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 고양이 우리 시대 우리 삶 2
황인숙 지음, 이정학 그림 / 이숲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름이란 역시 중요한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사람을 보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슬금슬금 피하는, 바로 얼마 전까지 도둑고양이라고 불리던 녀석들을 보면 말이다. 이 녀석들이 언젠가부터 길고양이라 불리게 되었다. 어떻게 길고양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도둑고양이보다는 훨씬 좋은 이름임에는 틀림없다. 도둑고양이라는 이름이 주는 음침한 느낌도 없고 그저 사는 곳이 길일 뿐인 녀석들이라는 느낌이다. 어떻게 보면 낭만적인 이름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런 이름과는 상관없이 길고양이들의 삶은 만만치 않다. 자동차 밑이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밤이슬을 피하고 쓰레기들 뒤져 먹을 것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런 음식 찌꺼기들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있는 셈이다. 물은 어떻게 마시나 늘 궁금했는데 비 오는 날 길에 고인 물을 핥는 고양이를 한참 지켜본 기억이 난다.

TV를 보거나 주위를 잠깐만 둘러봐도 알 수 있듯이 개와는 달리 유난히 고양이들이 집을 뛰쳐나온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길개’를 본 적이 많은가? 개를 찾는 광고지는 본 적이 많아도 고양이를 찾는 광고지들은 보기 힘들다. ‘길개’는 없어도 ‘길고양이’들이 많은 이유는 아마도 고양이들의 특징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라도 훌쩍 떠날 수 있는 것 같은 녀석들, 아마도 그런 집시 같은 성격을 지닌 녀석들이 집을 떠나 길고양이가 되겠지 라고 제멋대로 상상해 본다. 사실은 고양이와 친해지지 못하거나 키우다 귀찮아진 무책임하고 무정한 주인들이 내다 버린 경우가 훨씬 많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버려진 녀석들이 주인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지고 노숙을 택하게 되는 것이겠지. 주인은 이젠 귀찮은 짐을 떼어 버렸다고 좋아할지 모르지만 주인 역시 고양이에게 버려진 것이다.

황인숙 글, 이정학 그림의 『해방촌 고양이』는 고양이 같은 책이다. 잘 접어진 상자 속―책갈피 역시 딱 어울린다―에 고양이처럼 숨어 있는 작은 책으로 1부 [고양이로 산다는 것]에는 고양이들의 이야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해 2부 [더듬더듬 나들이]에는 서울 근교의 소소한 나들이 이야기고 3부 [사노라면]은 요즘 아이들과 작가의 어린 시절 추억에 대한 이야기며 4부 [더듬더듬 책읽기]는 책에 관한 감상과 추억으로 마감하고 있다. 고양이 이야기가 1부에서 끝나버려 너무 짧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화려하지 않아도 작가의 착할 정도로 솔직 담백한 에세이와 펜의 느낌이 강한 눈이 즐거워지는 삽화가 함께 있어 햇볕 좋은 날 고양이처럼 드러누워 갸르릉거리며 읽으면 좋을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리고르의 중매쟁이
줄리아 스튜어트 지음, 안진이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원래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운 이야기에 사족을 못 쓰는 편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만나면 다른 이야기들에서라면 단점이라고 시시콜콜 언급할 점들까지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콩깍지가 두세 겹 씐달까. 줄리아 스튜어트의 『페리고르의 중매쟁이』가 그런 이야기의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늘어놓는 찬사들은 모두 개인적인 취향에 기댄 것임을 밝혀둔다.

사실 『페리고르의 중매쟁이』를 읽을 즈음 나는 글자에 체해 머릿속이 더부룩한 상태에서 문장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낱자로 눈앞까지는 이르되 의미로 마음까지는 이르지 않아 별 감흥 없이 습관적으로 책장만 팔락팔락 넘기고 있었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기욤 라두세트가 어찌하여 천직인 이발사를 포기하고 엉뚱하게 중매쟁이의 길로 들어섰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할 때만 해도 그 증세는 가실 줄 몰랐다. 하지만 동화적이고 환상적이며 능청스러운 분위기의 낌새를 슬슬 알아채가면서 내 머릿속은 고풍스러운 성이 있는 작은 마을 ‘아무르 수르 벨르’로 가득 들어찼다.

아무르 수르 벨르는 프랑스 페리고르 초원 지대에 작가의 상상력으로 세운 가상의 마을이다. 33명밖에 살지 않는 이곳에는 마을의 이름값(Amour sur Belle)도 제대로 못할 만큼 변변한 연애 사건 하나 없이 무미건조한 생활을 이어가는 중년 이상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런데 유행을 따르지 않고 머리 모양에 대한 소신을 지키다가 한물간 이발사 기욤 라두세트가 중매쟁이로 전업하자, 서로의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작은 마을에 사랑의 작대기가 어지럽게 그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기욤은 아무르 수르 벨르의 33명과 어쩌다 그곳에 들르는 약간 명을 잠재 고객으로 삼아 ‘듀오’ 같은 결혼정보업체를 만들어 커플 매니저로 나선 것이다. 겨우 33명, 여기에 여남은 명 추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시골 마을, 별 긴장감 없이 평화롭게 흘러가는 일상, 그리고 연애 세포가 말라버린 듯한 중년. 기욤이 중매쟁이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성공은커녕 밥벌이나 될까 싶지만, 기욤이 만든 ‘마음의 욕망’은 구멍가게여도 이 사업을 위해 갖춰야 할 서비스는 제대로 갖추고 있다. 단지 기욤 자신이 첫사랑을 놓친 뒤 아직까지 독신으로 외롭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만 빼면.

평화롭기 그지없지만 별일 없이 무료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중년의 독신들은 사랑의 설렘이 간절했을까. 한두 명씩 ‘마음의 욕망’의 문을 두드리고, 기욤은 날마다 얼굴을 부딪치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을 짝 지워준다. 그러나 자기 사랑도 이루지 못한 사람의 조언은 어딘지 미덥지 못한 법. 기욤의 그럴싸한 소개와 그럴듯한 조언은 번드르르하지만, 사랑의 작대기는 매번 엇갈린다. 그리고 기욤이 지금껏 답장하지 못한 편지만 남기고 떠난 첫사랑 에밀리에 프레세도 돌아와 ‘마음의 욕망’을 찾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는 단연코 에밀리에다. 강하고 아름답고 싱싱하던 젊은 아가씨는 ‘너무 일찍 세어버린 잿빛 머리를 보석 핀으로 고정하고, 무릎 아래로 치렁치렁 늘어진 밑단을 가위로 과감하게 잘라낸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온갖 청소도구를 이용해 드넓은 성을 휘저으며 구석구석 쓸고 닦고 윤내는’ 성의 여주인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라! 너무나 낭만적이고 예쁘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는 (아무르 수르 벨르 사람들이 생각하길) 퇴락하고 황량하고 수치스러운 성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성 안에 두껍게 내려앉은 먼지, 성벽에 피어난 곰팡이, 종탑에 산처럼 쌓인 박쥐의 배설물, 마구 자라난 풀숲, 여기저기 무너져 내린 성가퀴까지. 고풍스러운 성의 여주인이자 청소부로 살아가는 에밀리에는 동화 속에서 방금 걸어 나온 것처럼 반짝인다.

해피엔딩이 예견되는 모든 소설이 그렇듯이 좌충우돌 그어지는 사랑의 작대기 속에서도 기욤과 에밀리에는 오랜 시간을 돌아 서로를 향해 다가간다. 에밀리에를 향한 기욤의 사랑의 작대기에도 귀여운 해프닝이 숨어 있지만, 일일이 언급하다가는 끝이 없겠다. 그러나 정확히 아무르 수르 벨르에만 몰아치는 ‘미니 토네이도’는 잠깐 언급해야겠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처럼 강력한 바람을 이끌고 몰아닥치는 미니 토네이도는 별일 없이 너무나 평온하여 무료하기 짝이 없는 마을에 ‘사랑’과 ‘비밀’이라는 사건을 불러와 사람들 사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사실 이 소설의 모든 사랑은 미니 토네이도에서 시작되어 미니 토네이도로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 깜찍한 장치가 아닌가. 단점도 덮어버리는 이 모든 나만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꼭 읽어봐야 한다고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에밀리에’라는 아름다운 환상에 흠뻑 빠졌다가 깨어난 것만으로 이 책을 읽은 것은 행운이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 책을 읽는 데 꽤 오랜 시간을 끌었지만, 그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민음사 모던 클래식 29
알레산드로 보파 지음,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화(寓話)는 동물이나 무정물의 의인화를 통해 만들어진 짧은 이야기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고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어 익숙한 우화로는 이솝 이야기가 있다.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물론 별주부전(토끼전) 역시 잘 알려진 우화소설이다. 이처럼 우화는 접근하기 쉬운 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 사회나 인간에 대한 풍자와 삶을 에둘러 이야기한다. 생물학을 공부하고 동물유전학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개구리와 쥐를 흥분시켜 정액을 얻는 일에 염증을 느껴 오랜 휴가를 얻어 글을 쓰게 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알레산드로 보파의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동물의 독특한 본능과 습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욕망을 풍자해 냈다.

비스코비츠(V.I.S.K.O.V.I.T.Z.)는 ‘매우 똑똑하고 유능한 동물종 중에서도 매우 똑똑한 우등종(Very Intelligent Superior Kind Of Very Intelligent and Talented Zootype)’의 약자-「길을 찾아냈구나, 비스코비츠」 중에서-로 스무 개의 이야기 속에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비스코비츠들은 그 이름은 물론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들의 삶 역시 인간의 삶을 투영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각각의 이야기 속에는 주인공 비스코비츠와 사랑하는 연인(일지도 모르는) 리우바가 있다. 그리고 이들은 사랑하고 배신하며 먹고 먹히며 살아간다.

성형으로 대표되는 외모 지상주의를 꼬집은 꿀벌 비스코비츠(「넌 정말 못생긴 밀랍 인형이야, 비스코비츠!」), 권력과 돈을 탐하지만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찾지 못한 개미와 풍뎅이 비스코비츠(「이름이 나쁘구나, 비스코비츠」, 「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비스코비츠」), 가장들의 고단한 삶을 살지만 외로울 수 밖에 없는 되새와 엘크 비스코비츠(「그래 봤자 소용없어, 비스코비츠」, 「뿔이 있군, 비스코비츠」),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근친을 일삼게 되는 해면류 비스코비츠(「한잔하지, 비스코비츠」), 고단한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전혀 다른 삶을 꿈꾸는 겨울잠쥐 비스코비츠(「요즘 사는 게 어때, 비스코비츠?」)등 이처럼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비스코비츠의 이야기는 허황되고 비극적이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의 너무나도 현실적인 비스코비츠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다. 꿀벌처럼 변신해 개미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고 사람들의 모습은 앵무새와 흰쥐와 풍뎅이와 엘크와 해면류와 다르지 않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경쟁자를 짓밟고 성공하면 최고가 되고 이것을 부러워하는 세상이니 뭐 어쩌랴, 이렇게 할 수 없다면 겨울잠쥐처럼 항상 다른 삶을 꿈꾸는 수밖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편이라고 말해
우웸 아크판 지음, 김명신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아프리카는 생명이 기원하고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풍요의 땅이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 가난과 기아와 종교 분쟁과 부족 전쟁,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참혹한 결과인, 뼈마디가 드러날 만큼 깡마른 몸에 유난히 커다랗고 반짝이는 동그란 눈을 하고 배만 볼록한 까만 아이를 보면 누구나 아프리카를 떠올린다. 풍요로운 생명의 땅이었던 아프리카가 이제 척박한 궁핍의 땅, 그곳에 가려면 치안부터 걱정해야 하는 살벌한 땅이 되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자랄 수 있을까?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과 고통을 알리기 위해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나이지리아 작가 우웸 아크판의 『한편이라고 말해』에 수록된 다섯 편의 중단편은 아이들의 눈으로 현재 아프리카의 비극을 낱낱이 드러낸다.

「크리스마스 성찬」은 절대적인 빈곤에 끝없이 희생당하는 아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허기를 잊기 위해 접착제를 흡입하며 환각에 빠져드는 아이, 사람들의 동정심을 사기 위해 갓난아기를 업고 구걸을 하는 아이, 열두 살의 나이에 짙은 화장을 하고 매춘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이……. 이 아이들이 거리 한켠의 허름한 천막 속에서 복닥거린다. 이 비참한 광경들을 지켜보노라면 절로 분노가 솟구치는데 그 부모의 행태를 마주하면 격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끔찍한 가난 속에서도 여섯 아이를 주렁주렁 낳은 엄마는 구호 물품을 얻으러 다니고 아빠는 좀도둑질을 하면서 어린 딸이 백인에게 몸을 팔아 크리스마스 성찬을 장만해 오길 무기력하게 기다릴 뿐이다. 동생 공부시키고 언젠가는 자기도 공부하고 싶어서 하루 종일 몸을 팔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매음굴로 들어가는 것이 희망인(어떻게 그런 절망이 희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린 소녀 앞에서는 어떤 불평불만도 용납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빈곤 앞에 상대적인 빈곤으로 인한 박탈감은 그저 사치일 뿐이다.

「가봉에 가기 위해 살찌우기」는 아동 인신매매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실상을 고발한다. 삼촌이 에이즈에 걸린 형님 부부를 대신해서 떠맡게 된 두 조카를 팔아 중국산 오토바이를 산다. 열 살 오빠 코칙파와 다섯 살 누이 예와는 자신들을 완전히 팔아넘기기 전에 통통하게 살을 찌우려는 삼촌의 속셈도 모른 채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삼촌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이는 아이들의 순진한 시선과, 인신매매단을 양부모라며 아이들을 속이고 당국에 들키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진행시키는 삼촌과 인신매매단의 음흉한 시선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래도 삼촌은 핏줄인지라 마지막에는 조카들을 지키려다가 참혹한 죽음을 맞지만, 이 아이들을 팔아넘기는 일에 온 마을 사람들이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다. 역시 자식을 키우는 어느 아버지부터 학교 선생님까지, 아동 인권이 이처럼 무참하게 유린되는 광경 앞에서는 아무리 믿기지 않아도 다만 소설이라고 외면할 수만은 없다. 눈에 보이는 사실 이면의 진실까지 파헤치는 것이 소설이니까.

「이건 무슨 언어지?」와 「럭셔리 영구차」는 극단적인 종교 분쟁의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유혈도 불사하는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첨예한 갈등은 악명이 높지만, 사실 그것은 텔레비전 속에서 벌어지는 (안타깝지만 내 일 같지도 않은) 불구경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편협한 신앙을 빌미로 갈등하는 어른들의 싸움에 아이들까지 잔인하게 희생당하리라는 것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일어난 이슬람 폭동을 배경으로 하는 「이건 무슨 언어지?」에는 발코니에서 마주 바라보면 손 닿을 듯한 거리의 맞은편 집에 사는, 이슬람교 부모에게서 태어난 소녀와 그리스도교 부모에게서 태어난 소녀가 등장한다. 이 어린 소녀들은 단짝 친구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종교를 가진 부모들이 서로에게 적대감을 보이면서 두 소녀마저 떼어놓는다. 소녀들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 어른들의 종교 같은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순진무구한 꼬마들인데도 말이다. 이 이야기는 『한편이라고 말해』에서 그나마 희망 같은 것이 조금 보여 그동안 절로 멈춰졌던 숨을 잠시 내쉴 수 있는데, 두 소녀는 어른들과는 아랑곳없이 무엇에도 변질되지 않는 우정을 확인하는 무언의 몸짓을 나눈다.

「럭셔리 영구차」는…… 생각만 해도 목이 멘다. 나이지리아 북부의 이슬람 폭동을 배경으로 한 이 중편은 이슬람교도이자 그리스도교도로 태어났지만 이슬람교도들에게도 그리스도교도들에게도 잔인하게 버림받는 한 소년을 등장시킨다. 열여섯 소년 주브릴은 남부에서 북부 이슬람교도인 엄마와 남부 가톨릭교도인 아빠 사이에 태어나 영아세례를 받았지만, 북부의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 성장기를 보내면서 그들의 모범이 되는 독실한 이슬람교도로 자랐다. 다종교 국가로 언제든 갈등이 증폭될 수 있는 평화가 불안하게 유지될 때는 아무도 가톨릭교도의 핏줄을 문제 삼지 않았지만, 막상 이슬람 폭동이 일어나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형제와의 천륜도 저버린 채 지켜온 이슬람교도의 핏줄은 오히려 독이 된다. 무슬림임을 상징하는 ‘절단된 손목’이 선명하게 남아 있건만 주브릴은 그리스도교도보다 더 악질인 ‘배반자’로 낙인찍힌다. 너무나 기가 막힌 것은 신앙의 문제처럼 비쳐졌던 폭동이 사실은 세속적인 욕심으로 얼룩진 집단 광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주브릴을 고발한 사람은 그에게 빚을 진 친구들이다.

주브릴은 자신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친구와 이웃 들을 피해 북부 그리스도교도들의 피난길에 끼어들게 되는데, 『한편이라고 말해』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이 소설은 줄곧 주브릴이 간신히 오른 ‘럭셔리 버스’ 안의 풍경을 주브릴의 시선으로 전한다. 이슬람교도들의 잔혹한 박해에 분노하는 그리스도교들 사이에서 ‘절단된 손목(무슬림)’을 감춘 채 그리스도교도로 힘겹게 위장해야 하지만, ‘럭셔리 버스’는 주브릴을 아버지에게로 안전하게 데려다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남부에서는 북부의 이슬람 폭동에 맞서 그리스도교도들이 이슬람교도들을 무참하게 살육했고, 그리스도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의 시체를 가득 실은 럭셔리 버스 ‘럭셔리 영구차’가 북부에서 남부로, 남부에서 북부로 무수히 오간다. 주브릴에게 더 이상 안전한 곳이란 없다. 주브릴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럭셔리 버스’는 주브릴에게는 ‘럭셔리 영구차’로도 허락되지 않는다. ‘절단된 손목’을 들킨 주브릴은 이곳에서도 이슬람교도보다 더 악질인 ‘배반자’로 낙인찍힌 채 길가의 시체로 남겨진다.

도대체 종교가 무엇인가? 종교가 무엇이건데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친형마저 외면하도록 소년을 몰아가는가? 어린 소년에게 베풀 동정심 한 자락도 남기지 않는가?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 것이 종교다! 종교를 핑계로 사람을 해치는 순간 그것은 끔찍한 집단 광란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님의 침실」은 「럭셔리 영구차」와 비슷한 이야기다. 다만 이번에는 ‘종교’가 아니라 ‘부족(인종)’이 문제가 될 뿐이다. 후투족 아빠와 투치족 엄마를 둔 열 살 소녀 모니크의 시선으로 르완다에서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일어난 대학살이 참혹하게 그려진다. 사실 나는 이 르완다 내전에 대해 무지했는데, 벨기에의 교활한 식민 통치로 정점에 달한 듯하지만 그 이전의 역사에 뿌리를 둔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갈등은 「호텔 르완다」라는 영화로 잘 알려져 있나 보다. 지배계층이었던 소수 투치족과 피지배계층이었던 다수 후투족, 벨기에를 등에 업고 후투족을 착취한 투치족, 르완다 독립 후 투치족을 박해한 후투족, 이때 국외추방당한 투치족이 반군을 조직하여 르완다 침공, 이에 위기를 느낀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 이에 맞서 투치족이 후투족을 학살…….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증오와 보복의 역사가 있어도, 후투족과 투치족이 만나서 하나가 된 가족을 갈가리 찢어놓는 짓이 자행돼서는 절대 안 된다. 부족이 다르다고 남편에게 직접 사랑하는 아내의 목을 치게 하는 것은, 아빠가 엄마를 죽이는 모습을 지켜보도록 아이를 방치하는 것은 너무나 잔혹한 일이다. 투치족 부인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후투족 남편을 죽이려고 몰려온 투치족들은 모니크네 집을 불사른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일은 모니크네 집 천장에 숨어 있던 많은 동족들을 살해한 셈이 된다. 동족을 위한 일이 동족을 죽이는 일이 된 것이다.

엄마는 죽기 전에 모니크에게 당부한다. “누구든지 물으면, 너는 그들과 같은 부족이라고 말해!” 엄마의 말은 딸을 살리려는 기도문과 같다. 종교든, 종족이든 무엇이든 다른 것은 용납하지 못한 채 ‘내 편’과 ‘네 편’을 갈라 서로를 죽이는 지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길은 ‘한편’이 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럭셔리 영구차」의 주브릴을 생각하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가, 후투족이자 투치족이지만 온전한 후투족도 투치족도 아닌 모니크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비극들이 선연하다.

이토록 길게, 오래도록 이 책을 읽으면서 온 마음으로 분노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바뀌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순식간에 무력해진다. 아프리카의 비극이 끝나길 기원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천 없는 책상 앞 지식만큼 무익하고 헛된 것은 없다. 일단 자신과 다른 종교를 좀처럼 이해하려들지 않는, 그리하여 결코 원치 않는 남에게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고 무리한 해외 선교가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막내동생에게 먼저 이 책을 읽힐 것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공부도 좀더 해야겠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찾아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는 그녀의 문장들이 생각보다 평범해서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번역한 몇몇 소설들을 사랑하고, 그래서 내게는 신뢰하는 번역가로 먼저 다가온 그녀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나 보다. 게다가 그 이후에 그녀가 (들으면 그리 달갑지 않아 하겠지만) ‘장애인’ 영문학 교수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절로 경외심이 들었다. 세련되고 화려하고 유려한 문장을 뽐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토록 평범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남다른 무엇을 기대한다면 실망스러운 마음이 앞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쉬운 말들로, 젠체하지 않고 써 내려간 문장들에서 이내 단단한 심지와 따뜻한 연민과 꾸밈없이 소박한 진심이 느껴져 왔다. 그게 참 아름다웠다. 그녀의 이야기를 한 편 한 편 읽으면서 문득문득 울컥거렸던 것은 그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 이야기를 하는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집에 욕심껏 책 더미를 여기저기 쌓아두고서도 언제나 성에 차지 않는 책에 대한 내 목마름 때문이다. 내가 읽거나 사거나 한 책들 말고도 아직 내 눈에 띄지 않은 멋진 책들을 생각하면 조급해진다. 다른 사람은 어떤 책을 읽을까도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지만, 내가 몰랐던 ‘흙 속의 진주’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평소보다 한층 빨라진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기 시작하면서도 그런 잿밥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한 권 분량의 저작물에 집중하기보다 장편소설은 물론 시나 에세이 한 편, 작가의 말 한마디에서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책은 ‘문학 에세이’니만큼 그런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이 책이 감동적일 수 있는 것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과 삶’으로 귀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는 윌리엄 포크너의 말을 인용했다. 그 말은 곧 문학에 대한 그녀의 신념이리라. 내게는, 문학은 삶을 기반으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 말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와 닿는다. 사실 내 삶의 뭔가를 변화시키고 싶어서 문학(=거의 소설≒책)이라는 것을 읽어온 것은 아니었다. 문학이 인간의 삶과 결코 유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나와는 교집합이 없는 삶이라 생각하고 내 삶에서 그 삶으로 기꺼이 도망쳤다. 내 삶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는 놀잇감일 뿐이라고 고집스레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의 8할은 지금껏 내가 읽어온 책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어떤 책을 읽었건 그때마다 책과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조응하면서 생각하고, 고집하고, 변화했을 것이다. 게다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 인류의 마지막 순간까지 천착해야 할 화두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지(※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인간 삶의 진실을 현실보다 더 명징하게 길어 올리는 문학은 그래서 위대하다. 문학은 훈계하지 않고도 어느새 정신에 스며들어 삶의 좌표가 되어준다. 문학의 무용성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다치바나 다카시는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

그녀는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이 소설이, 시가, 에세이가, 말이 자신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음을 이야기한다. 그녀가 들려주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이, 그것들은 언제나 자기 삶을 오롯이 비춰주는 거울이었음을 이야기한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인데도 그 이야기 속에서 나 자신을 찾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하면서 그녀가 마지막까지 믿은 “수십억의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고 자리싸움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적 보편성을 찾아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가르치는” 문학의 과업을 이제야 진지하게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