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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이라고 말해
우웸 아크판 지음, 김명신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아프리카는 생명이 기원하고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풍요의 땅이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 가난과 기아와 종교 분쟁과 부족 전쟁,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참혹한 결과인, 뼈마디가 드러날 만큼 깡마른 몸에 유난히 커다랗고 반짝이는 동그란 눈을 하고 배만 볼록한 까만 아이를 보면 누구나 아프리카를 떠올린다. 풍요로운 생명의 땅이었던 아프리카가 이제 척박한 궁핍의 땅, 그곳에 가려면 치안부터 걱정해야 하는 살벌한 땅이 되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자랄 수 있을까?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과 고통을 알리기 위해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나이지리아 작가 우웸 아크판의 『한편이라고 말해』에 수록된 다섯 편의 중단편은 아이들의 눈으로 현재 아프리카의 비극을 낱낱이 드러낸다.
「크리스마스 성찬」은 절대적인 빈곤에 끝없이 희생당하는 아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허기를 잊기 위해 접착제를 흡입하며 환각에 빠져드는 아이, 사람들의 동정심을 사기 위해 갓난아기를 업고 구걸을 하는 아이, 열두 살의 나이에 짙은 화장을 하고 매춘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이……. 이 아이들이 거리 한켠의 허름한 천막 속에서 복닥거린다. 이 비참한 광경들을 지켜보노라면 절로 분노가 솟구치는데 그 부모의 행태를 마주하면 격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끔찍한 가난 속에서도 여섯 아이를 주렁주렁 낳은 엄마는 구호 물품을 얻으러 다니고 아빠는 좀도둑질을 하면서 어린 딸이 백인에게 몸을 팔아 크리스마스 성찬을 장만해 오길 무기력하게 기다릴 뿐이다. 동생 공부시키고 언젠가는 자기도 공부하고 싶어서 하루 종일 몸을 팔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매음굴로 들어가는 것이 희망인(어떻게 그런 절망이 희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린 소녀 앞에서는 어떤 불평불만도 용납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빈곤 앞에 상대적인 빈곤으로 인한 박탈감은 그저 사치일 뿐이다.
「가봉에 가기 위해 살찌우기」는 아동 인신매매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실상을 고발한다. 삼촌이 에이즈에 걸린 형님 부부를 대신해서 떠맡게 된 두 조카를 팔아 중국산 오토바이를 산다. 열 살 오빠 코칙파와 다섯 살 누이 예와는 자신들을 완전히 팔아넘기기 전에 통통하게 살을 찌우려는 삼촌의 속셈도 모른 채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삼촌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이는 아이들의 순진한 시선과, 인신매매단을 양부모라며 아이들을 속이고 당국에 들키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진행시키는 삼촌과 인신매매단의 음흉한 시선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래도 삼촌은 핏줄인지라 마지막에는 조카들을 지키려다가 참혹한 죽음을 맞지만, 이 아이들을 팔아넘기는 일에 온 마을 사람들이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다. 역시 자식을 키우는 어느 아버지부터 학교 선생님까지, 아동 인권이 이처럼 무참하게 유린되는 광경 앞에서는 아무리 믿기지 않아도 다만 소설이라고 외면할 수만은 없다. 눈에 보이는 사실 이면의 진실까지 파헤치는 것이 소설이니까.
「이건 무슨 언어지?」와 「럭셔리 영구차」는 극단적인 종교 분쟁의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유혈도 불사하는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첨예한 갈등은 악명이 높지만, 사실 그것은 텔레비전 속에서 벌어지는 (안타깝지만 내 일 같지도 않은) 불구경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편협한 신앙을 빌미로 갈등하는 어른들의 싸움에 아이들까지 잔인하게 희생당하리라는 것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일어난 이슬람 폭동을 배경으로 하는 「이건 무슨 언어지?」에는 발코니에서 마주 바라보면 손 닿을 듯한 거리의 맞은편 집에 사는, 이슬람교 부모에게서 태어난 소녀와 그리스도교 부모에게서 태어난 소녀가 등장한다. 이 어린 소녀들은 단짝 친구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종교를 가진 부모들이 서로에게 적대감을 보이면서 두 소녀마저 떼어놓는다. 소녀들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 어른들의 종교 같은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순진무구한 꼬마들인데도 말이다. 이 이야기는 『한편이라고 말해』에서 그나마 희망 같은 것이 조금 보여 그동안 절로 멈춰졌던 숨을 잠시 내쉴 수 있는데, 두 소녀는 어른들과는 아랑곳없이 무엇에도 변질되지 않는 우정을 확인하는 무언의 몸짓을 나눈다.
「럭셔리 영구차」는…… 생각만 해도 목이 멘다. 나이지리아 북부의 이슬람 폭동을 배경으로 한 이 중편은 이슬람교도이자 그리스도교도로 태어났지만 이슬람교도들에게도 그리스도교도들에게도 잔인하게 버림받는 한 소년을 등장시킨다. 열여섯 소년 주브릴은 남부에서 북부 이슬람교도인 엄마와 남부 가톨릭교도인 아빠 사이에 태어나 영아세례를 받았지만, 북부의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 성장기를 보내면서 그들의 모범이 되는 독실한 이슬람교도로 자랐다. 다종교 국가로 언제든 갈등이 증폭될 수 있는 평화가 불안하게 유지될 때는 아무도 가톨릭교도의 핏줄을 문제 삼지 않았지만, 막상 이슬람 폭동이 일어나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형제와의 천륜도 저버린 채 지켜온 이슬람교도의 핏줄은 오히려 독이 된다. 무슬림임을 상징하는 ‘절단된 손목’이 선명하게 남아 있건만 주브릴은 그리스도교도보다 더 악질인 ‘배반자’로 낙인찍힌다. 너무나 기가 막힌 것은 신앙의 문제처럼 비쳐졌던 폭동이 사실은 세속적인 욕심으로 얼룩진 집단 광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주브릴을 고발한 사람은 그에게 빚을 진 친구들이다.
주브릴은 자신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친구와 이웃 들을 피해 북부 그리스도교도들의 피난길에 끼어들게 되는데, 『한편이라고 말해』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이 소설은 줄곧 주브릴이 간신히 오른 ‘럭셔리 버스’ 안의 풍경을 주브릴의 시선으로 전한다. 이슬람교도들의 잔혹한 박해에 분노하는 그리스도교들 사이에서 ‘절단된 손목(무슬림)’을 감춘 채 그리스도교도로 힘겹게 위장해야 하지만, ‘럭셔리 버스’는 주브릴을 아버지에게로 안전하게 데려다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남부에서는 북부의 이슬람 폭동에 맞서 그리스도교도들이 이슬람교도들을 무참하게 살육했고, 그리스도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의 시체를 가득 실은 럭셔리 버스 ‘럭셔리 영구차’가 북부에서 남부로, 남부에서 북부로 무수히 오간다. 주브릴에게 더 이상 안전한 곳이란 없다. 주브릴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럭셔리 버스’는 주브릴에게는 ‘럭셔리 영구차’로도 허락되지 않는다. ‘절단된 손목’을 들킨 주브릴은 이곳에서도 이슬람교도보다 더 악질인 ‘배반자’로 낙인찍힌 채 길가의 시체로 남겨진다.
도대체 종교가 무엇인가? 종교가 무엇이건데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친형마저 외면하도록 소년을 몰아가는가? 어린 소년에게 베풀 동정심 한 자락도 남기지 않는가?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 것이 종교다! 종교를 핑계로 사람을 해치는 순간 그것은 끔찍한 집단 광란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님의 침실」은 「럭셔리 영구차」와 비슷한 이야기다. 다만 이번에는 ‘종교’가 아니라 ‘부족(인종)’이 문제가 될 뿐이다. 후투족 아빠와 투치족 엄마를 둔 열 살 소녀 모니크의 시선으로 르완다에서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일어난 대학살이 참혹하게 그려진다. 사실 나는 이 르완다 내전에 대해 무지했는데, 벨기에의 교활한 식민 통치로 정점에 달한 듯하지만 그 이전의 역사에 뿌리를 둔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갈등은 「호텔 르완다」라는 영화로 잘 알려져 있나 보다. 지배계층이었던 소수 투치족과 피지배계층이었던 다수 후투족, 벨기에를 등에 업고 후투족을 착취한 투치족, 르완다 독립 후 투치족을 박해한 후투족, 이때 국외추방당한 투치족이 반군을 조직하여 르완다 침공, 이에 위기를 느낀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 이에 맞서 투치족이 후투족을 학살…….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증오와 보복의 역사가 있어도, 후투족과 투치족이 만나서 하나가 된 가족을 갈가리 찢어놓는 짓이 자행돼서는 절대 안 된다. 부족이 다르다고 남편에게 직접 사랑하는 아내의 목을 치게 하는 것은, 아빠가 엄마를 죽이는 모습을 지켜보도록 아이를 방치하는 것은 너무나 잔혹한 일이다. 투치족 부인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후투족 남편을 죽이려고 몰려온 투치족들은 모니크네 집을 불사른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일은 모니크네 집 천장에 숨어 있던 많은 동족들을 살해한 셈이 된다. 동족을 위한 일이 동족을 죽이는 일이 된 것이다.
엄마는 죽기 전에 모니크에게 당부한다. “누구든지 물으면, 너는 그들과 같은 부족이라고 말해!” 엄마의 말은 딸을 살리려는 기도문과 같다. 종교든, 종족이든 무엇이든 다른 것은 용납하지 못한 채 ‘내 편’과 ‘네 편’을 갈라 서로를 죽이는 지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길은 ‘한편’이 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럭셔리 영구차」의 주브릴을 생각하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가, 후투족이자 투치족이지만 온전한 후투족도 투치족도 아닌 모니크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비극들이 선연하다.
이토록 길게, 오래도록 이 책을 읽으면서 온 마음으로 분노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바뀌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순식간에 무력해진다. 아프리카의 비극이 끝나길 기원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천 없는 책상 앞 지식만큼 무익하고 헛된 것은 없다. 일단 자신과 다른 종교를 좀처럼 이해하려들지 않는, 그리하여 결코 원치 않는 남에게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고 무리한 해외 선교가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막내동생에게 먼저 이 책을 읽힐 것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공부도 좀더 해야겠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찾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