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소년
정도상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힘내라! 만돌아

  생각해보면 천사마을 사람들은 재개발조합이나 용역, 그리고 경찰과 싸운게 아니었다. 함께 마을을 이루었던 인간관계와 싸우고, 밀려오는 두려움과 싸우고, 보잘것없는 전재산과, 생의 밑바닥과 외로움과 싸웠다. 온갖 애증과 무너지려는 꿈과 격투했고 끝내 패배했다. 하지만 그 격투를 통해 그들은 존엄성을 지켜냈다. 존엄성이 전제된 패배는 패배가 아니다. 세상이 패배의 끝없는 반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패배를 통해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패배 속에서 소년은 자란다.

_ '작가의 말' 中에서


  분명 2012년 말까지만 해도 사회에 대한 피로감이 극에 달하면서 문인들이 작품 안과 밖에서 정치적 목소리를 높인 한 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용산 철거민 참사를 표제로 삼은 이시영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연대와 사랑으로 묶인 인간의 공동체에서 혁명의 근거를 찾고자 한 김선우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는 물론, 진은영 시집 <훔쳐가는 노래>와 신용목 시집 <아무 날의 도시>도 특유의 비의적이며 상징적인 어조로 정치적 상상력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었다.

  소설 역시 현실의 질곡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했다.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을 떠올리게 하는 노동자 투쟁을 배경으로 삶은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사대강 사업에 대한 환멸과 저항 의지로 마무리되는 성석제의 <위풍당당>, 그리고 장편은 아니지만 역시 무분별한 재개발 사업과 크레인 농성을 포함시킨 김애란 소설집 <비행운> 등은 당대인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작가들의 공감 능력을 보여주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삶을 그린 방현석의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1970·80년대 학생운동권 내부의 순수와 치부를 들춰낸 권여선의 <레가토>, 90년대 학생운동의 풍경을 포착한 손홍규 소설집 <톰은 톰과 잤다>, 그리고 파주로 짐작되는 접경 도시를 배경으로 이명박 정부 들어 경색된 남북관계의 그늘을 잔잔하게 묘사한 전경린의 <최소한의 사랑>등 시·공간의 이동을 통해 현실 문제의 뿌리를 찾고자 시도했다.

  이번에 읽은 <은행나무 소년>도 이와 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 용산참사를 연상시키는 철거민 투쟁과 소년의 성장담을 포개 놓은 정도상의 <은행나무 소년>. 


  "다 죽여!"

  외마디 명령과 함께 철거용역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왔다. 그들은 땅바닥에 누워 있는 여자들과 노인들을 군화로 마구 짓밟았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하이에나였다. 서로의 몸을 엮고 있는 여자들을 떼어내려고 무섭게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쇠파이프를 맞은 사람들의 비명과 철거용역들의 함성이 뒤섞여 망루 앞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_ <은행나무 소년> 174쪽.

  

  치매걸린 할머니와 사는 고아 소년. 어머니의 유해를 지키기 위해 철거 용역과 맞서고 존재의 근거를 뒤흔드는 상실을 경험한다. 하지만 짝사랑하는 선생님과 자기를 생각해주는 지혜를 만나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 바로 <은행나무 소년>의 이야기다.

  <은행나무 소년>은 철거 예정지에 사는 고아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본명인 '김우룡'보다는 별명인 '만돌이'로 더 자주 불리는 소년. 부모님과 여동생을 교통사고로 잃고 포치동 천사마을에서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간다. 그러나 재봉질로 생계를 유지하던 할머니 '희자씨'에게 하늘도 무심하게 '치매'라는 병을 선물로 안겨주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마을은 재개발을 위한 철거 바람에 휩싸여 뒤숭숭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에 더해 재개발을 담당하는 건설업자 큰아버지와 복음교회 목사인 외삼촌은 만돌이 몫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암투를 벌인다. 소설의 분위기는 칠흙같은 어둠으로 휩싸인다.

  사실, 고아 소년의 성장담이나 재개발과 철거를 둘러싼 갈등은 새로운 소재라고 할 수 없다. '새롭다'라는 느낌보다는 일종의 '형식'을 떠올리게 될 정도로 익숙하게 반복되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과거에도 이런 일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작가 정도상은 주인공 소년을 화자로 삼고 짐짓 씩씩하며 발랄한 어조를 채택함으로써 진부하다는 느낌을 지우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내린 마을의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만들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꿈이라고 생각해. 우리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는 피지만, 영혼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꿈이야. 그러니까 꿈이 없는 사람은 영혼에 에너지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도 꿈이 있으면 얼마든지 헤쳐나갈 수 있어. 영혼의 명령으로 말이야. 선생님의 어릴 적 꿈은 예쁜 공주였어."

_ <은행나무 소년> 84쪽.


  사실 만돌이는 툭하면 학교를 빼먹고 동네의 노는 중학생 형들과 어울리기도 하는 말썽꾸러기의 표본인 소년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쁘게 망가진 아이는 아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지혜를 괴롭히는 학교 운영위원장 아들 수만의 머리를 식판으로 내려친 것은 불량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만돌이 나름의 정의감의 표현이다. 평소 존경해 오던 '갑빠' 박정철에게 불량스러운 언사를 내뱉고 그를 우습게 여기게 된 것도 그가 악덕 개발업자인 큰아버지의 똘마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였다. 초등학생이지만 자존심과 정의감, 그리고 나름의 철학을 지닌 소년이 만돌이다.


  "저의 또 다른 꿈은요, 거짓말쟁이예요. 거짓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요. 거짓말을 잘해야 교장선생님도 되구요, 장관이나 대통령도 된대요. 거짓말을 못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출세할 수가 없고 부자도 될 수 없대요. 그래서 거짓말을 아주 잘하고 싶어요."

_ <은행나무 소년> 90쪽.


    부모의 죽음과, 이어서 따라오는 공동체의 붕괴. 그리고 점차 치매가 심해져 가는 할머니의 상태는 만돌이의 존재 근거를 근저에서부터 뒤흔드는 상실과 파괴의 힘이다. 소년은 그것들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한다. 어느 날 공부방 선생님으로 나타난 사진학과 여대생 여수경. 아이들에게 휴대용 카메라를 나눠 주고 가족과 동네를 카메라에 담아 보라는 숙제를 준 여수경을 만돌이는 짝사랑이자 첫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 만돌이를 '서방'이라 부르며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사차원 소녀 지혜. 할머니를 연모하며 보살피는 만돌이의 친구 침쟁이 할아버지. 주민들과 함께 철거 반대 투쟁을 벌이는 최 목사님과 하율 스님 등은 만돌이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들로써, 힘겨운 싸움을 치르는 만돌이를 돕는다.

  철거를 쉽게 하고자 동네에 불을 지르는 박정철과 건설업체, 철거에 맞서 망루를 짓고 싸움을 벌이는 주민들, 그리고 망루에 불이 나면서 철거민 네 사람과 경찰 특공대 한 사람이 숨지는 사고 등은 최근 우리 사회가 목격한 아픈 사건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이 재개발과 철거의 문제점을 다룬 르포나 고발문학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망루가 불에 타고 경찰과 용역이 주민들을 짓밟는 장면을 뜻밖의 시적인 필치로 처리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탄다. 얼어붙은 땅 위에서 몸을 구르지만 사람의 몸에 심지를 내린 불꽃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죽음의 불꽃춤이다. 사람이 운다. 울음소리가 새벽하늘을 가득 채운다. 사람의 울음을 군화가 짓밟고 곤봉이 때리고 방패로 찍는다. 사람의 울음에 불이 붙는다."

_ <은행나무 소년> 291쪽.


  만돌이는 제 집 앞에 은행나무에 나름의 바리케이드와 농성장을 만들고 철거 용역들에 맞선다. 나무 밑에 묻은 어머니의 유해를 지키려는 것이다. 소년의 안쓰러운 항거도 보람없이 은행나무는 동네 집들과 함께 뿌리뽑혀 사라지고 만다. 그럼에도, 그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놓아둔 화분에서 작은 은행잎 두 개가 올라온다는 결말은 희망의 여지를 열어 둔다. 그 어린 잎들은 만돌이를 대신해서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그래 씨바, 행복해지고 말 테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과 같은 단어들이 없었다면, 2000년대 한국사회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60~70년대 투쟁과 암흑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나라의 모습이 이런 것일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경제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이지만, 아직도 경제·사회적으로 낙후된 지역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다. 소설을 읽던 중 외할머니의 '치매' 소식을 접하고, 화자인 만돌이와 함께 가슴아파하던 기억이 책을 덮고도 손에 떨림을 가져왔다. '할머니 제발 건강해지세요'라는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만돌아, 재개발조합원들을 모두 악마라고 생각하진 마. 사람을 천사와 악마로 나누어버리면 그 무엇도 할수가 없단다. 사람은 그냥 사람이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망루에 있는 사람은 착하고 철거용역은 나쁘고,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야.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번씩 착해졌다가 나빠졌다가 한단다. 나는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천사마을에 있는 게 아니야. 뭐랄까, 거대한 욕망에 희생당하는 작고 사소한 소망들이 안쓰러워서 있는 거야. 그 작고 애절한 소망도 지켜주지 못하면서 바벨탑만 높이 쌓는 인간의 욕망이 무섭고 두려워서 있는 거지."

_ <은행나무 소년> 18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