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을 준비하려니 기본적인 자금이 필요한데 딱히 돈 나올 구멍은 없고 해서, 헌책이라도 팔아보겠다고 덤볐다. 마을 장터에서 책을 팔기로 하고 선물로 책을 모았다. 무턱대고 덤빈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성과가 좋았다. 마을 장터를 마치고 추석에 고향 집에 내려갔는데 문득 책장에 꽂혀있는 옛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놈을 팔아야지 하는 생각에, 어머니에게 택배로 부쳐달라 부탁했다. 택배를 받아보니 10년도 넘은 옛 책들이 담겨 있더라. 그래도 책들이 하나씩 기억나는 것을 보면 허투루 읽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책 속표지에 책을 산 날짜를 적어놓았다. 아마도 제 물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그랬으리라. 옛 책을 뒤져보니 96년, 지금부터 20년 전 메모도 있었다. 메모를 보니 위의 두 책은 2001년 대학시절 보았던 책이다. 대학 때부터인가는 책 속에 읽은 날짜를 표기해 두는 버릇을 들였다. 흔적을 보니 《인간 하나님의 형상》은 꽤 사랑하는 책이었는지 2번을 보았다. 2001년 3월 28일에서 2001년 4월 20일까지 읽었고, 바로 일주일 뒤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기를 마친 날짜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마틴 루터 킹 자서전》은 겨울 방학에 읽었다. 2001년 12월 31일에서 2002년 2월 7일까지. 2002년 2월에는 중국으로 1년간 유학을 떠났으니, 당시 한국에서 읽은 마지막 책이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나는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대학'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전공 수업 겸, 신앙 훈련 겸 이 두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구체적으로 책 내용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 두 책은 각각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인간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긍정과 희망을, 《마틴 루터 킹 자서전》은 진실과 영혼을 사랑하는 한 성직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도와주었다. 지금이야 '가나안 성도'를 자처하는 상황이나, 그렇다고 이 두 책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두 책을 헌책으로 팔려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시간이 많으면 다시 이 책을 읽을까? 종교적인 문제를 접어두더라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람에게 인연이 있듯 책에도 인연이 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이 책과의 인연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아니, 이미 인연은 한참 전에 정리된 것인지도. 이렇게 글을 쓰는 건 다시 내 손에 들어온 이 책들과의 인연을 정리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누군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그 당시 느꼈던 감동을 똑같이 받을 거라 약속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소중한 책이 되지 않을까? 혹시...
+ 10월 31일 마을 장터에서 헌책으로 팝니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