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펜은 칼보다 무섭다'를 실천한 그의 삶


  "그는 맹수나 작은 벌레들이 그들이 사는 환경의 어떤 일도 너무나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처럼 역사 변전이나 그 향방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인식의 역량뿐 아니라 그가 받아온 오랜 수난의 역정 가운데서 터득한 통찰 때문이기도 하다."

_ 리영희를 평가하는 고은 시인의 말


  리영희 교수를 흔히 '사상의 은사', '불멸의 기자'로 부른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한 순간도 비판의 목소리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영희 교수는 '사회주의 지향의 지식인'이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의 전형'일 뿐이다. 그가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힌 오늘날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제도나 체제보다 인간적 가치를 존중해온 한 지식청년이 반체제 지식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그가 활동했던 1960년대 이후 군부독재체제가 자리한다. 군부독재시대에는 이성보다는 폭력, 논리보다는 우격다짐이 판을 치고 우상이 날뛰었다. 그런 사회에서 참 지식인이라면 진실을 말하고 폭력과 싸우며 우상의 실체를 벗기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당연한 책무다. 

_ 본문 36쪽.


    "이제 다시 누가 있어 선생님의 '이성'을 이을 것인지 참으로 막막할 따름입니다."라며 책은 마무리된다. 김상웅 前 독립기념관장이 쓴 <리영희 평전>. 리영희 교수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비롯해 오랫동안 그를 지켜봐온 저자이지만, 책의 말미에 그의 후회를 고백한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자신이 벅찬 일에 손대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처음에 그 능력의 정도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서 지켜본 그 답게 리영희의 진면목과 일대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면장을 지냈고, 아버지는 공무원, 어머니는 부잣집 딸인 환경에서 리영희 교수는 태어났다. 1929년 평북 삭주에서. 그의 삶은 언론사와 대학에서 해직되고 사회에서 밀려난 삶이었다. 박정희 정권 두 번, 노태우 정권 한 번, 전두환 정권 한 번, 총 4 번의 수감생활도 했다. 주변인, 변방인, 아웃사이더라는 것이 그의 삶을 나타내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1950년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한 리영희 교수는 안동공립중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한 지 석 달 만에 한국전쟁이 터져 통역장교로 자원입대한다. 통역장교의 7년 생활 동안 군부대와 사회의 비리, 모순을 목격한다. 훗날 7년의 군생활에서 보상받은 것은 영어실력뿐이라는 주위의 말에 '그것'밖에 얻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영어교사와 통역장교를 거치며 영어와 일어, 불어를 능히 소화했던 리영희 교수는 소령으로 제대하여 1957년 합동통신 입사시험에 합격해 외신부 기자가 된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문제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그는 한국말보다 일어에 능했고, 글쓰기에 대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자신의 글쓰기에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리영희 교수는 자신의 힘으로 극복해나간다.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이 한창일 때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초년병 기자 시절, 다시 국어 교과서를 펼치며 맞춤법을 비롯한 글쓰기 공부를 해나가며 기자의 역량을 쌓아간다. 


    "온갖 우상과 요설이 득세하여 상식과 지성을 마비시킬 때 그의 글은 몽롱한 의식을 깨우는 맑고 차가운 '마중물'이 되었다. 그로부터 십 수 년이 지난 오늘날 또 새로운 우상과 요설이 득세하여 그 마중물이 다시 필요하게 되었으니 시대의 불행이다."

_ 본문 29쪽.


  기자 생활을 하면서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외신에 정권의 포악성을 고발하는 평론기사를 기고,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 취재 당시 미국의 정권 이양 요구를 기고, 군사원조 동결, 식량원조가 미루어지는 이유 등에 관한 특종기사를 연이어 터트리며 정권에 있어선 물흐리는 '미꾸라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1971년 언론사에서 해직되고 한양대 조교수로 임용될 무렵부터 지식인이자 논객으로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사회를 향한 발언을 하기 시작한다. 1974년에는 그동안 발표한 논문을 묶어 <전환시대의 논리>를 출간하기도 했다.

  2006년 "정신적, 육체적 기능이 저하되어 지적활동을 마감하려니 많은 생각이 든다"며 절필 선언을 할 때까지 그의 삶은 살아 있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비판과 진실 추구로 점철된 삶이었다. 

  <리영희 평전>을 집필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채호, 김구, 안중근, 장준하, 조봉암, 한용운, 김대중 등 숱한 평전을 썼다. 평전은 시비(是非)를 치우침 없이 다루는 것이다. 리영희에게 비(非)가 있다면 아들, 남편, 아버지로서 가족에게 소홀했다는 것이다."

  해가 뜰지 모르는 시대에 지식인의 역할을 다하고자 가족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던 리영희 교수는 1989년 회갑때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족들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가족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 가지 정의감 같은 것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약자에 대한 강자의 비인간적인 행위, 휴머니즘을 말살하는 폭력, 사병에 대한 장교의 횡포, 민간인에 대한 군대 및 군인의 거드럭거림 등에 대해서 언제나 반대하고 항의했다. …휴머니즘에는 인종이나 민족, 국가의 차별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_ 본문 97 쪽.

  자본만능주의가 되어버린 오늘날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쉽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기자라는 직업정신이 투철했던 사람. 시대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의 통찰 역시 그립다. 저자의 말처럼 리영희 교수의 정신을 이어가는 후배들이 많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유는 인간존재의 전부이며 그 본질이다. 본질을 부정당했거나 박탈당한 상태는 자유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가 아니다. '자유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

_ 본문 15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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