 떨림은 여전히 소중하다.

 

오늘 두 달간의 여정을 마치고 《어린 왕자》를 끝냈다. 책을 덮으며 각자 감상과 인상 깊은 구절을 나누었다. 결말의 강렬함 때문일까? 많은 친구가 책을 읽으며 슬펐다고 했다. 그가 떠났기에. 저마다 뽑아 읽은 구절은 제 각기였다. 그중엔 어린 왕자가 여행 중에 만난 왕의 이야기를 내놓은 친구도 있었다. 이유는? 정말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아마도 그 친구는 그 부분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는가 보다. 수업을 마치고 어떤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초등학생이 《어린 왕자》를 이해할까요?" 저마다 제 깜냥대로 읽었을 거라 대답했다. 나는 정말 그리 생각한다. 저마다 생각한, 느낀 부분이 있었을 테다. 설사 그게 보잘것없을지라도 언젠가 저들이 자라 《어린 왕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땐 또 다르게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엔 충분하지 않을까? 결코 나쁘지 않은.   

 

하나 덧붙이면 최근 서점을 돌아다녀보니 황현산의 번역이 다시 출간되었더라. 둘 모두 읽어볼 기회가 없었기에 어느 것이 낫다고는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비교해보며 읽어볼만하다 생각하기에 이 책도 아래에 소개해 둔다. 개인적 취향이지만 표지는 홀로 우주를 응시하는 문학동네 판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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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온지곤지를 열면서 얻은 소득 가운데 하나는 아침을 일찍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말 문득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 마음이 맞는 몇이 있어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아침 9시에 모여 소리 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왜 하필 루쉰이었을까?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럭저럭 한그럭저럭한 책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투창 같은 문장. 루쉰의 <들풀>을 집어 들었다.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졸린 눈을 비비고 하품을 참으며 읽기엔 많이 거치니까. 

 

온지곤지는 길 쪽으로 창이 크게 나 있다. 아침이면 햇볕이 잔뜩 들어온다. 햇볕을 맞으며 읽는 건 정말 좋은 경험이다. 30분 남짓 차를 마시며 부지런히 읽기만 하는 탓에 얼마나 깊이 있게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별 자신이 없다. 나쁘게 말하면 그저 줄곧 읽기만 했으니. 그렇지만 내 목소리로, 누군가의 입으로 루쉰의 문장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경험임이 틀림없다. 오늘은 《외침》을 마치는 날이었다. 문득 처음에는 읽는 게 영 어색하던 친구가 지금은 꽤 들어줄 만한 소리로 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도 적지 않은 소득이다.  

 

《들풀》을 이어 《외침》을 읽었다. 《들풀》은 산문시를, 《외침》은 초기 소설을 엮었다. 개인적으로는 《들풀》을 더 좋아하나 불친절한 책인 탓에 원성의 눈길이 있었다. 《외침》은 그래도 유명하니 좀 낫겠지. 〈아Q정전〉이니 〈광인일기〉니 하는 작품이 있지 않나. 필독도서라는 명목으로 예전부터 제목을 들었기에 궁금했지만 대체 왜 그리 유명한지 잘 모르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도 저 두 작품이 그렇게 좋은지는 모르겠다. 도리어 〈약〉이나 〈선물〉, 〈쿵이지〉, 〈흰빛〉과 같은 작품이 더 좋다.  

 

루쉰을 본격적으로 만난 건 두 해 전이었는데, 언제 다시 읽을지 모르겠다. 언제 보아도 몇 번은 볼 책이니 책장에 한동안 잘 모셔 두어야겠다. 아침마다 루쉰을 함께 읽은 두 친구는,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도 책을 사지 않았다. 책값이 아까워서라기보다는 루쉰의 글에 그리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경험에 비춰보면 책은 좋아서 사는 것보다는 사서 읽어보니 좋은 경우가 많던데…. 잔소리할 생각일랑 접어두자. 다음에 만나면 또 다르게 만날 테니. 여튼 오랜만에 만난 우아한시크한 루쉰 씨는 여전히 좋았다. 

 

11월부터는 아침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는다. 상큼한 아침에 읽기엔 좀 어울리지 않는 책이지만 그래도 읽어보도록 하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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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소설을 읽으며 한국 현대사를 조망하는 수업이 있었다.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소설로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을 읽었다. 소설과는 별로 가깝지 않았던 나에게 그의 글은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소박한 문장 속에 숨겨 있는 번뜩이는 날카로움! 한 학기 수업을 통해 열 권이 넘는 소설을 읽었지만 나는 《엄마의 말뚝》을 으뜸으로 쳤다. 그때엔 그의 소설을 찾아 읽어보겠다는 열망에 불탔지만 정작 그런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계기가 없었다고 보는 게 옳겠다. 하긴 스스로 소설을 찾아 읽는 타입은 아니니. 글을 쓰면서 문득 어느 헌책방에서 《나목》을 샀지만 펼쳐보지도 않았다는 부끄런 사실이 기억났다. 그 뒤로 우연히 《아주 오래된 농담》을 읽어봤고...


배운대로 가르친다는 말은 옳다. 약 10년 뒤 비슷한 수업을 기획해서 청소년들과 함께 공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년 만에 만난 《엄마의 말뚝》은 여전히 좋았다. 그의 문체와 따뜻한 시선. 잔혹하기까지 한 그의 집요함까지. 뭇 책이란 스스로 집어 들어 읽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만난 책이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아직도 좋은 책을 가려낼 줄 모르는 어리석음 때문이리라. 대학 시절 박완서라는 작가를 소개해준 선생에게 감사해야 하는 이유다.


올 가을부터 일요일 아침에 청소년들과 소설을 읽고 있다. 9-10월에는 톨스토이 단편선을 읽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강좌가 제법 흥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그 다음 책으로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두 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꼽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대충 책의 내용을 알고 있을 뿐 다 읽어보지도 못했다,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이 저렇게 게을러도 되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경험상 이미 정돈되고 완결된 지식을 나누는 것보다는 함께 배워가는 것이 좋은 공부가 되었다. 적어도 이 책을 함께 읽는 것이 좋다는 확신이 있기에 이 책을 읽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벌써 살짝 기대된다. 물론 척박한 그 시절, 박완서의 유년시절을 경험하는 것은 유쾌하지만은 않은 경험이 되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의 미학이 그저 아름다운 시절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이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러나 그의 따뜻한 시선과 소박한 문장들은 적지 않은 선물이 되어 주리라. 


첫 문장을 읽어보았다. 누군가 첫 문장을 읽고 책을 산다고 했다. 파르르 떨리는 문장. 그의 글을 읽을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늘 코를 흘리고 다녔다. 콧물이 아니라 누렇고 차진 코여서 훌쩍 거려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나만 아니라 그때 아이들은 다들 그랬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싸잡아서 코흘리개라고 부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더 먹었을까》, 세계사. 13쪽.

덧: 책방 온지곤지에서는 11-12월 동안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더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습니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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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 배우기 - 아름다운 우리 전통, 개정판 Hot Craft 3
손경숙 지음 / 미진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 전통 자수 기법 24가지를 소개하고 응용작품도 초급부터 고급까지 소개하고 있다. 책만보고 따라 하기는 어렵고 자수의 기초를 오프라인에서 조금 배운 후에 천천히 해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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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을 준비하려니 기본적인 자금이 필요한데 딱히 돈 나올 구멍은 없고 해서, 헌책이라도 팔아보겠다고 덤볐다. 마을 장터에서 책을 팔기로 하고 선물로 책을 모았다. 무턱대고 덤빈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성과가 좋았다. 마을 장터를 마치고 추석에 고향 집에 내려갔는데 문득 책장에 꽂혀있는 옛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놈을 팔아야지 하는 생각에, 어머니에게 택배로 부쳐달라 부탁했다. 택배를 받아보니 10년도 넘은 옛 책들이 담겨 있더라. 그래도 책들이 하나씩 기억나는 것을 보면 허투루 읽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책 속표지에 책을 산 날짜를 적어놓았다. 아마도 제 물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그랬으리라. 옛 책을 뒤져보니 96년, 지금부터 20년 전 메모도 있었다. 메모를 보니 위의 두 책은 2001년 대학시절 보았던 책이다. 대학 때부터인가는 책 속에 읽은 날짜를 표기해 두는 버릇을 들였다. 흔적을 보니 《인간 하나님의 형상》은 꽤 사랑하는 책이었는지 2번을 보았다. 2001년 3월 28일에서 2001년 4월 20일까지 읽었고, 바로 일주일 뒤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기를 마친 날짜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마틴 루터 킹 자서전》은 겨울 방학에 읽었다. 2001년 12월 31일에서 2002년 2월 7일까지. 2002년 2월에는 중국으로 1년간 유학을 떠났으니, 당시 한국에서 읽은 마지막 책이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나는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대학'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전공 수업 겸, 신앙 훈련 겸 이 두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구체적으로 책 내용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 두 책은 각각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인간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긍정과 희망을, 《마틴 루터 킹 자서전》은 진실과 영혼을 사랑하는 한 성직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도와주었다. 지금이야 '가나안 성도'를 자처하는 상황이나, 그렇다고 이 두 책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두 책을 헌책으로 팔려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시간이 많으면 다시 이 책을 읽을까? 종교적인 문제를 접어두더라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람에게 인연이 있듯 책에도 인연이 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이 책과의 인연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아니, 이미 인연은 한참 전에 정리된 것인지도. 이렇게 글을 쓰는 건 다시 내 손에 들어온 이 책들과의 인연을 정리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누군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그 당시 느꼈던 감동을 똑같이 받을 거라 약속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소중한 책이 되지 않을까? 혹시... 


+ 10월 31일 마을 장터에서 헌책으로 팝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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