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고르의 중매쟁이
줄리아 스튜어트 지음, 안진이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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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원래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운 이야기에 사족을 못 쓰는 편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만나면 다른 이야기들에서라면 단점이라고 시시콜콜 언급할 점들까지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콩깍지가 두세 겹 씐달까. 줄리아 스튜어트의 『페리고르의 중매쟁이』가 그런 이야기의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늘어놓는 찬사들은 모두 개인적인 취향에 기댄 것임을 밝혀둔다.

사실 『페리고르의 중매쟁이』를 읽을 즈음 나는 글자에 체해 머릿속이 더부룩한 상태에서 문장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낱자로 눈앞까지는 이르되 의미로 마음까지는 이르지 않아 별 감흥 없이 습관적으로 책장만 팔락팔락 넘기고 있었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기욤 라두세트가 어찌하여 천직인 이발사를 포기하고 엉뚱하게 중매쟁이의 길로 들어섰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할 때만 해도 그 증세는 가실 줄 몰랐다. 하지만 동화적이고 환상적이며 능청스러운 분위기의 낌새를 슬슬 알아채가면서 내 머릿속은 고풍스러운 성이 있는 작은 마을 ‘아무르 수르 벨르’로 가득 들어찼다.

아무르 수르 벨르는 프랑스 페리고르 초원 지대에 작가의 상상력으로 세운 가상의 마을이다. 33명밖에 살지 않는 이곳에는 마을의 이름값(Amour sur Belle)도 제대로 못할 만큼 변변한 연애 사건 하나 없이 무미건조한 생활을 이어가는 중년 이상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런데 유행을 따르지 않고 머리 모양에 대한 소신을 지키다가 한물간 이발사 기욤 라두세트가 중매쟁이로 전업하자, 서로의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작은 마을에 사랑의 작대기가 어지럽게 그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기욤은 아무르 수르 벨르의 33명과 어쩌다 그곳에 들르는 약간 명을 잠재 고객으로 삼아 ‘듀오’ 같은 결혼정보업체를 만들어 커플 매니저로 나선 것이다. 겨우 33명, 여기에 여남은 명 추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시골 마을, 별 긴장감 없이 평화롭게 흘러가는 일상, 그리고 연애 세포가 말라버린 듯한 중년. 기욤이 중매쟁이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성공은커녕 밥벌이나 될까 싶지만, 기욤이 만든 ‘마음의 욕망’은 구멍가게여도 이 사업을 위해 갖춰야 할 서비스는 제대로 갖추고 있다. 단지 기욤 자신이 첫사랑을 놓친 뒤 아직까지 독신으로 외롭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만 빼면.

평화롭기 그지없지만 별일 없이 무료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중년의 독신들은 사랑의 설렘이 간절했을까. 한두 명씩 ‘마음의 욕망’의 문을 두드리고, 기욤은 날마다 얼굴을 부딪치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을 짝 지워준다. 그러나 자기 사랑도 이루지 못한 사람의 조언은 어딘지 미덥지 못한 법. 기욤의 그럴싸한 소개와 그럴듯한 조언은 번드르르하지만, 사랑의 작대기는 매번 엇갈린다. 그리고 기욤이 지금껏 답장하지 못한 편지만 남기고 떠난 첫사랑 에밀리에 프레세도 돌아와 ‘마음의 욕망’을 찾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는 단연코 에밀리에다. 강하고 아름답고 싱싱하던 젊은 아가씨는 ‘너무 일찍 세어버린 잿빛 머리를 보석 핀으로 고정하고, 무릎 아래로 치렁치렁 늘어진 밑단을 가위로 과감하게 잘라낸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온갖 청소도구를 이용해 드넓은 성을 휘저으며 구석구석 쓸고 닦고 윤내는’ 성의 여주인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라! 너무나 낭만적이고 예쁘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는 (아무르 수르 벨르 사람들이 생각하길) 퇴락하고 황량하고 수치스러운 성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성 안에 두껍게 내려앉은 먼지, 성벽에 피어난 곰팡이, 종탑에 산처럼 쌓인 박쥐의 배설물, 마구 자라난 풀숲, 여기저기 무너져 내린 성가퀴까지. 고풍스러운 성의 여주인이자 청소부로 살아가는 에밀리에는 동화 속에서 방금 걸어 나온 것처럼 반짝인다.

해피엔딩이 예견되는 모든 소설이 그렇듯이 좌충우돌 그어지는 사랑의 작대기 속에서도 기욤과 에밀리에는 오랜 시간을 돌아 서로를 향해 다가간다. 에밀리에를 향한 기욤의 사랑의 작대기에도 귀여운 해프닝이 숨어 있지만, 일일이 언급하다가는 끝이 없겠다. 그러나 정확히 아무르 수르 벨르에만 몰아치는 ‘미니 토네이도’는 잠깐 언급해야겠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처럼 강력한 바람을 이끌고 몰아닥치는 미니 토네이도는 별일 없이 너무나 평온하여 무료하기 짝이 없는 마을에 ‘사랑’과 ‘비밀’이라는 사건을 불러와 사람들 사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사실 이 소설의 모든 사랑은 미니 토네이도에서 시작되어 미니 토네이도로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 깜찍한 장치가 아닌가. 단점도 덮어버리는 이 모든 나만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꼭 읽어봐야 한다고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에밀리에’라는 아름다운 환상에 흠뻑 빠졌다가 깨어난 것만으로 이 책을 읽은 것은 행운이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 책을 읽는 데 꽤 오랜 시간을 끌었지만, 그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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