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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는 그녀의 문장들이 생각보다 평범해서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번역한 몇몇 소설들을 사랑하고, 그래서 내게는 신뢰하는 번역가로 먼저 다가온 그녀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나 보다. 게다가 그 이후에 그녀가 (들으면 그리 달갑지 않아 하겠지만) ‘장애인’ 영문학 교수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절로 경외심이 들었다. 세련되고 화려하고 유려한 문장을 뽐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토록 평범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남다른 무엇을 기대한다면 실망스러운 마음이 앞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쉬운 말들로, 젠체하지 않고 써 내려간 문장들에서 이내 단단한 심지와 따뜻한 연민과 꾸밈없이 소박한 진심이 느껴져 왔다. 그게 참 아름다웠다. 그녀의 이야기를 한 편 한 편 읽으면서 문득문득 울컥거렸던 것은 그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 이야기를 하는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집에 욕심껏 책 더미를 여기저기 쌓아두고서도 언제나 성에 차지 않는 책에 대한 내 목마름 때문이다. 내가 읽거나 사거나 한 책들 말고도 아직 내 눈에 띄지 않은 멋진 책들을 생각하면 조급해진다. 다른 사람은 어떤 책을 읽을까도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지만, 내가 몰랐던 ‘흙 속의 진주’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평소보다 한층 빨라진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기 시작하면서도 그런 잿밥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한 권 분량의 저작물에 집중하기보다 장편소설은 물론 시나 에세이 한 편, 작가의 말 한마디에서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책은 ‘문학 에세이’니만큼 그런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이 책이 감동적일 수 있는 것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과 삶’으로 귀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는 윌리엄 포크너의 말을 인용했다. 그 말은 곧 문학에 대한 그녀의 신념이리라. 내게는, 문학은 삶을 기반으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 말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와 닿는다. 사실 내 삶의 뭔가를 변화시키고 싶어서 문학(=거의 소설≒책)이라는 것을 읽어온 것은 아니었다. 문학이 인간의 삶과 결코 유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나와는 교집합이 없는 삶이라 생각하고 내 삶에서 그 삶으로 기꺼이 도망쳤다. 내 삶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는 놀잇감일 뿐이라고 고집스레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의 8할은 지금껏 내가 읽어온 책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어떤 책을 읽었건 그때마다 책과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조응하면서 생각하고, 고집하고, 변화했을 것이다. 게다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 인류의 마지막 순간까지 천착해야 할 화두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지(※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인간 삶의 진실을 현실보다 더 명징하게 길어 올리는 문학은 그래서 위대하다. 문학은 훈계하지 않고도 어느새 정신에 스며들어 삶의 좌표가 되어준다. 문학의 무용성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다치바나 다카시는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
그녀는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이 소설이, 시가, 에세이가, 말이 자신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음을 이야기한다. 그녀가 들려주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이, 그것들은 언제나 자기 삶을 오롯이 비춰주는 거울이었음을 이야기한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인데도 그 이야기 속에서 나 자신을 찾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하면서 그녀가 마지막까지 믿은 “수십억의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고 자리싸움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적 보편성을 찾아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가르치는” 문학의 과업을 이제야 진지하게 생각한다.